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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행

울산 개운포에서 처용암을 바라보며

울산 개운포에서 처용암을 바라보며
신비의 인물, 처용을 기리며

 
  처용암 전경

동경 밝은 달에/밤들이 노니다가
들어 자리를 보니/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해였고/둘은 누구핸고
본디 내해다마는/빼앗은 것을 어찌하리오

참, 처용은 문제적 인간이다. 아름다운 아내를 두고 밤늦도록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신 것도 문제이고, 그 아내가 외간 남자와 통정하는 장면을 보고서도 춤과 노래를 부르며 물러난 것도 문제이다. 한편으론 불타는 질투심을 억누르는 그 마음이 너무 무섭고, 또 한편으론 아내의 순진무구함을 이해하는 그 관용이 너무 깊다. 오죽하면 온갖 병을 몰고 다닌다는 역신이 처용에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까?

삼국유사 권2 처용랑 망해조사에 등장하는 처용가는 국문학 연구에서 단일 대상으로는 가장 많이 연구되는 주제이다. '처용'이라는 말의 정확한 연원도 아직까지 시비 거리이며 도대체 처용이란 인물이 실제 인물인지 설화 속의 가공인물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화랑, 호족의 자제, 무당이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아라비아인이라는 설도 있다.

처용이라는 말도 용의 얼굴이니 무당의 이름이니 하는 설만 분분할 뿐 정확한 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처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대상이고 수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연극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연출되는 주제이다. 너무 흥미롭고 신비한 인물, 한국적 관용의 전형이라는 처용. 그런데 처용이라는 인물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상징과 위치에 비해 그가 처음 인간세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처용암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소박하다.

울산 시내에서 장생포 방향으로 가다 보면 처용로가 나온다. 이 처용로를 따라 2km 정도 가면 처용암이라는 이정표가 나타나고, 이정표의 오른 쪽 샛길로 들어가면 작고 아담한 개운포가 나온다. 그리고 이 개운포의 수면 가운데에 6평가량 되는 섬이 하나 있는데, 이게 바로 처용암이다. 개운포(開雲浦)는 글자 그대로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설화는 아주 신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때는 신라 49대 헌강왕 5년이었다. 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개운포(남구 황성동)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짙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옆에 있던 일관이 동해 용왕의 조화이니 근경에 절을 세울 것을 권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바로 절을 세우라고 왕명을 내리자 운무가 걷히면서 개운포에서 동해 용왕이 일곱 자식을 거느리고 등장하였다. 용왕은 일곱 자식과 더불어 흥겨운 춤과 노래를 부르면서 왕의 덕을 칭송했고, 왕은 그 중 처용을 골라 경주로 데리고 갔다. 그러면서 높은 벼슬과 미모의 아내를 주어 나라의 정사를 같이 논했다는 것이다.

사실 처용설화는 그 자체만으로는 별 볼 일이 없다. 중요한 것은 처용이 역신 앞에서 추었다는 춤과 노래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다른 설화와는 달리 처용설화는 '처용무'라는 무형문화재에 의해 현실 세계에 뚜렷한 증거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처용가' 역시 '처용무'의 배경음악으로 근 천 년 간 전승되어 오면서 민족 문화의 보고로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처용무는 궁중정재(대궐 잔치에서 하는 춤과 노래)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된 춤이며 궁중 연례에서 처용 탈을 쓰고 추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1인이 추었으나 세종 때를 거치면서 확대되었고, 성종 때 완전한 무용으로 성립되었다고 한다. 위세당당하고 호방한 기풍의 처용무에는 역신 따위의 미물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대인의 품격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처용 탈에는 유덕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보이고, 그 우뚝 솟은 코와 검붉은 얼굴에는 잔잔한 여유가 넘친다.

깐수 정수일 박사는 '처용'이라는 인물이 서역인, 즉 아라비아인이라고 단정한다. 헌강왕 당시 개운포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드나들던 국제 무역항이었다는 것이다. 또한 전승되어 오는 처용탈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아랍인의 형상이며,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처용의 초상화는 서역인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수일 박사는 여타 신라 향가와는 다른 처용가의 형식에 천착한다.

보통의 신라 향가가 그 표현방법이 내면적이고 형상성이 강한데 비해 처용가는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대담하며 직설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중세 페르시아나 아랍문학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라고 한다. 필자 역시 이 견해에 동의한다. 처용은 분명 아랍인이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연원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처용은 여전히 신비한 인물이며 처용암은 높푸른 파도 속에서 천 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다시 천 년의 신비를 간직한 개운포와 처용암을 바라다본다. 가만 쳐다보다 재미있는 생각 하나가 회색빛 뇌세포 사이로 등장한다. 혹시 처용은 성불구자는 아니었을까? 알퐁스 도데의 '별'에 나오는 목동처럼. 상상은 자유다. 먼 미래에도 처용이라는 인물은 우리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소중한 오브제가 될 것이다.
시민기자 프로필 부산대학교 독문학과 졸업.
현재 인테리어업체 운영 중.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의 저자.
현재 각종 인터넷 언론 및 잡지, 사보 등에 글 기고.
     

김대갑 시민기자 kkim40@hanafos.com

입력: 2007.11.16 11:35 / 수정: 2007.11.16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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