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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일본문화 원류로서의 백제문화

일본문화 원류로서의 백제문화

 


Ⅰ 백제의 숨결

1. 일본이 숨쉬는 곳 - 백제

   부여에서 외국인이 묵어갈만한 숙소는 부여 유스호스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부여는 오래 전부터 일본인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곳이다. 부여 유스호스텔 계단과 복도에는 여기를 다녀간 수학여행단의 단체기념사진이 죽 걸려 있는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불편한 교통과 숙박시설을 마다 않고 부여를 찾아오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들 문화의 원료(源流)로서 백제문화라는 역사적 향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고대사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한국사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그것에 비교될 만큼 크고 막중하다. 지금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다른 견해를 갖고 있고 심지어는 민족적 대립감정과 결합하여 거의 허구적인 이론까지 제시되기도 하지만 일본인들이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결코 부인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백제문화인 것이다.

2. 일본 고대문명의 탄생

   우리나라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의 신석기시대인 죠몽시대(BC4세기이전)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청동기인들의 청동기문화전래로 야요이시대(BC4세기-AD4세기초)를 열게 하면서 마감되었다. 4세기 초에는 역시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일본 사회구조를 전면적으로 개편시켜 이른바 고분시대(4세기초-7세기 중엽)를 맞이하게 된다. 고분시대에는 지배층의 권위를 상징해 주는 전방후원(前方 後圓)의 큰 무덤이 조성되고, 신라, 가야토기와 같은 질을 지닌 수에키(須惠器)가 나타나 4세기 후반이 되면 야마도(大和)정권이 일본 국내를 통일해 간다.
   고분시대의 후반인 6세기 초부터 7세기 중엽까지는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해서 일본 역사의 무대는 규슈(九州)지방에서 긴기(近畿)지방으로 옮겨지며 쇼도쿠(聖德)태자 시절에는 체제와 면모를 갖춘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문명의 개화에 백제의 신세를 단단히 지게 된다. 일찌기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285년), 4세기 중엽 근초고왕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일본에 도기, 직조, 그림 등의 기술을 전래하였으며, 무령왕이 오경박사 단양이(段陽爾)와 고안무(高安戊)를 파견하고 성왕이 552년에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처음으로 불경과 금동석가여래상을 전래한 것은 일본 아스카문화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고대국가 문명의 탄생과 전개과정에서 백제를 비롯한 삼국이 끼친 영향은 단순히 외교적인 문화교류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부터 끊임없이 이주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들이 가져간 문화의 내용들이 일본 고대국가 문화창조의 힘이 되었으며 바로 그 이유로 아스카문화의 원류는 백제에서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3. 한민족의 일본이주

   한민족의 일본에로의 집단이주에 대하여는 일본의 세계적인 고고학자인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가 1959년 ‘기마민족 도래설’을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면서 학계에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에가미가 주장한 내용은 “일본의 고분시대는 전기인 4세기와 후기인 5-7세기로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데, 고분출토 유물에 마구와 갑옷 등 기마민족 유물들이 대량으로 출토되는 것에 주목하여 북방 기마민족의 정복왕조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일부 학자와 소설가들이 만들어 내는 가야왕조 일본정복설과 비류백제 이주설 등이다. 그러나 이것을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은 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온 도래인(渡來人), 일본말로 ‘도라이진’이 가져온 문화로 이해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대부분의 일본 역사, 문화사 책들은 다음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하고 있다.
   4세기 후반부터 시작되는 고구려의 남하(南下)는 동아시아 세계를 커다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었다. 조선반도 남부의 백제, 신라, 가야 등은 직접 고구려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또 철 지원을 가야에 의존했던 왜(倭) 또한 고구려와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강력한 고구려 기마군단과의 접촉은 기마전법이나 승마의 풍습을 일본인들이 배울 계기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5세기 이후 일본고분에 마구(馬具)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 전란이 계속되면서 일본으로 건너오는 도래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문화가 파도처럼 일어나게 되고 일본열도에는 왜인(倭人)들의 생활자체가 큰 변화를 이루게 되었다.
   확실히 5세기는 일본 고대에 있어서 문명개화의 시대이며 왜국이 문명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달한 때이며, 이 문명개화의 주역이야말로 ‘도래인’이었다.
   그 도래인 중에서 수에키(須惠器)라는 토기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가야인들이며, 불교미술문화를 일으켜 준 이는 백제인들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불교의 전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552년이지만 최초의 절인 아스카지(飛鳥寺)를 짓기 위하여 백제에서는 588년에 승려 6명과 조사공(造寺工), 와박사(瓦博士), 화사(畵師) 등 6명의 전문가들을 나라에 파견했다. 지금은 형편없이 퇴락한 절로 남아있는 아스카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유행하던 ‘1탑3금당’식이었고, 와당들은 백제의 것과 거의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처럼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아스카시대의 불교미술은 백제문화의 영향에 놓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스카시대의 초기 불상들은 보통 ‘도라이요시키(渡來樣式)’, 즉 해외양식이라는 뜻으로 결국 백제양식이라는 의미의 도래양식이다.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의 속칭 구다라 관음(百濟觀音)으로 불려지는 목조관음보살입상과 교토(京都)의 코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일본의 구국보 제1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코류지는 옛날 한반도에서 도래한 귀화인의 자손인 하다노 가와가츠(秦河勝)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일본서기’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호류지의 백제관음’, ‘코류지의 목조반가사유상’으로 대표되는 아스카 시대의 도래불상의 형식은 말할 것도 없이 백제양식을 띠고 있으며, 부여박물관을 찾아 온 일본인 관광객들은 여기에 진열된 작은 금동불상, 이를테면 규암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삼산관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을 보면서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하는 것이다.
   도래인에 의하여 개창된 아스카시대의 불교문화는 점차 일본사회에서 토착화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는 호류지의 금당에 모셔진 동조(銅造)석가삼존상에서 찾고 있다. 625년에 주조된 이 불상은 도래양식에서 훨씬 벗어난 일본화의 분위기를 띠고 있는데 이 불상을 제작한 불사(佛師)의 이름이 도리(止利)이므로 흔히 ‘도리양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도리불사는 도래인 제3세이며, 공주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비의 은팔찌 제작자 이름이 다리(多利)인 것과 연관되는 점이 있다.

5. 백제의 문화유적
 
   이와 아울러 일본인 관광객들이 부여와 공주를 답사하면서 느끼는 공통된 감상은 그 주변의 자연 풍광이 일본의 지형 중에서도 아스카, 나라지역과 아주 흡사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이 땅에서 건너간 ‘도래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그네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정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한다.
   부여의 백제문화 유적을 찾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볼때마다 내 머리에 스치는 두가지 의문은 아직껏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하나는 일본문화의 원류로서 백제문화를 확인한 일본인의 가슴속에 일어나는 감정은 어떤 것일까? 신기함, 고마움, 동질감, 아니면 냉랭한 역사의 확인, 또 하나는 아스카와 교토와 나라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의 선조인 그곳의 도래인들의 유적을 음미하며 더듬는 한국인은 과연 얼마나 되며, 거기서 무엇을 느낄까?
   이것은 그저 물음일 뿐이다.
 

II. 백제의 역사

1. 백제의 신화

   ‘三國遺事’권 제1紀異 제2에 의하면, 왕검조선(王儉朝鮮)은 상제(上帝)인 桓因의 서자인 桓雄이 지상(신단수아래 神市)에 내려와 3.7일을 굴에서 지낸 후 여자가 된 熊女와 결혼해서 난 檀君王儉이 阿斯達에서 나라를 엶으로써 생겨난다. 그 해가 堯帝 즉위후 50년 庚寅년(실제는 丁巳)으로 기원전 2333년(東國統監에 의해 唐高 戊辰年)에 해당한다. 그는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이라 일컫고 이어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겨 1천5백년을 다스리다가, 周成王(虎王)기묘년(紀元前 1122년)에 기자조선이 들어서매 藏唐京으로 옮기고 후일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1천9백8세였다 한다. 최근 그의 무덤(소위 단군릉)이 평양근교 江東군 大朴山기슭에서 발굴되었다고 북한의 고고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으나 무덤의 위치, 연대, 묘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에서 여러가지 모순점을 보인다.
   北夫餘의 경우 解慕漱가 하늘에서 다섯마리의 용을 타고 내려옴으로써 나라가 이루어진다. 그 해가 前漢 宣帝 神爵3년으로 기원전 59년에 해당한다. 그의 가계는 解扶婁(迦葉原으로 도읍을 옮겨 동부여라 함) - 金蛙(하늘이 점지한 개구리 같은 어린일, 해부루의 수양아들이며 태자임) - 帶素에게로 세습된다. 삼국유사 권1 동부여조에 의하면 이 나라는 王莽15년, 기원후 22년(고구려 3대 大武神王 5년)에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부여는 346년 燕王 모용왕에게 망하고, 실제 고구려에 투항하는 494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건국자인 東明王(朱蒙, 성은 高)의 개국설화에는 대개 세가지가 전한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그는 북부여의 건국자인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와 용왕의 딸인 河伯女(柳花) 사이에 알로서 태어났는데(卵生), 그 해가 漢 新爵4년, 기원전 58년이다. 그리고 그는 해모수의 아들인 해부루와는 異母兄弟가 된다. 그가 금와의 태자인 대소와 사이가 좋지 않아 卒本州(졸본부여, 忽本 骨城)로 가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다.

   . 시조부터 실존인물
     건국자는 주몽의 세째 아들인 온조(溫祚)(BC18-AD28년)이다. 그는 아버지인 주몽을 찾아 부여에서 내려온 유리왕자(고구려의 제2대왕)존재에 신분의 위협을 느껴 형인 불류와 함께 남하하여 하북 위례성(현 중랑천 근처이며 온조왕 14년, 기원전 5년에 옮긴 하남 위례성은 강동구에 위치한 몽촌토성으로 추정됨)에 도읍을 정하고,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인천)에 근거를 삼는다.
   이들 형제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아들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百濟本紀 별전(권23)에는 북부여의 둘째왕인 해부루의 서자인 優台의 아들로 나와 있다. 이는 그의 어머니인 西召奴가 처음 우태의 부인이었다가 나중 주몽에게 개가하기 때문이다.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는 천손(天孫)인 해모수, 용왕의 딸인 하백녀(유화)의 신화적인 요소와, 알에서 태어난 주몽의 탄생과 같은 난생설화가 없이 처음부터 주몽-서소노-우태라는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백제에는 부여나 고구려같은 건국신화나 시조신화가 없다.

   . 용의 의미
     백제는 신화나 설화의 자료가 사실상 희박하다. 특히 건국신화는 없다. 우리 신화의 원전격이라 할 수 있는 ‘三國遺事’의 경우 고구려, 신라, 가락의 건국 신화만을 다루었다. 그러면서 신라중심의 호국(護國), 인문신화(人文神話)에 치중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건국 신화 말고는 武王(?-641년)과 관련한 기록이 ‘삼국유사’에 나온다. 용이 등장하는 설화다. 그 어머니가 서울 남쪽 못가에다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못 속의 용과 관계한 이후에 낳은 아들이 武王이라는 것이다. 용을 모티브로 한 숱한 ‘삼국유사’ 기록 가운데 하나인 이 武王과 용에 대한 대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용은 대체로 호교(護敎)의 상징 내지는 호국(護國)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 武王은 호교와 호국 두 요소에 바로 연결된다. 전북 익산 금마에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했고 부소산성(扶蘇山城)과 마주하는 백마강(白馬江) 건너 울성산성(蔚城山城)근처에 호국사찰 왕흥사(王興寺)를 완공시켰다. 그는 금강 언덕의 바위에서 예불한 다음 배를 타고 건너가 법회에 친히 참석했다고 한다.
   그는 추풍령을 넘어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 신라를 위협했다.
   사비성(泗批城)으로 천도한 이후 가장 막강한 군주로 문화를 꽃피우는 가운데 영토를 관리하는 데도 주력했다. 이렇게 보면 위대하고 훌륭한 존재와 비교되는 용은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삼국유사’에 나오는 용과 무왕의 연관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비시대 백제의 고토인 夫餘 능산리 출토품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용은 왕권을 상징한 것으로 풀이된다.

2. 한성시대(漢城時代) BC18-AD475

   온조(溫祚)가 서기전 18년에 하남위례성에 작은 부족국가인 백제를 세웠다. 백제 초기의 지배계급은 북에서 남하(南下)한 유이민(流移民)의 집단이 한강 유역에 정착한 사람들이므로 고구려계임을 알 수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지는 한강 유역인 바 서울 풍납동 토성내(風納洞 土城內)는 소위 김해식(金海式)토기와 기와집을 짓고 살았던 유적층이 조사 확인되었다. 백제가 마한(馬韓)의 여러 부족국가를 통합하여 강성하게 되는 것은 고이왕(古爾王, 234-285)때부터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전부 정벌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대이다.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까지를 백제 영토로 하는 것은 369년경으로 보인다. 근초고왕 26년(371)겨울에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精兵)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들어가서 고국원왕(古國原王)을 전사케 한다.
   이로 인하여 백제는 경기, 충청, 전라도와 강원, 황해도의 일부까지 영토로 하고, 고구려로 하여금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시 국내성(國內城)으로 퇴진하게 한다.
   이러한 백제의 강성한 힘은 근초고왕대를 이은 근구수왕(近仇首王)대인 377년에 다시 고구려 평양성을 공침하고, 이어 중국대륙을 정벌하여 요서(遼西)와 북경지방을 쳐서 요서(遼西), 진평(晋平)의 두 군(郡)을 설치하고 녹산(鹿山) 지방까지 백제의 힘이 미쳤다 한다. (梁書, 宋書, 資治通監에 기록)
   이같이 백제가 강성해진 근초고왕대는 문화적인 치적도 컸던 것이니, 375년에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백제서기(百濟書記)(국사)를 편찬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외교적인 교류도 활발히 전개하였고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각별한 선린관계를 맺었던 것인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빠져 있지만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3. 웅진시대(熊津時代)475-538

   문주왕(文周王)이 475년에 즉위하면서 그해 10월에 熊津城(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 백제는 고구려의 예봉을 피하기 위하여 금강(錦江)이 북(北)을 막아 흐르는 천험의 요새인 웅진성(현 공산성)으로 옮겼으나 병권을 잡고 있던 해수(解仇)에게 477년에 문주왕은 죽임을 당하였다. 탐라가 최초로 백제와 통교한 것은 문주왕2년(476)의 일이다.
   뒤를 이어 즉위한 삼근왕(三斤王)은 겨우 13세의 나이로 부왕을 죽인 해수에게 모든 국권(國權)을 맡기었으나 左平眞南과 德率眞老의 군에 격살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웠다.
   동성왕(東城王)(478-501)이 즉위하면서 국력을 회복하기 시작하였으며, 신라 소지왕(炤知王)에게 혼인을 청하여 왕족 伊飡 比智의 딸을 보냈음으로 신라왕실과 통혼을 하고 동맹하여 고구려의 힘을 막았다.
   그러나 동성왕(東城王)은 22년(500)에 궁성내에 임루각(臨樓閣)을 짓고 원지(苑池)를 파고 진귀한 짐승을 기르는 등 사치한 생활을 즐기고 방탕하여졌다. 동성왕은 23년(501) 衛士佐平博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사냥 나갔다가 살해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왕이 무령왕(武寧王)(501-522)이다.
   무령왕은 佐平苩加가 있는 가림성(성흥산성)을 쳐서 苩加를 죽이고 여러 성을 다시 쌓았으며, 고구려군과 싸워 백제의 옛땅 일부를 되찾기도 하였다.
   특히 남조의 梁과 교류를 활발히 하여 양서에 ‘更爲强國’이라고까지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이때 왜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일본서기 繼體 7년(513)조에 보면 백제에서 오경박사(五經博士) 단양이(段陽爾)를 보냈고, 5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무(高安茂)를 보내면서 먼저 가 있는 단양이와 교대시켰다. 오경박사는 역(易), 시(時), 서(書), 예(禮), 춘추(春秋) 등에 통달한 박사를 말한 것이다. 의학(醫學), 역상(曆象), 복서(卜筮), 노반(鑪盤), 와(瓦)에도 박사(博士)호가 있었다.
   1971년, 무령왕릉(武寧王陵)이 발견되어 당시의 백제문화를 자명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출토된 매지권(買地卷)을 보면, 무령왕은 개로왕(蓋鹵王)8년(462)에 출생하여 백제가 웅진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 14세이며, 왕위에 즉위할 때 40세가 되고, 죽을 때가 62세였다. 백제의 가장 어려운 시대를 체험하면서 자랐으며 백제의 재기를 도모했던 왕이었다.
   무령왕대는 중국 남조(南朝)의 문화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져 백제에는 전축분(전축분)이 조성되고, 무령왕릉출토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중국문물의 유입이 많았다.
   이러한 국력의 뒷받침을 받아 즉위한 성왕(聖王)은 527년에 웅진에 대통사(大通寺)를 세우고 주위에도 많은 불사(佛寺)를 이룩하였다. 527년에 백제를 다녀간 양의 사신이 보고한 양서 백제조(梁書 百濟條)를 보면 중국의 군현과 같은 읍을 담노라 하는데, 22개처가 있고, 이 담노(擔魯)에는 왕의 자제와 종족이 모두 웅거한다 하였다.

   . 담로(擔魯)
     李丙燾박사는 이 담로를 백제어의 ‘다라’를 사음(寫音)한 것이며, 일본서기의 ‘구다라’와도 같은 뜻으로 대읍성(大邑城)이란 말이라고 함.

4. 사비시대(泗沘時代) 538-660

   백제가 웅진의 협소한 지역에서 넓게 트인 사비성(泗沘城)으로 왕도를 옮긴 것이 성왕 16년(538)의 일이다. 성왕은 사비성으로 왕도를 옮긴 2년 후인 541년에 梁에 사신을 보내어 시경 박사(詩經 博士)와 열반(涅槃) 등의 경의(經義) 및 공장 화사(工匠 畵師) 등을 초청해 왔는데, 당시 불교문화가 꽃피었던 남조(南朝)의 문화를 직수입하였다. 특히 공장(工匠)과 화사(畵師)는 새로 조영되는 사비(泗沘)의 왕도를 건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이 성왕대에는 백제승(百濟僧) 겸익(謙益)이 인도에까지 가서 범어(梵語)를 연구하고 오부율(五部律)의 범어 경(梵語 經)을 가지고 와서 번역하여 율부(律部)72권을 펴내고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가 되기도 하였다.
   성왕대는 백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루는 시대로서 일본 고대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서기 欽明6년 (545)조에 백제로부터 불교의 문물 및 그 사상이 전래하였다 하고 동 13년(522) 10월에는 백제 성왕이 西部 姬氏와 達率 怒唎斯致契 등을 일본에 보내면서 금동석가불(金銅釋迦佛) 1구와 경론(經論) 등을 보냈다 한다. 이는 일본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欽明 15年(554), 백제는 장군 三貴와 奈率物部烏, 德率東城子莫古를 보내면서 전에 가 있던 東城子言과 五經博士 柳貴 등을 교대시켰다. 또 승 담혜(曇惠) 등 9인을 일본에 보내어, 먼저 가 있는 승 도심(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당시 백제는 군사적 요청을 일본에 하면서 많은 문화적 혜택을 주고 있는데 일본은 당시 경이적인 백제문화를 수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성왕대의 군사적 측면을 보면 동왕(同王) 2년(524) 신라와 사신을 교환하고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으며, 529년에는 안장왕(安藏王)이 백제의 북변을 침략하자 백제는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싸웠으나 대패하여 2천여의 전사자를 내는 등 위급하였다. 이렇듯 고구려의 침략이 계속되자 백제는 신라에 구원병을 청하고 드디어 성왕 29년(551)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북진하여 백제는 한강 하류의 한성지역을 회복하고, 신라는 죽령(竹嶺)이북 철령(鐵嶺)이남의 한강 상류지역의 고구려 십군(十郡)의 땅을 얻었다. 그러나 성왕 31년(553) 신라는 돌변하여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성지역을 공취하여 신라의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라와의 적대관계가 형성되어 554년 성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옥천)을 공격하다가 성왕은 전사하고 좌평(佐平)4인과 29,600인이 참살되었다 하니 삼국사기의 표현이 과장된 듯하나 참혹한 패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관산성 싸움 이후 백제와 신라는 120년간 계속된 동맹관계가 깨어지고 백제가 망하는 그날까지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되었다.
   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위덕왕(威德王)은 554년 왕위에 오르자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의 진성(珍城)(경남단성)을 쳐서 남녀 39,000인과 말 8,000필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 이때 고구려의 남침도 계속되어 백제로서는 고립상태에 빠지게 되자 중국의 진(陳)이나 북제(北齊) 북주(北周) 및 수(隨)가 번번이 사신을 보내서 외교적 수단으로 난국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면서 문화적 교류도 활발히 하였다.
   위덕왕(威德王)때의 일본과의 관계를 보면, 557년 11월에 백제에 왔다 돌아가는 왜사(倭使)편에 경론(經論)과 율사(律師), 선사(禪師), 비구니(比丘尼), 조불공(造佛工), 조사공(造寺工), 주금사(呪禁師) 등 6인을 보냈으며(日本書紀 敏遠紀 6年11月條), 584년에는 왜사(倭師) 鹿深臣이 백제에서 미륵석상 1구와 불상 1구를 가져갔다(日本書紀 敏遠紀 13年 9月條). 588년에는 백제가 일본에 사신과 승 혜총(惠摠), 令斤, 惠寔 등을 보내면서 불사리(佛舍利)를 전하고, 또 승 惠宿, 惠衆 등과 사공(寺工), 노반박사(鐪盤博士), 와박사(瓦博士), 화공(畵工) 등을 보냈다.
   이 해에 일본에서는 善信尼와 禪藏尼, 惠善尼가 백제에 와서 유학을 하고 590년에 돌아가기도 했다. 595년에는 백제승 惠聰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고구려 승 慧慈와 더불어 일본 불교의 중추적 인물이 되었다(日本書紀 推古紀 3年條).
   이 당시 일본은 聖德太子 섭정초기로서 성덕태자는 고구려 승 慧慈에게 불교를 2년간 배웠으며, 백제인 博士覺哿에 유교를 배웠는데, 백제승 惠聽도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597년에는 위덕왕의 왕자 아좌(阿佐)가 일본에 와서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고 성덕태자의 상을 그렸다 한다(日本書紀 推古期 5年 4月條).
   武王代에는 군사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고구려와 신라와의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백제는 隨와 내통하여 고구려를 칠 약속을 하였으나 사실은 고구려와도 내통하여 양단책(兩端策)을 썼으며, 612년 수의 대군이 요하(遼河)를 건너 고구려 정벌에 임했을 때 백제는 호응하지 않았다. 수는 遼東을 출발할 때 30만 5천인이었는데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여 살아 돌아간 자가 2천 7백인이었던 것이다.
   백제는 또 수(隨)를 이은 당(唐)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무왕때 당에 보내는 예물로 명광개(明光鎧)(626년), 주갑 및 금갑(金甲)과 조부(雕斧)(639년)를 보내는 바 중국황제가 보고 탐낼 만큼 잘 만들어진 갑옷들이었다.
   백제의 갑옷과 무기 만드는 기술이 대단히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명광개(明光鎧)는 갑옷 위에 황칠(黃漆)을 발라서 사람의 눈이 부시게 만든 것이었다. 武王은 634년 백마강이 임한 곳에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고 배를 타고 드나들었는데, 이 절은 채식(彩飾)이 장려하였다. 이 해에 또 관성(官城)남쪽에 큰 원지(苑池)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여 물속에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한 섬을 만들고 못가에 버들을 심어 왕궁의 원유(苑囿)를 크게 가꾸기도 하였다.
   의자왕(義慈王)(641-660)은 초기에는 용감하고 결단성이 강한 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다음해인 642년 7월에는 왕이 친히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의 서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또 8월에는 장군 윤충(允忠)에게 1만군을 주어서 신라의 대야성을 쳤다. 이때 대야성(大耶城) 성주가 金春秋 武烈王의 사위인 품석(品釋)으로 처자 모두가 잡히어 죽었고 竹竹, 龍石 등이 전사했다.
   백제는 의자왕 3년(643)에 고구려와 和親을 맺어 오랜만의 원한을 풀고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이는 612년 무왕이 수(隨)의 고구려 침략을 거부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미리 내통하는 등 친고구려정책을 쓰기 시작한 결과이기도 했다. 의자왕5년(645),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신라 군사를 동원한다는 말을 듣고 백제는 그 틈을 타서 신라의 일곱성을 쳐서 빼앗았으며, 동왕 8년 3월에 장군 義直이 신라 서변의 腰車(尙州) 등 10성을 쳐 빼앗고, 동왕 9년 8월에 왕이 左將(身+殷)相에게 精兵 7천을 주어 신라의 일곱성을 쳐 빼앗았다. 651년 신라의 사신 金法敏(후에 文武王이 됨)이 唐 高宗에게 올린 글에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하여 신라의 大城과 重鎭이 모두 백제에 병합된 바 강토는 날로 줄어 들고 위력이 쇠하였다 하면서 백제에 詔書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애원하고 있다.
   백제는 신라를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지게 되자 의자왕은 656년 이후부터 궁인과 더불어 荒淫에 빠져 成忠 興首 같은 충신을 제거하고 간신의 무리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자 인심은 흉흉하고 나라의 기강이 날로 문란해져 갔다. 그리하여 의자왕 20년(660) 蘇定方이 거느린 13만 唐軍과 김유신(金庾信)이 거느린 5만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함에 계백(階伯)의 5천 결사대는 黃山(連山)에서 신라군을 막았으나 패하고 660년 7월 13일 사비성이 함락되었다. 이어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던 의자왕이 7월 18일 항복하니 백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당시 백제는 5部 37郡 2百城 76萬戶였다 한다. 당장(唐將)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을 위시하여 왕자, 大臣, 將士 88명과 백성 12,807명을 唐의 서울 長安으로 데리고 갔다.
   백제의 都城은 함락되었으나 수많은 백제의 지방성이 남아 있었던 것이기에 백제가 멸망한 후 각지에서 치열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왕족 福信과 僧 道(王+深)이 주류성(韓山)에 웅거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지수신(遲受信)과 사택상여는 任存城(大興山城)에 웅거하여 3萬餘衆을 모아 소정방의 군을 깨뜨리고 백제의 2백여城을 회복하였다.
   이들도 일본에 가 있는 왕자 豊을 맞아다가 왕을 삼고 사비성 웅진성을 포위하여 당군은 식량이 궁핍하게 되어 여러번 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나(羅), 당(唐) 연합군은 부흥군과 싸우기만 하면 패하기도 하였다. 풍왕은 고구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여 당군을 막기도 했으나 부흥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서 福信이 道(王+深)을 죽이고 풍왕이 또 복신을 죽였다.
   마침내 나당(羅唐)연합군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유성을 공합하니 부흥군은 663년에 항복하였다.

 

III. 백제문화의 특성

   고구려는 북방에 위치하여 광활한 대륙과 차가운 기후와 강력한 한족의 세력 속에서 끊임없이 투쟁하고 한족(漢族)의 선진문화를 접촉하여 수용하면서 억세고 활달한 문화를 창조하였다.
   백제는 한반도의 중부지역에서 북으로 강세한 고구려의 힘을 차갑게 받으면서 동의 신라와 협동하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반도 서남의 기름진 땅과 온화한 기후 속에서 남조문화(南朝文化)의 진취적 수용으로 조화적이고 낭만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신라는 반도의 동남에 위치하여 중국 선진문화와의 접촉을 억제당하면서 고구려, 백제의 문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토착적인 후진의 신라문화를 발전시켜 삼국문화의 융합을 이룩하였다. 백제는 반도의 서남 바다를 끼고 남중국의 문화적 심장부에 뛰어들어 외교적 수단을 발휘하여 진취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융화하는 입장에 있었다.
   삼국문화의 선후를 따진다면 고구려가 가장 선진에 있고, 다음이 백제요, 가장 후진적인 것이 신라라 하겠다.

1. 백제어

   백제는 고대 한반도의 중부지역인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리고 꽤 오랜 기간을 마한과 공존하다가 거의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했다.
   현재 서울 안의 어느 한 지역이었을 백제 시조 온조의 도읍지는 「위례홀」이었다. 여기서 강조되는 핵심은 지명어미 ‘ - 忽’이다. 이 ‘ - 홀’은 온조의 형인 비류가 건국한 현재의 인천, 즉 ‘미추홀(彌鄒忽)’의 ‘ - 홀’과 더불어 부여계어의 특징을 극명하게 나타내준다.
   백제어는 전기, 중기, 후기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도록 독특하게 형성, 발달하였다. 백제 전기어는 고이왕때(AD260년)까지의 언어를 가리킨다. 아직 부족국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언어 또한 이전상태가 지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기 백제어의 특징은 하나의 부족국가에 의하여 부여계어가 사용된 단일 언어사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중기어는 고이왕 28년(AD 261)부터 개로왕 20년(AD474)까지의 언어를 말한다. 이 시기는 이른바 부족국가의 체제가 중앙집권의 국가체제를 갖춘 연맹체로 변모한 만큼 언어사적인 면에서도 어떤 변화가 일어났음을 믿게 한다.
   이 시기는 또 오늘날과는 다른 수사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기본 수사 중에서 ‘밀(密=三)’, ‘우츠(于次=五)’, ‘나는(難隱=七)’, ‘덕(德=十)’ 등이 지명어 속에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 수사체계는 고대 일본어에 수축되어 ‘mi(三)’, ‘itsu(五)’, ‘nana(七)’, ‘towo(十)’등으로 쓰였음이 확인된다.
   백제 후기어는 고구려의 남침으로 북부지역을 포기하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문주왕 초년(AD 475)부터 멸망하던 해(AD660)까지의 언어를 말한다. 백제어사 7세기에서 이 시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시기는 삼국사기의 1백40여 지명을 비롯하여 인명, 관직명 등의 언어자료를 국내외의 고문헌에 남겨 두고 있어 백제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오늘날 확보한 백제어 단어의 대부분은 이 후기 백제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2. 사상과 종교

  1) 백제의 유교
   백제의 사상은 유교문화가 근간을 이루었다.
   백제가 한성시대부터 이미 한대(漢代)의 경학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까닭은 한의 군현이었던 낙랑(樂浪), 대방(帶方)과 가까이 인접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그래서 백제사상은 고조선 이후 전승되어 온 원시유교적본질과 한대의 경향을 기본으로 틀을 잡아나갔다. 이러한 경학사상을 국가사회의 문물제도에 접목시켰다. 우리는 여기서 유교가 도교나 불교보다 먼저 사상적으로 백제를 선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가 학문을 중시한 흔적은 주서‘周書’이역전에도 나온다. ‘풍속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즐기고 경서와 사서를 좋아했는데, 그중에 뛰어난 이는 한문을 읽어 글을 지었다’고 기술했다. 또 백제는 중국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와 강례박사(講禮博士)를 데려왔다는 기사도 보인다. 여기 나오는 박사들은 중국에서 초빙한 학자를 가리킨다. 그러나 백제에도 일찍이 박사가 있었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근초고왕때 국사를 편찬한 박사 고흥(高興)의 존재를 통해 분명히 파악된다.
   우리는 高興이라는 인물의 백제박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근초고왕 즉위 뒤에 중흥의 시대를 맞은 백제는 중국에서처럼 관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전문학자를 양성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분야를 연구한 어떤 학자는 근초고왕 26년(AD371)에 고구려를 크게 무찌른 백제가 한산으로 천도한 지 얼마 안되어 학교를 창설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다. 고구려가 세운 태학의 충격을 받아 동진(東晋)의 태학제도를 청사진으로 설립, 이 학교에서 경학을 전수받고 처음 박사로 임명된 케이스가 高興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없지만 일본 사서에는 또 다른 백제의 박사가 등장한다. 근초고왕 재위 연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일본에 간 박사 왕인(王仁)이 그 사람이다. 근초고왕의 왕명을 받들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온 아직기(阿直岐)의 추천으로 ‘論語’10권과 ‘千字文’1권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왕인은 일본왕의 태자 도도차랑자의 스승이 되었다. 또 경서에 통달한 그는 왕자 이외에 군신들에게도 경사(經史)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 王仁, 日왕자 교육
     일본의 사서 ‘古事記’는 왕인의 이름을 和邇로, ‘日本書紀’는 왕인(王仁)으로 적고 있다. 和邇나 王仁은 일본식 발음으로 다 같은 ‘와니(Wani)’라는 점을 고려하면 한자이름의 표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되어 있으나, ‘일본서기’는 아신왕 말년쯤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했다. 왕인이 일본에 유교를 전파한 스승임에는 틀림이 없다.

   . 실용교육도 병행
     이 사비시대는 유교주의교육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상류계층은 태학에서 정규교육을 받아 학문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주요관직에 등용되었다. 중국의 군현제(郡縣制)와 흡사한 담로(擔魯)의 지방장관은 모두 상류층 자제로 충원했다는 기록이 양서‘梁書’ 백제전에 나온다. 백제가 교육의 백년대계를 위해 4세기 후반에 창설한 태학교육이 6세기에 만개한 것으로 보면 옳다.
   오경박사나 전경박사(傳經博士)로 불리는 학관 말고도 전업박사(專業博士)가 나타나는 것도 이때다. 전업박사의 존재는 AD553년(성왕31년) ‘백제가 왜국의 요청에 따라 다음해에 醫, 易, 歷등의 박사를 일본에 보내주었다’는 ‘日本書紀’기록에서 드러나고 있다. 백제는 경학 위주의 관학 성격의 교육을 실용교육과 병행하는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따라서 6세기 후반 백제의 교육은 의학을 포함한 여러 전문분야로 확대된다. 이는 전통경학이 사회전반에 스며들어간지 오래여서 새로운 실용학문을 추구한 일종의 학술적 경향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이같은 백제의 선진교육은 일본의 고대학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다만 1세기 정도의 간격을 두고 백제교육제도가 뒤늦게 일본에서 복제되어 나타나고 있다.

  2) 백제의 불교
   백제에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원년(AD384)이다. 백제는 침류왕 원년 7월에 동진(東晋)에 사신을 보냈기 때문에 백제에 처음 불법을 전한 호승(胡僧) 마라난타는 귀국길에 오른 백제사신과 함께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서 오랫동안 불교관계기사가 나오지 않지만, 사비시대가 개막되면서 백제불교는 국제화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구법승들이 중국은 물론 서역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일본의 구법승들은 백제를 찾았던 것이다.
   삼국 가운데 최초로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나라는 백제다. 그 시기는 AD 552년이다. 고구려보다 32년 먼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 백제불교에 관한 기록은 일본쪽에 더 많이 남아 있다.

   . 사비시대의 불교
     백제는 한강 유역에 도읍하고 있던 4세기 후반에 이미 불교를 수용한다. 그러나 웅진시대를 지나 사비로 천도할 무렵까지의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성왕(聖王)이후의 기록이 약간 전할 뿐이다. 사비시대라 할지라도 불교에 관한 기록이 적고 유물과 유적 또한 흔치 않다. 그나마 단편적인 자료가 남아 이 시기 백제불교가 국제적 수준의 문화를 소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엿보게 한다. 백제 구법승의 발길은 중국은 물론이고 멀리 인도에까지 미쳤다. 사비성에는 인도의 배달다삼장(倍達多三藏)이 겸익(謙益)을 따라와서 율부(律部)번역에 참여했다. 선신니(善信尼)등 일본의 구법유학승이 와서 백제불교를 배웠다. 사신과 구법승의 중국 내왕을 통해서 부지런히 선진의 문화를 수용했고, 동시에 신라 및 일본 등지로 그들의 불교문화를 전파했다.
   겸익이 인도의 구법유학에서 돌아온 것은 성왕(聖王)4년(526년)이다. 왕은 그를 흥륜사(興輪寺)에 살게 하고 28명의 고승과 함께 역경에 종사토록 했다. 율부(律部)72권이 번역되자 담욱(曇旭)과 혜인(惠仁)이 律疏 36권을 저술한다. 겸익의 인도유학과 율부의 번역은 백제불교의 폭과 역량이 국제적인 것이었음을 일러준다. 백제불교는 계율을 중시했다. 율부의 번역과 주석이 그 대표적 사례다.

   . 겸익, 인도 불교유학
     미륵사(彌勒寺), 미륵불광사(彌勒佛光寺) 등의 사찰이 세워졌던 백제사회에는 彌勒信仰이 유행하고 있었다. AD634년에 낙성된 미륵사는 백제 미륵신앙의 중심 사원이다.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념을 구현하고자 했던 백제 왕실의 원찰이기도 했다.
   이 절의 창건연기설화에서 용화산(龍華山)아래의 못에서 彌勒三尊이 출현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미륵사는 彌勒下生信仰을 토대로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할 때 이 세상은 낙토로 변하고 나라는 깨끗이 잘 정돈되어 온갖 재난은 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평화로운 삶을 살것으로 믿었다. 미륵신앙은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동경과 희구라는 특징을 지닌다.
   백제의 승려들에게는 法師, 律師, 禪師, 呪師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불교의 여러 분야중에서 어느 하나를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승려가 있었던 것이다. 경전은 거의 대부분이 유통되었겠지만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으로 열반경(涅槃經), 법화경(法華經), 유마경(維摩經), 반야심경(般若心經) 등이 있다. 그리고 天台學이나 三輪學에 조예가 있는 고승도 있었다. 玄光은 위덕왕(威德王)때 진나라에서 南岳 慧思로부터 법화경을 배우고 法華三昧를 증득했다. 귀국 후에는 웅천에서 교화했다고 한다. 그는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쳤고 귀국 도중에는 용궁에 초청받아 설법했다는 설화가 전할만큼 유명했다. 惠現은 修德寺에서 법화경과 삼론을 강의했고 일본으로 건너간 觀勒도 삼론학에 밝았다. 義榮이 藥師本願經疏와 瑜伽論義林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전하는 것이 없다.

   . 일 아스카문화에의 기여
     백제에는 대통사(大通寺), 왕흥사(王興寺), 미륵사(彌勒寺) 등의 큰 절이 있었다. 최근의 발굴로 그 규모가 밝혀진 익산의 미륵사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큰 절이었다. 신라에서는 선덕여왕(善德女王)때에 황룡사(皇龍寺)에 9층탑을 건립하고자 하여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해간 일이 있다. 이는 백제의 건축 기술이 신라에 비해서 앞서 있었던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많은 백제의 고승, 기술자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아스카 문화를 일으키는데 기여했다.
   일본 고대국가의 정비에 정신적 이념을 제공한 것도 물론 백제다. 성왕 30년(522년)에는 일본에 본격적으로 불교를 전했다. 위덕왕(威德王)24년(577년)에는 경론(經論)과 율사(律師)와 禪師 등을 보냈다.
   AD588년에는 불사리(佛舍利)와 사문(沙門)과 화공 등이 건너갔는가 하면 AD595년에 도일한 혜총은 쇼토쿠태자(聖德太子)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가. AD602년에 일본으로 간 관륵은 최초의 승정이 되기도 했다.

   . 백제불교의 일본전파
     신도(神道)와 더불어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정신문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불교가 백제로부터 일본에 전해졌음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문헌상으로 확인된 일본으로의 불교 전파시기는 서기 538년이지만, 4세기 후반에 한반도에 불교가 수용된 것을 생각한다면, 더 일찍 전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 불교를 수용할 때에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진통을 겪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수입의 첨병 역할을 하였던 것은 이시부타이(石舞台)고분의 주인공인 백제계 호족 소가(蘇我)씨였다.
   당시에 배불파였던 모노노베(物部)씨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소가씨는 쇼토쿠(聖德)태자와 협력하여 일본 최초의 사원인 아스카지(飛鳥寺)를 건립하였다.
   아스카, 나라시대 일본의 사원은 백제인등 한반도 이주민들의 기술로 건립되었으며, 불상은 처음에는 한반도에서 직접 들여왔고 삼국계 이주 호족들과의 밀접한 연관속에 제작되었다. 스이코(推古)천황(재위기간 : 592-628년)시기 46개의 일본내 사원 중에는 삼국계 호족의 우지데라(氏寺 : 씨족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사원)가 상당수인데, 이는 한반도인들의 일본내 지위와 일본 불교 수용시의 그들의 역할을 능히 짐작케 한다.
   이후 8세기 덴뽀문화(天平文化)의 개막을 알리는 도다이지(東大寺)의 건립에도 한반도 이주민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결국, 일본 불교는 한반도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으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고려시대까지 지속되었다.

  3) 백제의 도교사상

   현재 부여에 남아있는 궁남지(宮南池)는 사비시대의 전성기였던 무왕(武王)35년(634년)3월에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만든 것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못언덕에는 사방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고 한다. 뒤에 못가에 망해루(望海樓)를 지어 궁중 연회장소로 이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백제에 도교(道敎)사상이 유행하고 있었음을 증언해준다. 고대 중국의 도가(道家)사상에서는 특히 불로장생설(不老長生說)이 유행하여 동해(우리의 서해)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선이 사는 세개의 산이 바로 방장산(方丈山)과 봉래산(蓬萊山), 그리고 영주산(瀛洲山)이다. 그러니까 궁남지에 만든 인공섬을 방장선산으로 칭하였다는 것은 도교사상의 영향임에 틀림없다. 사실 도교사상은 비교적 일찍부터 백제에 들어온 듯하다.
   도교사상은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를 즐긴 백제인의 기질에 잘 들어맞는 점이 있었다. 더우기 지배층이나 일반 국민을 가릴 것 없이 장기간의 전란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던 만큼 장생불사(長生不死)하면서 신선(神仙)이 될 수 있다는 도교의 가르침은 그 자체 유토피아 사상에 다름 아니었다. 사비시대에 불교와 더불어 도교가 크게 융성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의장(意匠)이나 제작 기법(技法)으로 볼 때 도교적 요소가 짙은 궁남지(宮南池)와 같은 정원문화를 창출하게 되고 또한 독자적인 조형(造型)미술을 꽃피우게 했다.

   . 조형미술 꽃피워
     오래 전에 부여군 규암리에서 발견된 이른바 山景무늬 벽돌만 해도 품자형(品字形)의 세 봉우리가 중첩하고 산 밑에는 압석이 돌기(突起), 산위에는 수목이 총립(叢立), 한가운데는 집 한 채, 오른쪽에는 도사(道士)로 짐작되는 한 사람이 새겨져 있다. 이는 분명히 삼신산(三神山)과 도관(道觀), 도사를 표현한 것으로 그 자체 유현(幽玄)한 도교적 세계관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지난해에 기적적으로 발견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來山香爐)는 사비시대 백제의 도교신앙을 웅변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 향로의 몸체를 덮고 있는 뚜껑부분은 삼산형(三山形)의 문양장식이 주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다시 다섯개의 산을 들리고 산꼭대기에 앉아 있거나 날아가는 새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바로 도교의 삼신산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4) 백제문화의 신비 - 금동향로

   백제의 금동향로는 공예기술의 우수성에서만이 아니고 백제인의 정신세계와 생활상을 밝혀줄 수 있는 자료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 용받침 향수해상징
     백제의 금동향로는 봉황(鳳凰)모습의 꼭지, 삼산형(三山形)의 봉래산(逢萊山)이 양각된 뚜껑, 연꽃잎으로 장식된 몸통, 용으로 이루어진 받침 등 네부분으로 이루어져 잇다. 이러한 구성 내용은 道敎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불교의 세계관이 그 조형적 배경이 되었음을 나타내 준다.
   그 구성내용을 아래 부분부터 살펴보면, 받침에 수중동물(水中動物)의 정수(精髓)로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의 몸통을 8개씩 3단 24개의 연꽃잎으로 장식했는데, 이것은 불교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조형화한 것이라고 본다. 蓮華藏世界는 진리 자체를 상징하는 비노사나불(毘蘆舍那佛)이 있는 공덕무량(功德無量), 광대장엄(廣大莊嚴)의 이상적 세계를 말하는데, 이 세계는 큰 연화로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 일체의 나라와 일체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연화장세계라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의 설명에 의하면 세계의 맨 밑에 풍륜(風輪)이 있고, 풍륜 위에 향수해(香水海)가 있으며 그 향수해 가운데서 큰 蓮華가 나서 蓮華藏世界라고 하는 이상적 세계가 그 속에 전개된다고 한다. 금동향로의 龍 받침은 香水海를 상징하고 연꽃잎의 몸통부분은 蓮華藏世界의 연꽃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연꽃에 전개되는 이상적인 세계는 향로 몸통 위의 뚜껑부분에서 조형화하는 것이다.
   한편 향로의 몸통부분에서 연꽃잎이 8개씩 3단으로 구성된 것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의 다심(多心)을 8엽(葉)의 심연화(心蓮華)로 蓮華藏世界의 3종류를 3단으로 각각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각 연꽃잎과 연꽃잎 사이에 각양각색의 동물의 부조상이 배치되어 있어 그 의미를 고대의 신화적 세계관으로 이해하거나 수중동물(水中動物)로 해석하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두가지의 가능성을 생각케 한다. 그 하나는 불교에서는 생물(生物)이 태어나는 형식을 사생(四生)이라 하여 태생(胎生), 란생(卵生), 혼생(混生), 화생(化生) 등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각종의 동물모습은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 아닌가 한다. 만일 그 해석이 타당하다면 몸통 위의 뚜껑부분에 등장하는 생물(生物)들의 탄생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다른 해석은 범망경(梵網經)에 의한 연화대장세계설(蓮華臺藏世界說)에 의한 것으로서 그 세계는 천엽(千葉)의 대연화(大蓮華)로 이루어져 그 연화대(蓮華臺)위에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앉아 있으며, 그 하나하나의 꽃잎이 각각 한 세계이고, 또 노사나불로부터 화현한 千의 석가가 그 千세계에 있고, 한 세계마다 백억 나라가 있고, 한 나라에 한 보살석가(菩薩釋迦)가 있어서 보리수 아래에 앉았다고 한다. 향로의 연꽃잎 속의 동물들도 각기 한 세계임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동물부조상의 내용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해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향로의 받침과 몸통 부분은 佛敎의 연화장세계관을 그 조형적 배경으로 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蓮華藏世界를 도상화(圖像化)하는 것은 화엄신앙(華嚴信仰)의 유행(流行)과 함께 불교권 각지에서 이루어져 왔다. 중앙아시아나 돈황벽화(敦煌壁畵)의 천체불(千體佛), 남아시아 자바섬의 보로브도루 사원의 화엄(華嚴)의 만다라적 구상, 중국의 용문봉선사대불(龍門奉先寺大佛), 일본의 동대사대불(東大寺大佛), 신라에서의 만불산(萬佛山)의 조성 등 불교세계는 바로 蓮華藏世界觀 그것이었다. 백제(百濟)불교에서는 문헌상으로 華嚴經을 받아들인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중국의 남조불교(南朝佛敎)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삼국 가운데 교학적으로 가장 선진이었으며, 그보다 후진이었던 신라에서도 7세기 초에 이미 화엄신앙(華嚴信仰)을 받아 들이고 있었고, 곧 뒤이어 원효(元曉)에 의해서 蓮華藏世界觀이 전개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아 7세기 초 백제에서의 蓮華藏世界의 조형화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 뚜껑 윗부분은 ‘天上’
     한편 금동향로의 몸통 위 뚜껑과 꼭지부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74개의 산봉우리와 봉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과 5인의 악사를 포함한 16인의 인물(人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뚜껑부분에는 이밖에도 수목(樹木)등의 부조상도 나타나고 있어 그대로 華嚴經의 불교세계, 곧 蓮華藏世界觀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노사나불(毘盧舍那佛)이 있는 부토세계(浮土世界)는 곧 우리 중생(衆生)이 사는 世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로의 뚜껑부분에서 나타내 주는 세계는 우리 중생(衆生)이 사는 이 세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삼산형(三山形)의 봉래산(蓬萊山)이나 도인(道人)들의 모습에서 道敎의 신선세계(神仙世界)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그래도 뚜껑의 아랫부분에서는 우리 중생세계의 생활모습을 비교적 가깝게 나타내주고 있으나 뚜껑 윗부분과 장식부분은 신선(神仙)의 세계, 더 나아가 천상(天上)세계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뚜껑 윗부분 5개의 산으로 구분된 그 이상은 5마리의 새와 5명의 천인악사(天人樂士), 그리고 비상하는 자세의 鳳凰 등의 모습인데 천상(天上)세계 바로 그것이며, 분향(焚香)하였을 때의 향연(香煙)으로 자욱하게 가려진 광경은 지상세계와 구분되는 道敎의 神仙世界의 모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귀족층 분위기 반영
     백제의 금동향로에서 표현하고자 한 주제는 불교의 蓮華藏世界와 도교의 神仙世界라고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보다 기본적인 주제는 蓮華藏世界다. 다시 말하면 향로 전체적인 구성의 골격은 蓮華藏世界를 조형적 배경으로 한 것이고, 그 蓮華藏世界의 구체적인 내용에 신선세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 남조(南朝)의 불교를 주로 받아들였는데, 그 남조불교(南朝佛敎)는 道敎思想을 받아들여 융합시킨 것이었다. 백제 후기의 귀족층에서는 그러한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문화분위기에 젖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654년에 작성된 砂宅智積碑文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은 당시 귀족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이 그러한 세계관을 글로 나타낸 것이라면 금동향로는 조형으로 표현했다는 차이뿐이었고, 그 주제는 전면 일치하는 것이었다.

   . 상징동물은 바로 백제인의 小宇宙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향에서 백제의 동물들이 한꺼번에 달려나왔다. 1300여년전 백제인들의 정신세계를 엿보게 하는 향로에는 봉황을 비롯하여 상상의 날짐승과 길짐승,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고 있다. 또 연꽃사이에는 두 신선과 수중생물인 듯한 26마리의 동물이 보인다. 특히 이 향로의 기마인물상들은 백제 미술품에서는 처음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 곰은 母神的 존재
     전체적인 구성원리는 음양의 체계를 이루어 아래로 수중동물의 대표격인 용을 등장시키고, 그 위로 연꽃과 수중의 생물, 지상계에는 산악과 짐승 및 신선, 천상계의 정상부는 원앙과 봉황을 배치하였는데, 봉황은 양(陽)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동물이다.
   백제 금동향로에 등장하는 다양한 동물 가운데 특히 백제와 관련이 많은 곰, 남방계 동물인 원숭이와 코끼리, 백제미술품에서 처음 나타나는 기마상, 신령스런 영매로서 영생과 재생의 상징인 사슴 등이 민속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곰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한민족(韓民族)의 모신적(母神的)존재로서 한국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곰은 단군신화와 민간설화에서 여성으로 등장한다. 환웅과 혼인한 웅녀의 몸에서 단군이 태어난 건국신화, 삼국유사에 신라 김대성이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고 곰의 징벌이 두려워 그 자리에 곰을 위해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고구려의 해모수는 유화를 웅신산(熊神山)기슭 압록으로 유인했다는 역사문헌기록, 여인으로 변한 곰이 나무꾼을 유혹해 동거한 금강(곰강)의 전설 등 곰은 우리 민족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곰 웅(熊)’자 붙은 지명이 ‘웅천(熊川), 웅촌(熊村), 웅진(熊津), 웅강(熊江), 웅산(熊山)’등으로 많다. 특히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와 금강이 곰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명으로 흥미를 끈다. 이 곰이 백제향로 정면에서 왼쪽에 꼬리를 치켜 세우고 걸어가다 도인을 향해 되돌아보고 있다.
 
   . 말은 신성한 동물
     선계(仙界)의 산에 나타난 원숭이, 코끼리, 연꽃 등은 불교문화를 수용한 세계관의 한 표현이다.
   옛 그림 속에서는 원숭이가 십장생과 함께 장수(長壽)의 상징으로, 자손번창(子孫繁昌)의 상징으로 스님을 보좌하는 역할로 묘사되고 있다.
   기마인물상은 갑옷과 투구로 중무장한 백제 무인이 두발을 곧추세운 기세의 말을 타고 힘차게 도약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45도 각도로 위로 치고 나가는 금동향로의 백제 기마무인상(騎馬武人像)에서는 천리를 달리는 진취적 기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말에 대해서 느끼는 관념은 변함없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 같다. 말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은 ‘신성한 동물’,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수렴되었다.
   사슴과 새 그리고 맹호가 평화롭게 뚜껑의 맨 아랫부분에 부조되어 있다. 사슴이 유유자적하며 선계의 산으로 오른다. 사슴 아래 나무가지에는 새가 앉아 노래하고 나무 아래로 맹호가 포효하고 있다. 백제인의 여유와 취미와 예술, 그리고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사슴의 출현은 좋은 일이 생길 징조로 보았다. 청학이 신선의 벗이자 짝이듯이 사슴도 신선의 벗이자 시종(侍從)이었다. 사슴은 호랑이와 더불어 신선의 탈것으로 생각되었다.
   금동향로의 1백개 부조상은 영원불멸의 하늘세계의 상징으로서 봉황과 북방 설원에서 썰매끄는 사슴, 상상의 동물인 공작, 하늘을 나는 天馬의 神聖함, 사람과 가장 가까운 영물로서 원숭이 등을 표현했다. 그래서 고대 백제인의 이상과 꿈, 영원의 세계를 표현한 소우주라 할 수 있다.

3. 백제의 토목기술

  1) 백제의 축성술
   백제는 처음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고, 이어서 하남위례성 혹은 漢城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기까지였다. 이후 熊津(오늘날 公州)과 泗沘(오늘날 夫餘)를 도읍으로 삼았다. 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益山 지역에 別都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 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랑군(樂浪郡)과 말갈(靺鞨)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군현(漢郡縣)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출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 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 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거승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러한 강안(江岸)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內外來築)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外築內托)이 확인되고 있다. 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日本書紀’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 뒤 많은 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 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水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또 서기 665년 8월에 달솔(達率)(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사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大野, 椽이라는 두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金田)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 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어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 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 日本書紀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이 고고이시(神龍石)란 것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 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성설(聖城說)과 한국식 산성설(山城說)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山城)임이 확인되었다. 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2) 백제의 성곽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風納洞)토성(土城)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Km에 이른다. 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 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목책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垓字)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 위례성의 주성(主城), 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 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廣州)이성산성(二聖山城)은 풍납동 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 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이다.
   아차산성(阿且山城)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광장동이 있다. 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公州)공산성(公山城)과 부여(夫餘)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및 나성(羅城)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 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증산성(甑山城)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聖興山城)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3) 사비성의 구조
 
   백제가 泗沘城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비성은 漢城(서울)과 熊津(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 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扶蘇山城과 平地城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羅城의 개념을 갖는다. 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泗沘城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 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백제가 협소한 熊津(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 16년) 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 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시 유리한 성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잇다.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扶蘇山城과 平地城으로서의 羅城으로 이루어졌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半月城이라고도 불렀다. 이밖에 사비성, 所夫里城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4. 백제의 병기

  1) 백제의 철기문화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에게 철제 40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일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신물(神物)로 여기는 가운데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 역시 백제가 일본에 준 단철(鍛鐵)의 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역시 근초고왕때 일이다.
   그리고 漢城시대(? - ?년) 백제 유적인 서울 성동구 구의동 고분출토 쇠도끼와 철촉을 분석한 결과 실제 高炭素鋼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백제는 漢城시대에 이미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 부소산성 출토의 마름쇠
     철기문화는 동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융성을 좌우한다. 정복국가에서 무기는 철기문화의 꽃이기도 하다.
   사비성(泗沘城)옛터인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얼핏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철기는 마름쇠(鐵蒺藜)라는 일종의 방어용 무기였다. 4개의 가시로 이뤄진 마름쇠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첨예한 가시 하나가 위쪽을 향해 세워지도록 고안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가시 하나에 구멍이 뚫려 여러개의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이 마름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막힌 방어용 무기다.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 성밖에 둘러놓으면 가시덩굴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벽 위에서 던지면 적을 살상하거나 쫓아버리는 무기 구실을 한다”(삼국사기). 마름쇠는 부소산성 출토품이 유일한 실물이다.

   . 공격용 무기
     활과 화살, 쇠뇌(弩)는 공격용 무기이자 원거리 무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 유물로 전남 나주 신촌리 9호고분 출토품이 있다.

   . 환두대도(環頭大刀)
     칼자루 뒤끝의 둥근 고리 안에 장식무늬가 있는 환두대도 중 나주 신촌리 9호고분에서 나온 삼엽문 환두대도는 특히 유명하다. 철지에 금판을 씌운 타원형 병두고리의 중심 장식이 금동삼엽형으로 되어 있다. 손잡이에는 고기비늘무늬를 돋친 은판으로 감았다. 또 칼자루 끝 고리에 타출문의 돋친 은판을 씌우고 고리 안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한 고리칼(단봉환두대도 : 單鳳環頭大刀) 역시 이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무령왕릉 출토품이 있다. 타원형 고리표면에다 용을 새기고 고리안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를 장식한 고리칼(금동장환두대도 : 金銅裝環頭大刀)이다.

   . 동물뼈제조 갑옷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백제인들은 쇠가 아닌 동물의 뼈를 갈아서도 갑옷을 만들었다. 몽촌토성출토품 뼈비늘갑옷 골제찰갑(骨製札甲)이 그것이다. 이렇듯 백제인들이 입었던 갑옷의 윤곽은 밝혀지고 있으나, 투구와 방패가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 갑옷(甲)과 투구(冑)는 일습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두가지를 붙여 갑주(甲冑)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는 갑옷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금갑을 비롯해 금휴개(金髹鎧),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들 갑옷은 신라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금동갑옷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5. 백제의 예술

  1) 백제의 기술인들

   신라의 기술은 본래 백제로부터 전수받은 것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신라의 호국사찰 황룡사(皇龍寺)9층탑을 제작한 것은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阿非知)였다. 신라는 삼국통일 직후 왕궁 옆에 못을 파서 안압지를 만들었는데, 그 의장(意匠)이나 기법(技法)은 모두 백제의 궁남지(宮南池)를 본뜬 것이었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武王35년(634)3월에 궁성 남쪽에 못을 박고 물을 20여리나 끌어들여 궁남지를 만들었는데 못언덕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인공섬을 만들었는데 方丈仙山에 비겼다고 한다. 뒤에 못가에 望海樓를 지어 국왕이 신하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연회를 즐겼다.
   日本측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실로 많은 백제 기술자들이 등장한다. 6세기 초 이래 백제로부터 일본조정에 유교경전이나 의학(醫學), 역학(易學), 역학(歷學)을 지도하기 위해 전문가들이 끊임없이 파견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뒤로는 사찰건물이나 불상, 기와, 향로를 제작하기 위해 노반박사(鑪盤博士), 와박사(瓦博士) 등이 파견되었다. 현재 알려져 있는 수많은 금동제 불상이나 武寧王陵에서 나온 각종 제품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은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
   서기 588년 일본왕실의 외척으로 권세가였던 소가(蘇我)씨가 법흥사(일명 飛鳥寺) 건립에 착수했을 때는 실로 많은 백제의 일급 기술자들이 초빙되어 갔다. 당시 일본에 건너간 노반박사 白昧淳은 덕장(德將)이란 관등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문헌기록을 통해서 확인되는 유일한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자이다. 한편 ‘元興寺 가람연기변류기자재장’에는 그를 ‘누盤士’ 白昧淳이라 표기하였는데, 이는 그가 다름아닌 누금세공(樓金細工)기술자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누금세공이란 금사(金糸)와 금립(金粒)에 금판(金板)을 붙이는 방법이다.

   .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明匠
     우리는 오랫동안 일본의 기록을 통해 백제의 기술과 공장(工匠)들의 모습을 가늠해 왔다. 그러나 최근 이루어진 고고학 발굴에서 그 생생한 백제 기술의 실상을 비로소 가늠하게 되었다. 그 대표적 케이스의 하나가 지난해 연말 부여 능산리 출토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라 할 수 있다. 세기적 보물이기도 한 능산리 금동향로의 출현은 백제의 기술과 우선 노반박사(노盤博士)의 존재를 떠올리게 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등과 같은 일본쪽 기록에 보이는 백제 최고 기술집단의 하나인 노반박사는 금속공예의 명장이고, 바로 능산리 금동향로를 제작한 기술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활동은 불교미술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불상이나 탑의 상륜부(上輪部) 등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일본 나라(奈良)의 이소노카미(石上)신궁에 비장된 백제전래품 七支刀는 백제의 금속공예술이 이미 상당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새김글씨를 금으로 상감한 4세기경의 칠지도는 금속의 정련과 주조기술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6-7세기경 사비(泗沘)시대 백제의 기술은 능산리 금동향로를 만들어 낼 만큼 더욱 발전되었다. 심미안적 세공에 의해 제작된 틀, 소재의 정선, 주조술, 가공, 도금술이 어울려 이룩한 걸작의 종합금속예술품이 능산리 금동향로인 것이다.
   그리고 瓦博士 역시 넓은 영역에 걸쳐 활동한 공장이다. 단순히 건축물의 지붕을 덮는 기와 뿐 아니라 테라코타불상, 토기 제작에 관여했을 것이다. 특히 삼국 가운데 기술적으로 가장 뛰어난 녹유(錄釉)계통의 토기를 만들어 낸 이들도 바로 와박사로 보여진다. 녹유토기는 후대 고려청자(高麗靑瓷)의 모태를 어느 정도 이루었고, 사비시대 백제의 대가람이었던 益山 彌勒寺 터에서 발견되고 있다.

  2) 백제의 건축

   1.고분(古墳)

     백제는 한성시대 초기에는 고구려의 기단식 적석총(基壇式 積石塚)을 만들었고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석실분(石室墳)이 사용되었다. 공주 지역의 고분은 배수로가 있는 전축분(塼築墳)과 석실분이 가장 대표적인 고분이며, 석실분은 백제 말기까지 계승되었다.
   여기서 백제 석실고분은 벽이 안으로 좁혀지고 천정(天井)이 궁륭형(穹窿形)으로 활처럼 굽어져서 위에 개석(蓋石)을 덮은 것이 많고 모두 현실 하나를 가지고 있는데 현실이 장방형(長方形)을 이루고 있다. 백제 고분은 전실(前室)의 아담한 현실(玄室)로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하고 중국 남조문화를 진취적으로 받아들여 백제인의 창의를 더하여 전축분(塼築墳)을 만들었다.

   . 방이동 백제고분군(芳荑洞 百濟古墳群)

     백제는 한강 하류지역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나 그 도읍지의 위치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방이동 고분군을 비롯하여 가락동, 석촌동 등지에 산재해 있는 고분은 이 근방에 백제의 도읍지가 위치하고 있었음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방이동 고분군에는 백제계의 왕이나 왕실에 가까운 상류층의 분묘로 추정되는 8기의 고분이 나지막한 야산에 산재해 있는데, 4기(제 1, 2, 3, 6호분)는 서쪽 언덕 경사면에, 4기(제 7, 8, 9, 10호분)는 동쪽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고분인 석촌동의 적석총(積石塚)과 토광묘(土壙墓), 옹관묘(甕棺墓) 등 봉토분은 낮은 대지에 자리잡고 있고, 방이동 고분과 같은 횡혈식 석실분(橫穴式 石室墳)은 구릉의 경사면에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대표적인 횡혈식 석실분인 제 1호분의 내부를 살펴보면 석실은 모양이 고르지 않은 포갠 돌을 쌓아서 축조하였는데, 현실의 4벽은 바닥에서 2-3단은 곧게 쌓고 그 위부터는 안쪽으로 기울어지게 쌓아서 천정부를 좁히고 큰 판석 1매를 덮어 궁륭형 천장(窮窿形 天障)을 이루게 하였다. 봉문 남쪽에서 석실안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가 있고, 현실 바닥 중앙에 마련된 시체를 안치하는 시상대는 포갠 돌을 2-3단 쌓아서 축조하였으며, 시상대를 제외한 전면에 작은 냇돌(河川石)이 깔려 있다.

   . 석촌동 백제초기적석총(石村洞 百濟初期積石塚)
     백제시대 초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이 적석총은 백제가 가장 왕성했던 4세기경의 문화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사적 제 243호로 지정된 것은 3호분과 4호분으로서 기원전후부터 나타나는 고구려 무덤형식인 기단식 적석총(基壇式 積石塚)이다. 특히, 4호분의 축조방식은 고구려의 적석총과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백제전기에 상호간에 문화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3호분의 규모는 옛 고구려 지역이었던 만주 통구에 있는 장군총보다 더 큰 것으로 고구려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한강유역에 백제를 세웠을 때의 절대권력자의 무덤으로 보인다.
   3호분과 같은 왕릉급 고분이 있는 반면 소형 토광묘와 같은 일반관리나 평민의 것으로 보이는 고분이 있어 서로 다른 시기의 무덤들이 중복된 경우도 많이 있어 석촌동 일대는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계급이나 신분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한 고분군 지역으로 볼 수 있다.

   . 고분 내부구조 다양
     백제시대의 고분역시 도읍지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그리고 지역과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사비시대 고분들은 다양한 묘제를 가지고 출현했다. 널무덤(土壙墓)을 비롯, 독무덤(甕棺墓), 화장무덤, 구덩식 돌널무덤(橫穴式石室墳)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백제후기 사비시대 도읍지였던 부여지역에서는 굴식돌방무덤이 특히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를 뚜렷이 입증하는 화장무덤과 더불어 여러 점의 뼈그릇(藏骨容器)도 남겨놓고 있다.
   사비시대의 굴식 돌방무덤은 언덕 위나 언덕비탈, 언덕 앞자락을 입지로 잡아 축조했다. 또 산기슭이 부채꼴로 펼쳐진 지세를 이용한 흔적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 능산리 굴식 돌방무덤의 내부구조는 신라, 가야의 고분보다 다양하다.
   백제 굴식 돌방무덤들은 몇가지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의 예가 주검을 안치한 널방(玄室)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 가운데 사방의 벽을 돌멩이와 막돌을 포개 안쪽으로 기울게 쌓은 형식이다. 이때에 천장은 큰 널돌(板石) 4-5장을 덮어 마감하고 널길은 남벽 동쪽으로 치우쳐 터놓았다. 이 형식의 대표적 고분유적으로 부여 능산리 할석총(割石塚)이 있다.
   능산리 벽화고분은 널방의 사방 벽면과 천정을 1장짜리 화강암, 편마암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거대한 판돌을 물갈음한 뒤에 세우고 나서 그림을 그렸다. 벽면에는 사신도(四神圖), 천정에는 비운(飛雲)과 연화도(蓮花圖)를 그려넣은 이 벽화고분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았다. 벽돌을 가지고 널받침도 만들었다. 한마디로 죽음의 세계를 화려하게 가꾸어준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부여 중정(中井)리에서는 부식된 암반 중심부에 지름과 깊이가 각각 30cm정도인 구덩을 파고 안에 뼈단지를 묻은 다음 돌로 덮은 뼈단지 무덤도 발견되었다. 부여 염창리에서도 비슷한 뼈단지가 출토되는 등 사비시대 도성 언저리의 여러 독무덤 존재는 흥미를 끄는 무덤유적이기도 하다.
   특히 제사유적설(祭祀遺蹟說)이 있는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奉萊山香爐)로 출토지점 바로 옆에 능산리 고분군이 있어 두 유적은 같은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2. 익산 미륵사와 왕릉추정의 쌍릉

   . 익산의 유적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 과정에는 대개 몇가지의 공통적 특징이 나타난다. 그 하나가 화려한 왕궁을 건설하는 일이다. 전제왕권이 강화되면서 필연적으로 일어난 문화현상인 것이다. 이어 거대한 사찰을 창건하게 되는데, 사찰은 국가가 관장하는 국립사찰형태로 창건했다. 불교는 사회문화발전에도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전제왕국의 호국이념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도성을 지척에 둔 자리에는 반드시 왕릉이 축조되었다. 삼국시대의 왕릉은 규모도 물론 컸거니와 묘제를 적용한 방법이나 껴묻거리(부장품)가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백제의 경우 공주 무령왕릉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이 증거하고 있다.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모든 조건을 다 갖추어 어렴풋이나마 왕도로 떠오르는 땅은 바로 오늘날 전북 益山군 金馬면과 王宮면일대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른바 백제익산천도설‘百濟益山遷都說’이 제기되었다. 익산을 왕도로 볼 수 있는 정황은 고고학적 발굴이나 현존하는 유적을 통해 여러군데서 발견된다.
   이 지역 금마면 기양리에는 우선 백제 최대의 가람규모를 자랑하는 그 유명한 彌勒寺터가 남아 있다. 5층석탑의 잔영을 겨우 전하고 있지만, 미륵사터에 대한 장기적인 고고학발굴에서 찬란한 백제불교문화상을 속속 파헤쳐냈다. 그리고 미륵에서 2Km떨어진 금마면 연동리에는 백제 불상광배가 갖는 독특한 특징을 보여주는 석불이 남아 이 지역에 융성했던 불교의 실상을 가늠케 해주고 있다.
   우리가 ‘백제 익산천도설’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益山지역을 들여다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많다. 이를테면 王宮면 王宮리 王宮坪도 그러한 지역의 하나다. 여기에는 왕궁이 있었다는 구전의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실제 백제의 문화유산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현재 5층석탑 1기가 남아 있고 그 이웃에서 제석사(帝釋寺)라는 새김글씨가 든 백제기와가 출토되었다. 제석사가 세워졌던 자리로 추정되는 절터에서는 목탑의 주춧돌이 발굴되기도 했다.

   . 석왕동 雙陵
     무왕(?-641년)은 사비시대 백제의 지위를 한껏 격상시킨 정복군주다. 불교문화를 꽃피우면서 신라를 위협,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는데도 크게 공헌했다. 특히 익산천도의 꿈을 키운 군주로도 유명하다. 무왕의 익산천도가 실현되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가 묻힌 지역도 익산지방이라는 설이 제기되어 왔다. 오늘날 행정구역상으로 전북 이리시 석황동에 있는 쌍릉(雙陵)을 무왕의 능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는 전설을 지닌 이 쌍릉은 북쪽의 것을 대왕묘, 남쪽의 것을 소왕묘로 부르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백제 말기인 7세기경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으로 밝혀졌다.

   . ‘官宮寺’ 기와 출토
     이 王宮리에서는 고고학발굴결과 사구석(四口石)유구와 함께 관궁사(官宮寺)라고 새긴 기와를 발견함으로써 익산천도설에 더 가까이 접근한 바도 있다. 어떻든 왕궁리유적은 백제의 왕궁이 자리한 가운데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이의 제석사(帝釋寺)가 창건되었으리라는 추론을 뒷받침한다. 이 왕궁리와 더불어 생각할 수 있는 유적은 미륵사다. 왕궁평에서 3Km에 불과한 미륵사는 도성 이웃의 대가람으로 창건되어 미륵하생(彌勒下生)의 이상향적 불국토를 염원하는 불심을 담았을 것이다.
   왕궁리를 중심축으로 한 반경 4-5Km안에는 백제시대의 여러 성곽이 있다. 미륵산성(彌勒山城)을 비롯 왕궁리토성(王宮里土城), 익산토성(益山土城) 등이 그것이다. 왕궁평을 왕궁이 세워졌던 자리로 본다면, 북쪽으로 국립사찰격의 미륵사와 주변 성곽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8.15 이전에 이미 익산일대의 유적배치상을 통해 중국 낙양(洛陽)의 수도경영 형식과 근사하다.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
   그뿐이 아니라 익산지역에는 백제왕릉으로 추정되는 쌍릉(雙陵)이 존재함으로써 고대국가 수도 경영형식과 꼭 맞아 떨어진다.
   이에따라 ‘백제 익산천도설’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다만 ‘三國史記’나 ‘三國遺事’와 같은 우리 사서에 기록이 나타나지 않아 이를 전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했다. 문헌사학과 현존유적 및 고고학 발굴성과 사이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익산천도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가 얼마전에 소개되었다. 중국문헌에서 백제천도 사실을 적은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 9세기경에 찬술된 이 자료는 ‘百濟武廣王 遷都 枳慕蜜地 新營精舍 以貞觀十三年...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백제무광왕 천도 지모밀지 신영정사 이정관십삼년...천대뢰우 수재제석정사)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우선 貞觀13年은 AD639년으로 백제 武王40년에 해당한다. 그리고 무광왕(武廣王)으로 표기한 왕은 무왕을 가리킨 것이 틀림없다.
   이 중국문헌에 나오는 지모밀지가 어딘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겨 새로 지은절이 帝釋精寺라고 기술함으로써 ‘帝釋寺’라는 새김글씨가 들어있는 익산 왕궁리 출토 명문기와의 절이름과 일치한다. 또 제석사가 벼락을 맞아 불에 탄 이후 목탑에서 꺼낸 유물들을 일일이 예로 든 대목도 눈길을 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왕궁리 5층석탑을 해체복원할 때 발견한 금판금강반야경(金板金剛般若經), 사리함, 사리병 등이 목탑속에서 꺼냈다는 불구 유물기록과 똑같기 때문이다.

   . 사비의 별도 추정도
     그렇다면 중국 문헌자료에 나오는 帝釋精寺와 오늘날 절터만이 남아 있는 帝釋寺는 같은 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 제석사 목탑에서 꺼냈다는 불구들과 왕궁리 5층석탑에서 나온 불구유물 역시 서로 상관관계를 갖는다. 이로 미루어 枳慕蜜地는 오늘날 익산 왕궁면 왕궁리일대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3. 백제의 석탑(石塔)

      백제는 600년경에 익산 미륵사에 목탑을 본떠서 석탑을 만들었다. 그리고 부여 정림사지에 오층 백제탑이 서 있다. 목탑을 석탑으로 본떠서 만드는 아이디어를 창출한 것은 백제인이다.
   고구려는 석탑을 남기지 아니하였다. 신라는 634년에 전탑(塼塔)을 모방하여 석탑을 만든 것이 분황사(芬皇寺)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백제인의 건축기술은 삼국 중에 가장 뛰어났던 것이니 탑을 석재로 영구하게 만들고자 시도할 만한 기술적 축적이 있었다. 적절한 층계의 체감비례와 옥개석과 탑신의 황금비례며 날씬하고 세련된 추녀선이며 두공(枓拱)의 간결한 표현 등 경쾌하고 기교 넘치는 조형미의 아름다움을 잘 발휘하였다.

   . 석탑
     사비시대에는 특히 불교미술 분야에 해당하는 여러 조형물이 축조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형물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 화강암이라는 돌을 채용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비시대 백제는 불교미술을 극치로 이끄는 가운데 걸작의 석탑과 석등을 후세에 남겼다. 그 대표적 유물이 전북 익산 미륵사터와 충남 부여 정림사터에 있는 석탑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武王 재위연간(AD600-640년)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미륵사에 남아있는 거대한 석탑의 잔영은 불가사의한 존재이거니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으로 기록된다. 조선시대 저술인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은 ‘有石塔高數丈 東方石塔之最’라고 적어 그 규모와 높이가 대단했음을 일러준다. 특히 화강암이라는 강한 재질의 석재를 목탑건립 형식에 꿰맞추었다는 사실은 백제인들의 건축기술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되는 시기에서 첫 작품을 9층이라는 높은 규모로 설계한 지혜가 놀랍다. 그 높은 건축물을 석재를 써서 재현한 백제인들의 기술이나 수학적 능력, 예술적 조형감각을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 조형감각 놀라워
     정림사 오층석탑은 미륵사터 석탑이 보여준 거대한 규모에서 우선 탈피하고 있다. 그래서 안정감을 안겨준다. 단아하면서도 정제된 아름다운 자태는 백제석탑의 양식적 완성을 이룬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마치 신라가 분황사(芬皇寺)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부터 의성 탑리 오층석탑과 감은사(感恩寺)터 오층석탑 및 고선사터 삼층석탑을 거쳐 불국사(佛國寺)삼층석탑에 이르러 석탑양식이 비로소 정착되는 것과 같은 양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나라 석탑양식을 보면 비교되는 측면을 지닌다. 시원적 형식의 미륵사터 석탑에 이어 정림사터 오층석탑에서 양식적 완성을 이룬 백제 석탑과 신라 석탑은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신라는 몇 단계의 실험을 거친 후에 가서야 석탑의 정형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백제는 신라보다 한수가 높은 문화창조 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황룡사(皇龍寺)9층목탑을 건립하는데 백제의 아비지(阿非知)가 초청되었다는 사실도 결국 백제의 우수한 조탑술(造塔術)을 입증하는 예라 하겠다.
   이같은 백제의 석탑은 국운이 다하면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만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미륵사터 석탑과 정림사터 석탑 양식에 근원을 둔 백제계 석탑이 백제의 옛 영토 전역에 건립된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고려의 백제문화 부흥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할 석탑양식의 계승은 불과 2기밖에 남지 않은 백제석탑이 우리 석탑발전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음을 단적으로 일러준다.

   . 동탑(東塔)복원
     백제문화의 불가사의는 석조 미술에서 발견된다. 전북 익산군 금마면 기양리 미륵사터에 남아있는 석탑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돌을 다듬고 맞추어 쌓기를 목수가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듯 하였으니, 당시 사람들의 사고로는 경이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미륵사 석탑은 백제 멸망의 비극처럼 허물어진 가운데 西塔 1기만이 잔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현재 6층의 일부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이 서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학술조사 결과 밝혀졌다. 서탑 옆에는 동탑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학술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동탑의 기단부와 함께 부재들을 찾아낸 문화재 관리국은 이를 근거로 지난 93년 초 본래의 자리에 동탑을 복원한 바 있다.
   동탑을 새로 복원하면서 미륵사 석탑에 대한 신비가 풀리기 시작했다.

   4. 능산리 사리감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 27대 ‘昌王’ 명문의 사리감은 서기 567년 丁亥年 昌王의 여동생인 공주가 만들어 사리와 함께 봉안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절터의 탑지 중앙에서 발굴된 사리감(舍利龕)은 가로 세로 각 50cm, 높이 74cm 크기의 화강석이며, 감실이 있는 앞면의 양쪽에는 공주 무령왕릉 지석과 비슷한 남북조시대의 서체로 20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 사리감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형태일 뿐 아니라 명문을 통해 백제시대 최초로 절의 건축연대가 밝혀진 점,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왕 이름이 확인된 점 등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의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사리감에 새겨진 명문은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丁亥妹公主供養舍利’(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동생인 공주 (口+元)가 사리를 공양한다)라는 내용이다. 전문가들은 (口+元)자가 兄이나 元, 수자의 古字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사리감이 발견된 땅속 1m 14cm깊이의 목탑 심초석 주변에서는 이밖에 흙으로 빚어 구운 불상과 불두(佛頭), 금동 및 은제고리, 금동 방울, 철제 못 등 5백95점이 함께 발굴됐다, ‘昌王’명문의 사리감이 발굴됨으로써 93년 발굴돼 백제미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 용봉향로도 6세기 후반으로 제작연대가 분명해졌다.
   사리감(舍利龕)이란 부처에 대한 공양 형태의 하나로 부처 진신 사리를 안에 담아 탑의 내부나 초석에 설치하는 형식을 일컫는 것. 이번에 발견된 사리감은 화강암으로만 돼 있을 뿐 아니라, 윗부분이 아치 모양을 하고 있어 형태면에서도 동아시아에서는 처음 보는 획기적인 유물이다. 이 사리감은 절터의 목탑지 중앙에 있는 심초석(동서 1백8cm 남북 1백33cm크기 장방형)의 남쪽 부분 지하 1백14cm깊이에서 비스듬히 놓인 채 발견됐으며, 이 감과 함께 발견된 신주는 도끼로 찍어 심하게 교란된 상태였다. 사리를 보관하는 감실(舍利孔)은 텅 빈 상태였다.
   사리감의 표면에 음각된 명문의 내용을 판독한 박물관 관계자들은 ‘昌王의 동생인 (口+元)공주가 절을 창건하고 비를 세우며, 부처의 은공을 기원하는 의미로 함을 만든 것 같다’며 ‘바로 인근에 있는 능산리 고분이 왕릉들인 것으로 미루어 이 절은 단순한 불교사원이 아니라 이 왕릉들의 본원사찰, 또는 陵寺일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명문에 나와있는 ‘昌王’은 백제 27대 威德王의 원이름이며, 재위 기간이 서기 554년에서 598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사학계에서는 그러나 그가 ‘비운의 왕’이었다고 설명한다. 그의 아버지 聖王은 백제의 수도를 웅진(현 공주)으로부터 사비(현 부여)로 옮기는 의욕적인 천도를 단행했지만 신라와 관산성(현 충북 옥천 부근)싸움에서 대패, 유해조차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번에 사리감이 발견된 능산리의 사찰은 창왕과 그의 동생 (口+元)공주가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을 것이란 추측도 그래서 가능하다.

   . 사리감 출토 의의
     ‘百濟 昌王’.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화강암 석제 사리감’은 ‘이름표를 달고 나온 백제왕 관련유물’로 세기적인 발굴이다. 지난 71년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각자석판(刻字石板)誌石(지석)과 함께 두번째로 발견된 ‘명패를 달은 귀중 문화재’이다. 무령왕릉의 발굴 때도 유네스코 등 세계 학계가 큰 관심을 보였다.
   백제 창왕, 그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우리 기록과 일본서기 등 해외역사에도 나오는 백제 27대 威德王(위덕왕. 재위 554-598년)이다. 위덕왕은 무령왕(501-523)의 손자요, 성왕(재위 523-554)의 아들이다.
   1천4백여년 만에 출토된 ‘王名 사리감’은 동아시아 최초의 화강암 사리감이라는 문화재적 가치는 물론 당시 백제의 중국-왜의 관계도 밝혀줄 의외의 성과도 기대된다.
   백제는 의문 투성이의 나라다. 나-당 연합군과 대결하다가 멸망한 백제는 오늘의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부흥전쟁을 전개한다. 이 부흥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당시의 倭다.
   화강암 銘文으로 다시 재생한 위덕왕은 이런 의문, 백제와 왜의 감추어진 관계를 밝혀줄 왕계의 인물이다. 그의 할아버지 무령왕은 이름이 斯摩(사마)로 출생지는 당시 倭九州의 한 섬으로 알려져 있다. 무령왕의 지석 역시 의문이다. 왕이 자신이 묻힐 묘지를 샀다는 내용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위덕왕의 아버지 聖王은 웅진에서 538년 사비성(부여)으로 천도하고 나라이름도 남부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이번에 발굴한 사리감에 나온 왕자 昌과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했고 그래서 창이 왕위를 계승한다.
   위덕왕 昌의 활동은 우리 기록보다도 일본서기에 보다 자세히 나온다. ‘昌의 부왕(성왕)을 위해 출가 修道하려 했다(欽明紀 16年)’든가 ‘성왕전사 후 3년 뒤 즉위(欽明紀18年)했다’고 성왕 사후 관계를 연도까지 밝힌 것, ‘위덕왕의 동생인 여혜가 성왕의 죽음을 통고하려 왜에 갔고 蘇我를 만나 神宮을 수리, 建邦之神(건방지신=건국신)을 잘 봉제(奉祭)할 것을 권유받고 귀국했다(欽明紀)’는 기록까지 있다. 44년 동안 재위했던 백제 왕 昌은 당시 출중한 국제적 인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는 중국인 남-북조와도 외교관계를 폈고 북제로부터 百濟王(570년), 東淸州刺史(571년)로 책봉된 외교기록을 남기고 있다.
   倭를 일본으로 발전시키는 聖德太子의 스승인 阿佐太子는 바로 창왕의 아들로 597년 倭로 간다(推古紀5年).
   백제 창왕의 명문유물은 이같이 국내의 문화재발굴 차원을 넘어 백제의 對남북조, 對倭관계를 다시 바르게 읽게 하는 국제적 발굴이라고 할 수 있다.

   5. 사찰(寺刹)

     백제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는 탑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불전이 배치된 양식으로 탑은 방형으로 되었다. 군수리 사지의 창건을 백제의 사비천도(泗沘遷都)로 보면 538년경에 해당된다.
   선덕여왕이 645년 신라 삼보의 하나인 황룡사(皇龍寺)의 225척의 구층목탑을 건립할 때 신라의 기술로는 이 탑을 건립할 수가 없어서 백제의 공장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건립하였다.
   백제는 사비(泗沘)시대에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에서 보듯이 중문, 탑, 금당, 강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회랑으로 둘러쌓은 사찰배치를 확립하였다.
   여기서 보면, 백제는 고구려의 팔각탑(八角塔)을 방형탑(方形塔)으로 변형시키고 신라사찰 건립의 선구자적 입장에 섰다.
   이때 백제의 건축 기술은 실로 넘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니 반도를 넘어 일본 飛鳥시대 사찰(538-645)건립에 많은 기술자가 파견되어 일본 비조사(飛鳥寺)나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였던 것이다.

   6. 궁원(宮苑)

     백제는 삼국 중에 가장 조원(造苑)의 기술이 뛰어났다.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辰斯王)때 궁실을 장엄하게 중수하고 궁내에 원지(苑池)를 파고 가산(假山)을 조성하여 기이한 새와 진귀한 꽃들을 길렀고, 개로왕(盖鹵王)때(475) 궁을 장려하게 짓고 누각사대(樓閣榭臺 : 정원 속에 세운 정자)등을 지었으며, 웅진(熊津)시대 동성왕은 궁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건립(500)하고 원지를 파고 기이한 새를 길렀다.
   백제 무왕은 35년(634)에 泗沘城 남쪽에 원지를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못 속에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조성하고 못가에는 버들숲을 만들었다.
   무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왕흥사도 화려하게 조성하고 泗沘城의 북쪽 북포(北浦)도 괴석을 치석(置石)하고 꽃을 심어 그림같이 만들었다. 이를 보면 백제는 모든 도성에 큰 원림과 원지가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서기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612)의 기록에 백제인 노자공(路子工)이 황궁 남정에 정원을 만들고 다리를 놓고 수미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는 일본 정원문화의 시조가 되었다. 이 수미산은 발굴되어서 동경 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부여 동남리 사지에서 보듯이 금당 앞에 수조(水槽)를 만들여 연화를 심기도 했으며, 대통사지(大通寺址)석조나 부여 궁지에서 옮겨 온 부여 석조등은 정원의 뜰에 놓고 연꽃을 심었던 원기(苑器)들이다. 이것이 통일신라에 전하여져서 많은 석연지(石蓮池)가 만들어졌다.
   이상과 같이 백제문화는 재주가 뛰어나고 명석하였으며 진취적으로 외래 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여 잘 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직선보다는 곡선의 아름다움을 터득하여 자유로운 구상으로 낭만적이고 조화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하여 넘치는 문화의 힘이 해외로 뻗쳐 일본 飛鳥文化의 선사국이 되기도 하였다.

  3) 백제의 조각

   1. 불상(佛像)

     고구려는 북조의 영향을 받고 백제는 남조의 영향을 받아 불상이 조성되었다. 고구려의 불상이 날카롭고 강건한 감각을 주는데 백제 불상은 온화하고 인간적 감각을 준다. 특히 백제 불상의 자비로운 미소는 특출한 것이었다.
   국보 제83호로 지정된 금동미륵반가상의 가냘프고 생동하는 감각적 표현과 고요한 명상의 자비로운 미소는 백제인이 아니고서는 만들 수가 없는 불상이다. 일본 법륭사(法隆寺)의 백제 관음과 광륭사(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木造半跏思惟像) 및 중궁사(中宮寺)의 반가사유상은 백제인의 손으로 조성된 불상들이다.
   백제는 서산 마애불, 태안 마애불(磨崖佛) 같은 자연의 바위 벼랑에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고구려는 아직 마애불을 조각한 것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백제인의 자연주의적 사고가 자연의 암벽에 마애불을 조성하게 한 것이며 이것이 신라의 저 많은 마애불을 조성케 한 선구자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시대 석조미륵반가상을 많이 조성하였으나 모두 상체가 없어 그 표정을 알 길이 없으며, 또한 신라 미륵신앙의 발원지가 백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의 미륵선화(彌勒仙花)미시랑(未尸郞)진자사조(眞慈師條)의 백제 공주 수원사(百濟 公州 水原寺)의 기록이 이를 짐작케 한다.
   신라는 고구려보다 백제의 불상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百濟는 비록 영토는 크지 않았지만 일찍이 그 문물은 동아시아에서 작으면서 빛을 발하는 금강석 같은 존재였다.
   백제는 고구려와 거의 같은 시기의 서기 384년에 불교를 중국의 東晋으로부터 전해 받았으나 佛像이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150여년이 지난 6세기초부터였다. 漢城時代(4세기초-475년)나 熊津時代(475-538년)에도 불교사찰들이 건립되었으나 아직까지 이 두 도읍지에서 백제불상이 발견된 예는 없다. 그런데 熊津時代에는 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梁의 年號를 따라서 大通寺가 건립되는 등 유적에서 웅진시대의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또 최근 발굴된 武寧王陵에서는 묘실내부 전체를 連華紋搏으로 장식하고 왕과 왕비의 頭枕과 足枕에 連華化生을 표현하는 등 極樂往生의 염원을 강렬하게 나타내고 있다.
   아마도 이 金銅思惟像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상가운데 가장 위대한 걸작이라 할만하며 더 나아가 동양의 그 당시 고대불상에서 이에 견줄만한 것이 없다. 소년의 앳된 얼굴엔 잔잔한 자비의 미소가 흐르고 검지와 중지(中指)를 살짝 뺨에 댄 오른손가락과 왼쪽 무릎에 올린 오른 다리의 발목에 내린 왼손가락은 마디 마디가 생동감에 차있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대좌에 늘어뜨려진 보살의 옷자락은 자유분방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가 미풍에 약간 휘날리듯 표현되어 있어서 역시 생동감을 주고 있다. 이 사유상은 이와같이 전체적으로 풍부한 양감으로 생동력을 살리고 있어서 하나의 예술품으로 영원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흔히 이 思惟像은 일본의 京都
廣隆寺木造思惟像과 비교되고 있다.
   두 불상은 비슷한 점들이 많아 廣隆寺像이 백제에서 건너간 것이라 하나 다른 점들도 많아 일본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어서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한편 7세기에는 花崗巖이란 새로운 재료를 써서 불상을 조각하였다. 화강암 역시 그 당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각재료로서 채택하지 않던 소재인 것이다. 화강암은 硬度가 강하고 입자가 굳어서 표면처리를 매끄럽게 처리하기 어려우므로 조각하기에 부적당하였다. 그러나 백제인들은 우리나라에 많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石塔을 건립하고 大形佛像을 조성하였으니 이 역시 우리나라에서 백제가 처음으로 착상한 것이다. 불상의 경우 전북 정읍 천리 石造如來立像이 圖刻像으로 조각되었을 뿐 대체로 암벽에 불상을 새긴 磨崖佛이 조성되었다. 말하자면 처음에 蠟石을 재료로 썼으나 부서지기 쉬운 석질이므로 화강암이란 재료를 선호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 반가사유상
     불교가 삼국의 대중적 신앙으로 발돋움한 7세기에는 중국의 유행과 관련이 없는 독자적인 불상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불상이 있다면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다.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는 거의 소멸해버린 서기 600년을 전후해 삼국 모두에서 가장 중요한 불상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반가사유상은 깊은 사색에 빠져있는 싯다르타태자의 모습이다.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통찰의 자세를 조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싯다르타태자는 이같은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됐다. 그러나 사유상은 인간을 구원하는 절대자는 아직 아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예배의 대상이었다. 한국인은 ‘깊은 사색을 통한 깨달음의 성취’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절대자가 되기 이전 사색의 단계까지를 서슴지 않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시대 사유상에 대한 숭앙은 세계 미술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조각품들을 남겼다. 바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78호 ‘금동일월식반가사유상’과 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국보 83호 ‘金銅蓮華冠半跏思惟像’이다.

  4) 공예(工藝)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출토의 금관관식(金冠冠飾)과 신라의 금관을 비교하여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관관식은 초화문관식(草花紋冠飾)인데 자유로운 구도 위에 비대칭적인 절묘한 공간구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금관은 같은 기본형으로 녹각형(鹿角形)과 수지형(樹枝形)의 입식이 기하학적으로 대칭되며 단순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는 조익형(鳥翼形)관식이나 금제관모 등에서도 그러하다. 목걸이나 팔찌도 실은 자세히 보면 단순한 대칭이나 기본형을 고수하고 있는데, 무령왕릉 출토의 목걸이나 팔찌는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자유로운 구상에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창조적 태도가 왕비의 팔찌에 작가의 이름을 새길만큼 확립된 것이었다.

   1. 도기 제조술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년대에 접어들어 발견되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登窯)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화도(高火度)를 효율적으로 유지, 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 등요로 밝혀졌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平窯)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정 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陶邑) 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 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 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 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 시대의 가마다. 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 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 백제인의 陶器文化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綠釉器)다. 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器臺)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 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선진적이었다.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 녹갈색의 산화납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 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것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 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登窯)가 그 시기의 가마다.

   2. 백제의 기와

     사비시대 백제의 도기와 도제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와류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최근 발굴조사한 부여 정암리 기와가마터(瓦窯地)가 기와류를 만들어 낸 대표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 남쪽 백마강 언덕의 석비레층을 파고들어가 터널식으로 구축한 굴가마들이다. 길이 4.5-6.5m크기의 평요(平窯)2기와 등요(登窯)2기 이외에 작업장까지 발견되었다.
   이들 가마군에서는 주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망새편, 암수키와 등의 기와류가 주로 나왔다. 그리고 상자형 전돌과 자배기, 벼루 등도 출토되어 도와전류(陶瓦塼類)는 물론 도기류(陶器類)까지 생산한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대할 수 있는 도제유물(陶製遺物)의 얼마쯤은 정암리 가마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비시대가 백제문화의 황금기라면 도기나 도제품의 수요가 왕성했을 것이다. 이는 백제의 도기제조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흔히 호자(虎子)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도기인 소변기로부터 뼈항아리 골호(骨壺)에 이르기까지, 또 일상용기와 종교적 성물(聖物)인 불상(佛像)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궁궐과 사찰 건축에 따른 거대한 망새(鴟尾)나 기와류, 산경산수문전(山景山水紋塼)처럼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 때로는 도기와 도제품은 껴묻거리(副葬品)로 수요되기도 했다.

   . 기와무늬
     백제의 기와 무늬는 숫막새의 공간 속에 가득찬 만발한 꽃송이로 알맞게 살이 쪄서 꽃잎 끝이 버선 코처럼 살짝 들고 있어 입체감과 아울러 온화하고 조화적인 조형미를 주었다. 모두 굴곡의 곡선미를 최고로 발휘하여 색깔도 회백색의 부드럽고 우아한 질감이다. 이러한 백제 연꽃의 아름다움은 미륵사지 석등의 대석이나 여러 불상의 연화좌(蓮花座) 및 광배(光背) 등에서도 같은 감각으로 조형되었다.
   신라는 형편에 따라 때로는 고구려식 와당(瓦當)을 제작하고 때로는 백제식 와당을 제작하여 썼던 것이니 신라적 개성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백제와당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신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개성을 융합시킨 와당을 삼국말기에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영향이 우세한 것이었다.
   신라의 황용사지 출토전을 보면 통일신라 이전 것은 무문전(無紋塼)이다.
   백제는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산경문(山景紋), 봉황문(鳳凰紋), 연화문(蓮花紋), 귀면문(鬼面紋), 반용문(蟠龍紋), 와운문(渦雲紋) 등의 문양전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힘과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서로 어울려 과히 신공(神工)의 재주를 다하였다.
   우리는 백제 산수화의 높은 경지를 이 산경문전에서 볼 수 있으며 백제인의 해학적 여유를 귀면문에서 볼 수 있다. 비운문(飛雲紋)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구름의 요동이며 그 한정된 원의 공간 속에서 무한히 창공을 나르는 것 같은 생동하는 봉황문의 구도는 백제인의 높은 회화적 구상을 엿보게 한다. 신라는 통일신라 이후에 문양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보상화문이 기본형이며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이어서 백제의 저 자유로운 구상을 따르지 못하였다.

   . 瓦塼士 존재한듯
     백제 도기항아리는 어깨가 넓어 광견호(廣肩壺)라는 이름의 항아리, 발이 셋 달린 삼발이 항아리,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여러 기형이 있다. 목이 긴 병을 비롯해 자라병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모양의 도기, 동잔, 잔, 삼발이잔, 주전자, 동물모양의 그릇 등 백제도기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납작한 원형판에 마치 동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다리가 다닥다닥 이어진 사비시대의 도제품 벼루는 뒷날 통일신라와 일본에 전파된다.
   이들 명품은 고대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기술집단의 하나인 와박사(瓦博士)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백제의 기술집단은 사비시대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많은 문물을 창출함으로써 백제는 동아시아의 문화대국(文化大國)으로 우뚝 세웠다. 특히 당시 도기 제조술이 이룩해 낸 백제 최초의 녹유기(綠釉器)가 나온 능산(能山)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3. 무령왕릉 발굴

     지난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동방의 투탕카멘왕 무덤이랄 수 있는 유적이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뛰어난 금속제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왕의 위엄을 보이는 금동용봉손잡이 큰칼, 왕권의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사람과 동물이 조각된 사신경(청동거울), 3가지 금속으로 구성 제작된 동탁은잔이 있다.

   . 과학적 이론 바탕
     동탁은잔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받침은 구리 할금이며,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고 손잡이는 연봉모양이지만 꽃받침은 금이다. 그리고 표면은 받침에서 뚜껑까지 역동하는 용과 겹겹이 핀 연꽃, 봉래산과 그 위를 나는 봉황새등 무늬들을 새겼다. 향로와 미술적 모티브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백제의 높은 금속기술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 ‘아연 - 청동기’ 특징
     청동기는 대체로 쌍합법으로 주조가 가능하나 팔주령같이 구조가 복잡하거나 기하학적 무늬를 현미경적 작업으로 새긴 다뉴세문경은 소위 실납법이라는 주물기술로만 가능하다. 특히 제조기법이 신비의 수수께끼로 알려진 이 세문경은 지금도 많은 전문과학자들이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다.

  5) 회화

   백제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공주 송산리 전축분(塼築墳)과 부여 능산리 석실분 속의 사신도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머리베개면에 그려진 비천서조(飛天瑞鳥), 연화(蓮花), 인동(忍冬), 어룡(魚龍)의 그림이다.
   이들 그림은 내달리는 힘이나 생동하는 패기는 없으나 역시 온화하고 단아한 감을 준다. 고구려 우현리 대묘 속의 사신도(四神圖)는 너무 힘차서 고분의 문만 열면 튀어나올 기상인데 백제것은 고분 속에서만 율동하는 사신도로 그렸다. 또 일본 법륭사의 벽화와 옥충주자(玉虫廚子)의 칠화(漆畵)를 백제인이 그렸다 전하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초상을 그려 주었으며, 백제의 화가 백가(百加)와 하성(河成) 등이 일본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1. 격조 높은 백제 회화

   . 능산리 고분
     능산리 고분의 그림을 먼저 살펴보면 한마디로 격조 높은 백제적 회화다. 캔버스로 보아도 무리가 없는 이 고분의 벽면은 물갈음한 화강암(천정과 서벽)과 편마암(동벽과 북벽)으로 되어있다. 물론 거대한 널돌(板石)인데, 벽면에 직접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그리고 천정에는 연화문(蓮花紋)과 비운문(飛雲紋)을 형상화했다.
   동벽 중앙의 청룡(靑龍)은 살아서 꿈틀대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S자형으로 용트림을 한 몸통과 딱벌린 입에서는 혀가 길게 나와 사뭇 역동적이다. 그리고 한껏 벌린 다리가 위로 치켜든 꼬리와 함께 생동감을 안겨준다.
   서벽에 그린 백호(白虎)는 머리를 위로 쳐든 채 꼬리는 한껏 굽혀서 역시 위로 뻗치고 있다. 눈에다 가는 붉은 칠을 해서 튕겨 나올듯 부릅떴다. 그리고 입 언저리로 길게 내민 혀, 가슴에 돋친 비운문이 어울려 백호의 위엄은 대단하다. 널방에 침범할 수도 있는 사기(邪氣)를 얼씬도 못하게 미리 쫓아버리려는 형상이다. 그러나 널방에 스며든 습기로 인해 백호의 몸통 아래쪽이 빛 바래버린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백호 허리 윗부분 공벽에는 원을 그려넣고 10개의 작은 반원을 같은 간격으로 돌려놓았다. 원 내부에는 두꺼비를 배치, 월상(月像)을 표현했다. 또 백호를 그릴 때 남겨둔 머리와 꼬리부분의 공벽은 비운문(飛雲紋)으로 채워 백호의 동작이 더욱 날쌔보인다. 특히 백호도의 월상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보지 못한 특이한 형상이기도 한 것이다.
   남벽의 주작도(朱雀圖)는 널방 입구, 다시 말하면 널방문 위에 그렸다. 주작 주위에는 인동문을 배치했다. 벽을 살피다가 북벽을 향해 돌아서면 이를 어쩌나 하는 마음이 간절하게 든다. 그 이유는 북벽에 남아 있어야 할 현무도(玄武圖)가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세월이 그만큼이나 흘렀는데 흔적이 뚜렷하길 바라는 마음이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한 심사를 금할 길이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천정화가 비교적 잘 남아 한숨을 돌리게 된다. 연화문을 그리고 사이사이와 주변에 하늘을 표상하는 비운문(飛雲紋)을 박았다. 연화문은 꽃술 가운데 주문(珠紋)을 장식했는데, 연꽃술은 8잎으로 되어있다. 연화문은 모두 7개로, 이 가운데 3개는 남북을 잇는 1줄에 가지런히 배치한데 이어 4개는 좌우에 각각 2개씩 그려 넣었다. 연꽃을 그리는데 사용한 색깔은 분홍색, 갈색, 황색, 검은색이다.

   . 송산리 6호분
     공주 송산리 6호분은 그림을 그려넣은 벽면부터가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과 다르다. 능산리 벽화고분의 벽이 물갈음한 넓은 널돌인데 비해 송산리 6호분은 널방의 4면벽을 문양벽돌로 쌓은 뒤 그림을 그릴 부분만 진흙을 발랐다. 그리고 나서 호분(湖粉 : 조개껍데기를 구워서 만든 안료의 일종인 백색분)으로 벽화를 그렸다. 뒷날 사비시대 고분벽화처럼 사신도(四神圖)를 그렸다.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널방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북벽에 현무, 남벽 이북 위쪽 벽에는 주작과 일월상을 그리는 형식을 취했다. 청룡도는 머리에 뿔 2개가 달린 쌍각청룡(雙角靑龍)이다. 허공을 뛰어 달리는 용의 자세로 짐작된다. 백호도는 백묘기법(白描技法)을 써서 그렸음에도 패기찬 자태가 잘 표출되고 있다. 왼쪽 앞다리는 올리고 뒷다리를 전후로 벌려 달리는 모습을 했다.
   이러한 백호도(白虎圖)는 회화기법은 다르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온다. 고구려 벽화의 백호는 몸체가 가늘고 긴데 비해 백제의 것은 비교적 굵은 편이다. 현무도는 퇴색되어 뱀과 거북이 얽힌 흔적을 찾기가 힘들지만 작은 형태를 알아볼 만큼은 남아있다. 두 날개를 위로 힘껏 펼친 주작이 꼬리털을 날리면서 막 비상하려는 자태를 하고 있다. 그 주작의 양쪽에는 흰색으로 그린 동심원이 배치되었다.

   . 무령왕릉
     백제의 회화에서 고분벽화는 분명한 대작이다. 그렇다면 무덤에 넣은 껴묻거리(副葬品)의 장식화들은 소품에 해당하는 백제의 회화일 것이다. 사비시대에 축조된 도성 이웃의 지배자무덤들은 일찍 모두 내부가 파괴되어 장식화의 흔적을 찾기 어렵지만 웅진시대 무덤의 사정은 다르다.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나무베개(木製頭枕), 장식화와 나무발걸이(木製足座) 장식문양은 걸작이다. 나무베개 장식화는 베개의 나무표면에 주칠(朱漆)을 하고, 우선 금박으로 거북등문양(龜甲紋)을 넣었다. 그 거북등문양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 금니 등으로 세필의 비천상(飛天像), 주작(朱雀), 어룡(魚龍), 연화문(蓮花紋)을 그렸다. 특히 비천상의 경우 천의를 날리면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했고 주작은 두 날개를 부채꼴로 펼치면서 긴 꼬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룡은 묵선과 금니를 함께 사용해 그렸다. 가는 묵선으로 윤곽을 긋고 몸뚱이와 꼬리는 금니로 처리했다. 전체적으로 V자형을 이룬 이 나무베개의 어룡은 바다속에서 헤엄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제회화 유물이 아주 극소수인 사실을 고려하면 이들 무령왕릉 출토 나무베개의 그림들은 귀중한 회화자료가 될 것이다.
   무령왕릉의 나무발걸이에 나타난 장식문에서는 비운문(飛雲紋)이 단연 으뜸이다. 역시 주칠(朱漆)을 한 발걸이 표면에는 금박띠를 돌리고 그 안에다 좌우대칭의 묵선 비운문을 그렸다. 비운문은 바람을 타고 하늘에 두둥실 떠 있다. 요즘으로 말하면 디자인에 가까운 장식문양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독특한 회화성을 지녔다.

  2. 고분벽화(古墳壁畵)

   . 사신도(四神圖)
     고분속의 벽화 사신도(四神圖)는 널방(玄室)의 4방 벽면에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이 사신도는 방위신(方位神)을 표현한 것이다. 방위신에는 본래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이외에 황룡을 포함해서 오신수(五神獸)가 있는데 벽화에서는 황룡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신격의 짐승(神獸)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및 28숙법(二十八宿法)과 관련되었다. 28개 별자리를 중앙, 동, 서, 남, 북의 다섯방향에 따라 나누고, 그 별자리의 모양을 따서 환상적인 신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신수를 숭배했다. 방위신은 방위에 따라 빛깔과 형태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중앙에는 황룡,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뱀과 거북이 뒤엉킨 현무를 배치했다. 또 천정에는 상서로운 동물들과 해, 달, 별, 꽃 등을 그려넣었다.
   일부 고분의 벽화에는 사신도를 각 벽면의 중앙에 배치하고 나머지 공백은 산수화, 구름무늬, 연꽃무늬, 당초무늬와 인동무늬, 불꽃무늬로 채웠다. 그래서 마치 사신도가 여러 장식무늬 바탕 위에 그린 것처럼 착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신도는 어디까지나 사신(四神)이 주제가 된 것이다. 충남 공주시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중앙에 사신만을 그려 대체로 고구려 고분벽화를 연상시킨다. 부여 능산리 고분은 4방벽에 사신도, 천정에는 연꽃무늬와 구름무늬를 그렸다.
   벽화는 널돌(板石)로 널방벽을 축조할 경우 직접 돌벽에 그림을 그리는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회를 바른 다음 벽면에 그렸다. 그림을 그릴 때는 묵선으로 밑그림을 먼저 쳤다. 더러는 밑그림이 없이 곧바로 색깔을 써서 그리는 백묘법(白描法)을 사용하기도 했다.

  6) 사택지적비문

   당시 백제의 불교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주로 받아들였는데 그 남조불교는 도교사상을 받아들여 융합시킨 것이었다. 백제 후기의 귀족층에서는 그러한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문화분위기에 젖은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는데 654년에 작성된 사택지적 비문은 그러한 분위기에 젖은 당시 귀족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사택지적비문이 그러한 세계관을 글로 나타낸 것이라면 금동향로는 조형으로 표현했다는 차이 뿐이었고 그 주제는 전면 일치하는 것이었다.

  7) 백제의 복식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가 북방문화, 즉 스키타이계인 만큼 복식의 경우에도 스키타이계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인들은 머리에 삼각형 모자(弁形帽)와 새깃털로 장식한 관(鳥羽冠)을 썼고, 좁은 소매에 둔부선까지 오는 왼쪽 여밈의 저고리와 말을 탈 때의 편리성을 감안하여 좁은 바리를 입었다.
   상의 위에는 의례용으로 긴 저고리를 입기도 했다. 허리에는 가죽이나 헝겊으로 된 띠를 맸고 장화를 신었다. 또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다.

   . 중국 고서화에 전해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삼국이 이러한 기본 복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은 4세기 중국 梁나라의 ‘직공도(職貢圖)’에서 잘 나타난다. 4-6세기에 그려진 고구려의 고분벽화도 이를 확인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제 왕의 옷매무새는 소매가 넓은 자색 두루마기(大袖紫袍)에 청색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가죽띠(素皮帶)를 맸다는 것이다. 또 흑색 가죽신(烏革履)을 신고 금화가 장식된 검은 비단관(烏履冠)을 썼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한 왕의 옷매무새에다 무령왕릉 출토품으로 장식을 곁들여 보면 아주 찬란하다. 자색옷에 꿰매어 붙인 사각형 혹은 오각형의 얇은 금판이 더욱 빛나고 허리에 두른 은제 과대는 위엄을 더했을 것이다. 왕비는 물론 왕도 귀고리를 달았고 금동제 신발(金銅履)을 신었다. 과대는 숫돌 물고기, 청동 등의 장식품을 길게 늘여뜨린 아주 화려한 허리띠다. 과대는 고구려나 신라의 귀족들도 6세기까지 금, 은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백제 귀족들도 금과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금동신발은 제사 등 특별한 경우의 의례용만 아니고 평상 집무복에도 갖춘 신발인지도 모른다. 금동신발은 보기와는 달리 딱딱한 신의 안쪽에 헝겊을 대면 충분히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밑바닥에는 뾰족한 스파이크 같은 것이 있어 신기에 불편하지 않다. 현재도 일본 신사의 신관(神官)들이 금동신발과 같은 모양의 신을 나무로 만들어 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에는 5인의 악사가 생생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들은 관을 쓰지 않고 머리를 길게 땋아서 조선시대 내인의 새앙내리 접듯이 몇번 접은 뒤 댕기로 묶어서 오른편 귀쪽에 붙였다. 이 모습은 마치 일본의 아좌태자 양쪽에 서 있는 왕자들의 미즈라를 연상시킨다.
   이같은 악사의 모습은 소매 넓은 자색유와 치마(裙)를 입고 장보관(章補冠)을 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 신선으로 보이는 11개의 인물상도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과제다.


IV. 백제 - 일본 고대문화사

   일본을 건국한 민족은 어떤 민족일까. 일본인들은 그들을 천손족(天孫族)이라고 부른다. 일본의 건국설화인 ‘천손족강림설화(天孫族降臨說話)’는 선진 문명권에서 바다를 건너온 이주민족이 왜열도를 개척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바다를 건넌 사람들

   육로로 연결되어 있었던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오늘날과 같은 해협으로 갈라진 것은 약 1만 5천년전부터 1만년 전 사이의 일이다. 그 이후로 한반도와 일본은 배라는 교통수단에 의하여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으며, 위험한 바닷길을 건너서 일본열도로 이동한 한반도인들은 초기 일본인, 일본문화의 형성으로부터 고대국가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에서는 이를 도래인(渡來人)으로 부르는데, 한반도 도래인들의 활약은 일본 고대국가 형성과정 그 자체라는 평가까지 있다. 그렇다면 그 시기의 한반도인들은 어떻게 건너갔으며 어떻게 일본에 영향을 끼쳤을까?

   . 고대의 교통로
     오늘날 일본해안에는 한반도로부터 건너간 부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재의 조류 흐름과 부유물 표착지는 선사, 고대시기 선박을 이용한 해상이동의 경로를 가늠케 한다. 고대인들은 조류의 흐름에 의지하여 일본열도로 이동하였으며, 이동에 사용된 배는 원시적인 통나무배로부터 시작하여 준구조선(準構造船)에 이르기까지 점차 발달하였다.
   이러한 고대의 배는 우리나라에서는 안압지출토선, 일본에서는 큐호지(久寶寺)출토선 등이 남아있으며, 그 이전 시기는 암각화, 상형토기 등에 나타난 배 모양으로 그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 銅鐸(福井)출토 야요이시대 중기
     야요이(彌生)시대 중기에 제작된 동탁(銅鐸)에 새겨진 배의 모양이 시대가 앞서는 우리나라 반구대 암각화와 유사성을 보여 흥미를 끈다.

   . 한반도 기마민족의 일본상륙 - 다케하라 고분벽화
     규슈(九州)후쿠오카(福岡)현 와카미야(若宮)에 있는 다케하라(竹原)고분벽화는 직경 18미터, 높이 5미터의 원형분묘다. 석실은 횡혈식 석실로 내부에는 선명한 색깔로 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상단에는 신라 천마총 등에서 보이는 천마(天馬)의 모습이 보이며, 하단에는 배 위에서 해변으로 말을 끌어 내리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코벨(Covell)박사에 따르면 이 벽화는 한반도의 기마민족이 규슈지역에 상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 한다. 이 벽화를 통해 당시 바다를 건너서 일본열도로 진출하는 한반도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2. 한반도인의 일본 진출

   한반도인들의 일본열도로의 진출은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가 있었다. 1단계는 신석기 시대로 BC5000년경의 오산리의 융기문토기가 부산 동삼을 거쳐 쓰시마와 규슈로 연결되고 있다. 2단계는 BC4-5세기 죠몽시대 후기부터 야요이(彌生)시대에 이르러 영농기술이 전래되었으며, 청동기와 고인돌 문화가 시작되었다. 3단계는 삼한시대로서 발달된 철기문화와 잠상(蠶桑), 면포 등 새로운 문화의 전파가 있었으며, 4단계는 3국 및 가야시대로서 불교, 유교 등 종교와 정치제도, 율령의 전파라고 본다. 3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영향은 아스카(飛鳥)문화나 하쿠호문화의 성립뿐 아니라, 쇼토쿠(聖德)태자, 백제의 유교, 고구려인 혜자(불교), 그리고 신라인 주하승(정치)이 같이 있었다는데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다이카개신이 한창일 때 김춘추의 도일(647)은 중앙집권화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3. 백제문화의 일본전파

   우리 한민족은 동아시아 대륙 끝 한반도에 터를 잡아 단군성조(檀君聖祖)의 심오한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세계를 이(利)롭게 한다는 인류행복과 인간사랑의 정신을 일찌기 표방하고 5천년의 장구(長久)한 세월동안 이 땅에서 조상 대대로 상경하애(上敬下愛)하며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대륙으로부터 들어온 각종 문화유산을 승화, 발전시키며 바다건너 일본에도 이를 이전(移轉)시켜 그들 문화의 원류(源流)가 되어왔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즉 그들의 정신적, 문화적 원류라 할 수 있는 천자문과 논어, 그리고 불교를 전해주었고, 또 여러가지 생활의 지혜도 가르쳐 주었다.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鼎立)했을 때 일본열도는 야요이(彌生)시대였다. 한반도로부터 이나사쿠(稻作), 즉 벼농사 재배기술이 일본에 전래되기 전까지는 그들은 산야초(山野草)나 열매를 따먹고 살았으며, 직포문화(織布文化)가 전래되기 전에는 옷마저 변변치 못했고 이엉으로 이은 띳집에서 살았으니 그때가 바로 야요이 시대의 말기인 AD100년 경이었다. 대륙의 문화이전이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한반도의 발달된 대륙문명이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기원전 2세기경, 야요이(彌生)시대로 보고 있다. 즉 한반도에 삼국이 정립하기 이전부터 문화이전은 시작되었으며 그 후에도 계속적인 문화이전은 일본문화를 꽃피우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 백제는 남해와 세토나이카이(瀨戶大海)를 거쳐 킨키(近畿)평야의 중심지인 오사카(大阪)로 상륙하여 다케노우치가이도(竹內街道)를 따라 나라(奈良)지방에 정착하였다.

   2) 고구려는 서해를 거쳐 가고시마와 도쿄 인근의 오이소(大磯)해안으로 상륙, 사이타마현(埼玉縣)까지 진출하였다.

   3) 신라는 비교적 지리적으로 가까운 시마네현(鳥根縣)과 또 니가타현(新瀉縣(新瀉縣)의 사도(佐島)섬을 거쳐 일본 전역에 영향을 미쳤다.

   4) 그리고 가야인(伽倻人)들은 이보다 앞서 쯔시마(對馬島)를 거쳐 규슈로 대거 이주, 선주(先住)세력을 흡수한 후 규슈 전역을 장악하여 단군신앙(檀君信仰)을 뿌리내리면서 고대일본 국가형성의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4. 일본 천손족의 이동경로

   ‘日本書紀’에 기록된 천손 니니기(瓊瓊杵)의 강림과정은 ‘이상(二上)의 천부교(天浮橋)로부터 浮渚있는 平處에 내리셔’라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천부교는 하늘의 무지개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천손이 하늘에서 수직으로 내려왔다는 것에 맞추기 위한 과장이다. 천손으로 불리는 이주민족이 실제로는 대마도쪽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수평으로 이동해 왔으므로 바다를 건너게 해준 ‘뜬다리’ 역할을 해준 대형선박을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손은 바로 한반도로부터 대마도를 지나 현해탄에 여러개의 점처럼 흩어져 있는 沖島, 大島, 田島 등을 거쳐 오늘날 九州 북단에 당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육지에 상륙한 천손족의 이동경로는, 字佐, 日向, 笠沙를 지나 九州지역 전체에 이르고 있다는 것도 확인된다.
   ‘日本書紀’ 주석본에는 니니기의 강림경상로와 관련, ‘日本書紀’에 海北의 島中이란 말이 있다. 한국과의 海路途上이란 뜻일 것이다. 沖津宮이 있는 沖島는 下關, 對馬北端, 한국의 부산을 잇는 거의 일직선에 있다.
   ‘성씨록’에는 백제 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씨(物部氏)계가 고대 왜열도에서 가장 큰 씨족집단을 이루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씨족에서 나온 석상씨(石上氏)는 백제에서 왜로 전해졌다고 하는 그 유명한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된 석상신궁(石上神宮)을 관장하는 집안이다.
   아지왕(阿知王 또는 阿直岐)은 백제 아신왕(阿莘王, 392-404년)을 말한다. 왕인을 ‘古事記’에서는 和邇吉師라 하였으므로 이 화이(和邇=와니)씨를 ‘성씨록’에서 보면 황족(皇族)으로 분류돼 있고, 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物部)씨와도 혈족으로 연결돼 있다. 일본서기의 신무기(神武紀)에서는 요속일명(饒速日命)을 물부씨의 시조라 하였으며 여기서의 ‘요(饒)’는 백제왕성 ‘여(餘)’이고, 속일은 근초고왕 즉 속고(速古)대왕과 동일인물이다. ‘속기(續紀)’라는 사서도 백제 구소왕(久素王)이 ‘구’(구=근초고왕의 이름 구의 잘못)의 손자 왕인(王仁)을 왜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백제왕족이 왜의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던 판에 성조(聖朝)가 어떻고, 응신(應神)이란 천왕이 따로 있었다고 ‘일본서기’가 주장하고 있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만, 하여튼 백제에 가서 왕인을 불러왔다고 하는 황전별(黃田別), 무별(武別)이란 사람도 있으므로 이들의 신분을 밝혀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성씨록’에 따르면 ‘무부숙녜(巫部神니)’가 ‘신요속일명(神饒速日命)’의 후손으로 나와있다. ‘무부(巫部)‘씨는 물론 무별(武別)을 말하는데 요속일을 시조로 하므로 왜인이 아니라 백제왕족이란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므로 후세에 한반도와 왜열도가 분리되자 부랴부랴 백제사를 개작하여 ‘일본서기’등의 사서를 왜사로 위장하면서 직필을 하지 못하고 매양 소설풍으로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인들은 그들 선조의 역사를 알고 싶어서 ‘성씨록’을 마련했다.
   만약 이 ‘성씨록’이 없었다면 백제인에 의한 왜지개척을 밝혀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경영론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아라사등 설화

   아라사등(阿羅斯等)의 설화에는 황소(黃牛), 백석(百石), 부인, 처녀 등 상징적인 용어가 등장한다. 먼저 황소부터 살펴보면, 힘센 황소는 국력(國力)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설화에서 대가라국(大加羅國)이 갑자기 황소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많은 한인들이 신천지개척을 위해 왜도로 건너가면서 국가 전체가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되자 한(韓)에서도 이주현상을 방치할 수 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자 아라사등이 왜로 가서 지금의 돈하(敦賀=쓰루가)에 거점을 두고 왜지를 통치하게 된다. 이를 두고 설화에서는 황소 대신에 백석(옥 또는 왕권을 상징하는 신령스러운 보물)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이 백석이 처녀로 변해 왕자와 혼인하고, 첩이 되었다는 것은 한반도와 왜열도를 통합한 왕국이 이룩됐음을 말해준다. 이래서 지나(支那=중국)측 기록도 당시 백제의 영역이 남쪽으로는 바다 건너 왜지(倭地)까지라고 한 것이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연오랑-세오녀(延嗚郞-細嗚女)설화가 아라사등의 설화와 유사하다. 이 설화도 백제가 황무지나 다름없던 왜열도를 개척한 4세기 후반의 상황을 연상해보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부터 동해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은 바다 건너에 있는 왜지(倭地)를 ‘월지(越地)’라고 부르면서 자유로이 왕래했다. 그들이 타고 다닌 배(船)를 바위(磐)라 하였다. 이것을 ‘일본서기’는 천반선(天磐船) 또는 천반좌(天磐坐)라고 표기하고 있다.
   특히 천손 ‘니니기’도 현해탄을 건너면서 천반좌를 탔다고 하는 것이다. 이 반선(磐船)은 큰 파도에도 견딜 수 있도록 만든 선박을 말한다. 이로 보아 당시 한반도가 조선술(造船術)에 있어서 선진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6. 백제의 일본집권 과정

   천손 니니기의 천강로(天降路)는 현해탄을 건너 九州를 동남쪽으로 휘돌아 서남단에 있는 입협(笠挾=가가사)에서 일단 끝을 맺고 있다. 그곳이 야간(野間=노마)반도인데, 그 끝에는 조그마한 연못인 야간지(野間池)가 있고, 그 위로는 아구근시(阿久根市)가 있다.
   ‘옛날 신라국(新羅國)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름을 천지일모(天至日矛=아메로 히호고)라 하였다. 이 사람이 바다를 건너왔다’는 설화가 있다.
   이 설화에 나오는 천지일모는 ‘일본서기’의 ‘수인기’에 나오는 ‘신라 왕자 천일창이 내귀하였다’의 천일창이다. 설화는 그가 도왜한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면서, 천일창에 의한 왜지개척자를 담고 있다.
   오늘날 일본왕실에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삼대신물(三大神物)은 팔척경구옥(八尺瓊勾玉), 팔지경(八咫鏡), 천총운검(天叢雲劍)이다. 이것들은 각각 구슬(玉), 거울(鏡), 칼(劍)이므로, 설화에서 신라왕자가 구슬을 빼앗은 것은 원주민에 대해 왕권을 행사했다는 뜻이 된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둘것은 ‘고사기’ 등 일본 사서의 초기기록에 나오는 ‘신라’라는 말이 그 당시 왜지에서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인이 개척한 왜지의 신토(新土)를 두루 포괄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7.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

   백제의 일본과의 관계를 규명함에 있어서는 한국의 역사기록으로는 별반 나타난 것이 없고 일본서기나 고사기 같은 일본측 기록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日本書紀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의 정사에 해당하는 책이고, 古事記는 712년경에 편찬된 책이다.
   이 책은 한국의 삼국사기와 연대를 비교하면 맞지 않는다. 日本書紀가 三國遺事와 연대가 맞아 떨어지는 시기는 백제 개로왕(蓋鹵王)21년(서기 475년)부터이다. 475년 이전의 기록은 120년씩 차이가 나는 것이 가장 많다. 대개 옛날에는 간지(干支)로 기록되는 경우가 많은데 간지의 기록을 日本書紀를 편찬할 때 二週甲씩 올려서 기록한 결과이다.
   최초로 백제에 온 倭使는 근초고왕(近肖古王)21년(366년)에 사마숙미(斯摩宿彌 = しまのすくね)일행이다. 斯摩宿彌는 卓淳國(지금의 東來에 있던 고대 부족국가)에 와서 從人으로 데리고 온 爾波移(にはや)로 하여금 卓淳國 사람 過古(わこ)등과 함께 백제에 보냈던 바 近肖古王은 오색의 비단 각각 한필과 角弓箭(뼈로 만든 활과 화살)와 鐵鋌(철정이란 길쭉하고 납작한 쇠덩이인데 창이나 칼, 낫등을 만들수 있는 철의 원자재이고 화폐로도 통용되었다 함)40매를 주고, 이외에 진기한 것이 백제에는 풍부하다고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日本書記 神功紀46年,47年,48年條)
   이에 백제는 367년에 久氏(くてい),彌州流(みつる),莫古(まくこ)등을 倭國에 보내어 通交를 개시하였다.
   369년에는 倭師 千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등이 忱彌多禮(전남 강진)에 상륙하여 그때 마침 馬韓의 殘邑을 소탕하고 있던 肖古王(近肖古王)과 太子貴須(近仇首)를 반갑게 맞이하여 회담하고 함께 북상하여 수도 한성에 이르러 왕의 예우를 받고 머물다가 백제인 久氐와 동반하여 돌아갔다.
   이 근초고왕때는 백제가 강성하여 반도의 서남을 전부 영토로 한 시대다. 이어서 371년(神功51년)백제의 근초고왕은 久氐를 倭國에 보내어 禮物을 전하였는데 당시 倭王은 백제와 친교를 가진것은 하늘의 소치(所致)라고 극찬했다. 이를 보면 왜국이 문명국인 백제와 通交한 것이 얼마나 큰 다행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고 久氐가 가져간 진귀한 물건을 보고는 옛날에는 없었던 물건이라고 감탄하였다.
   이 해에 倭王은 千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을 久氐 등과 함께 다시 백제에 가게 하였다. 이는 백제왕에게 답례로 보낸 것이다. 372년 壬申(神功52년)에 天熊長彦(ちくまなかひこ)이 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백제에서는 久氐를 같이 가게 하였으며, 이때 예물로 七支刀 한 자루와 七子鏡 거울 하나와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들을 보냈다. 바로 이 七支刀가 지금 일본 天理市에 있는 石王神宮에 보존된 그 칠지도며, 그때의 거울, 곡옥(曲玉) 등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칠지도의 모조품이 지금 부여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음).
   儒學과 漢文은 書記 應神紀 15年에 백제의 왕이 阿直岐를 일본에 보내면서 좋은 말 두 필을 보냈는데 왜왕(倭王)응신(應神)이 아직기로 하여금 그 말을 사육하도록 맡겼다. 그런데 이 阿直岐가 능히 유교의 經典을 해독함으로 그를 태자토도치랑자(うちのわきいらつこ)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왜왕이 아직기에게 백제에는 너보다 나은 博士가 있느냐 물으니 王仁(わに)이라는 사람이 가장 우수하다고 말하였다. 왜왕은 黃田別(あらたわけ), 巫別(かむなきわけ)을 백제에 보내어 왕인을 초청해 갔다(應神16년). 이 王仁이 太子의 스승이 되어 經籍을 학습시켰는데 王仁은 통달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한다. 이 王仁은 후일 書首란 文人職의 시조가 되었다 한다. 이 해가 乙巳年으로 백제의 阿花王(阿莘王)이 돌아 갔으므로 王子直支(腆支)가 귀국하여 왕이 되었다 한다(405年).
   그런데 古事記란 책에는 좀 자세히 기록되었는데, 시대는 應神朝의 사실이라 하면서 百濟照古王이 말 두필을 阿知吉師(あちきし)에게 부치어 보내면서 橫刀와 大鏡을 보냈고 또 賢人을 보내달라고 백제에 요청하니까 和邇吉師란 사람이 論語10권과 千字文 한권을 가지고 왔으며 卓素라는 治工(쇠붙이를 만드는 대장장이)과 옷감을 짜는 吳服師로 西素라는 사람과 仁番이란 釀酒者 주자를 보내왔다 한다.
  여기서 照古王은 근초고왕을 지칭하는 것이며, 阿知吉師와 和邇吉師는 書記의 阿直岐와 王仁에 해당한다. 吉師(きし)백제에서 왕을 鞬吉支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大人이란 존칭 말이며 신라의 十四官等의 吉士와도 상통하는 것이다. 이외의 일본의 여러 기록이 모두 연대에 대해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대체로 이는 근초고왕때부터 아신왕까지 (346-405)사이의 일로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일본 최초의 철공 기술자는 백제인 卓素요, 옷감을 짜는 기술의 시조는 西素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직물을 ‘吳服’이라 하는데 이때부터 연유된 이름이다. 일본 술 제조기술의 시조는 仁番이 된 것이다.
   이 仁番의 또하나의 이름이 須須許理인데 술을 빚어 왜왕에게 올리니 왜왕이 이를 마시고 취해서 ‘수수고리가 빚은 美酒에 나는 취했다’는 노래까지 지어졌다.
   그리고 403년(應神 14年) 백제왕이 縫衣工女 眞毛津(まけつ)을 일본에 보내어 옷 만드는 것을 가르쳤는데 이가 일본 衣縫의 시조가 되어 있다.
   의학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인으로 백제에 귀화하였다가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 있었고 倭王允恭(いんきよう)이 그의 3년에 병을 치료하였던 바 완치되어 상을 주었는데 이 의사가 김파진한기였다 한다(古事記). 이 允恭倭王이 81세로 죽었을 때 신라에서는 80인의 樂人을 조문사절로 보내 왔다고 한다. 지금 일본 奈良의 正倉院에는 新羅琴이 보존되어 있다. 繼體(けいたい)紀 7년(513)에는 백제에서 五經博士 段楊爾가 일본에 왔고, 516년 백제 무령왕 16년에는 오경박사 고안무를 왜에 보내어 단양이와 교대시켰다. 여기서 五經이라 하는 것은 易, 詩, 書, 藝, 春秋를 말한다.
   일본에 불교를 전한 것은 欽明(きんめい)紀 6年 545年에 백제에서 불교의 문물과 사상이 전래되었다고 하였는데, 欽明紀 13年(552)10월에 백제의 聖明王이 西部의 姬氏와 達率(2等官等) 노리사치계(ねにしちけい) 등을 일본에 보내어 금동 석가불 1구와 經論을 전하였다 한다. 545년의 불교전래는 私傳으로 볼 수 있고, 552년 사실을 公傳으로 볼 수 있다. 이어 553년에는 倭王이 醫, 曆, 易 박사의 교대를 요청하고 점치는 책과 달력 및 藥材를 요청하였다. 554년 2월에는, 百濟는 下部(五部中 下部) 杆率(五等官等)인 장군 三貴와 上部의 奈率(六部官等)인 物部烏等을 倭에 보내어 救援兵을 請하면서 同時에 德率寺等인 東城子莫古를 보내어 전에 倭에 건너가 있는 東城子言과 교대케 하고, 五經博士 柳貴로 하여금 전에 가 있는 固德(九等) 馬丁安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승려 曇惠 등 九人으로 하여금 이미 倭에 가 있는 승려 道深等 七人과 교대시켰다. 또 倭의 요청에 따라 易博士 施德(8等) 王道良, 曆博士 固德(9等) 王保孫, 醫博士 奈率 王有(忄+俊)陀採藥師 施德 潘良豊 固德 丁有陀藥人 施德 三斤 季德(10等) 己麻次進奴 對德(11等) 進陀를 보내어 왜에 가 있는 사람들과 교대시켰다. 百濟 554年은 聖王이 新羅軍에게 전사를 당하는 위급한 때이므로 555年에도 倭에 원군을 요청하고 있으며, 많은 百濟人이 倭에 상주하여 계속 교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倭에 건너간 백제의 음악가들이 橫笛 玄琴 莫目(管樂器(マクモ)의 일종), 춤 등을 가르쳤던 것이다.
   百濟 威德王 때인 577년 11월에는 百濟에 왔다 돌아가는 倭使편에 經綸과 律師, 禪師, 比丘尼 등 승려가 따라갔고, 불상을 만드는 기술자와 절을 건립하는 기술자 및 呪禁師(주문을 외어서 악귀를 물리치고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 등 6人을 딸려 보냈다.
   584年에는 백제에 왔던 倭師 鹿深臣(かふかのぉみ)이 百濟의 彌勒石像 一軀와 佛像 一軀를 가져갔으며, 588年 백제 威德王은 왜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승려 惠摠과 令斤 및 惠寔 등을 함께 가게 하고 佛舍利를 보내었다.
   또 승려 惠宿, 惠衆 등을 보내면서 탑의 相輪部를 만드는 기술자인 將德(7等) 白昧淳과 기와굽는 기술의 대가인 瓦博士 麻奈父奴 陽貴文陸貴文 昔麻帝彌등과 화가인 白加를 같이 보내었다.
   이해(588년)에는 倭에서 최초의 유학생인 善信尼와 禪藏尼 및 惠善尼의 여승이 백제에 와서 佛敎를 배우고 590년에 돌아갔다.
   592년에는 百濟의 승려 惠聰이 일본에 가서 그해 귀화한 高句麗 승려 慧慈와 더불어 日本佛敎의 중추적 人物이 되었는데, 당시 倭는 推古時代로서 聖德太子 섭정초기에 해당한다.
   聖德太子는 고구려의 승려 惠慈에게 佛敎를 二年間 배우고 百濟人 博士覺哿에게 儒敎를 배웠으며, 百濟승려 惠聰도 太子의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
   이 聖德太子는 日本飛鳥文化의 황금시대를 열고 倭를 帝國으로 승격시킨 君主로서 推古女帝의 太子가 되어 모든 정치를 독단하였다. 그는 中國皇帝에게 보낸 칙서 가운데 해 돋는 나라의 天皇이 해지는 나라의 皇帝에게 칙서를 보낸다는 대담한 위엄을 보였던 사람이며, 일본 古代의 神人개념에 의한 佛이면서 現世를 통치하는 治者이기도 했다.
   聖德太子는 574年에 나서 621年에 죽었는데 594年에 太子로 책봉되었다.
   그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曆을 制定公布하고 冠位을 제정하였으며, 憲法(17개조항)을 제정공포하고 많은 불사를 창건하여 위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이 聖德太子가 百濟人과 高句麗人의 도움을 받아 이러한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지금 日本 奈良顯 生駒郡 法隆寺 聖靈院에 聖德太子의 像과 함께 惠慈法師의 像이 모셔져 있다.
   593년에 일본에 法興寺와 四天王寺가 建立되었는데 飛鳥址에 법흥사(現 飛鳥寺址)가 기공되는 날 왜의 대신들 백여명이 모두 百濟의 옷을 입고 이 행사를 치뤘으니 이 절들이 百濟人이 만든 절이었던 것이다. 이 法興寺에는 백제의 중 惠聰과 고구려의 중 惠慈가 있었는데 惠慈는 615年에 고구려로 돌아갔다 한다. 이 惠慈는 621년에 聖德太子가 죽었다는 소리를 전해 듣고 淨土에서 서로 만나자는 언약을 하고 헤어졌던 약속을 생각하며 이를 지키기 위해 622년에 죽었다 한다. 百濟 威德王의 왕자이면서 화가이던 阿佐太子는 597년 일본에 가서 聖德太子의 상을 그려주고 스승이 되었던 것이다(推古紀 5年 4月條).
   602년(推古 十年)에는 百濟의 승려 觀勒이 曆本과 天文地理書와 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전하였는데, 聖德太子가 曆日을 공포한 것이 604년(推古 十二年) 1月이었던 것이니 관륵이 가져간 元嘉曆이었다.
   元嘉曆이란 宋나라의 何承天 등이 만든 曆을 宋文帝가 元嘉二十年(443年)에 사용하였는데 그때의 연호가 元嘉였으므로 元嘉曆이라 하게 되었다. 百濟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買地의 誌石기록이 元嘉曆으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525年 이전에 이미 百濟는 元嘉曆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日本은 604年에 元嘉曆을 공포한 것이다.
   612年(推古二十年)에는 百濟人 路子工이 皇宮 南庭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須彌山과 吳橋를 設置하였다. 이 수미산은 큰 바위에 생긴 정원석의 일종인데 飛鳥宮址에서 발굴되어서 현재 국립 東京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이 路子工은 日本 庭園文化의 始祖가 되었다. 이보다 2年 앞선 610年(推古 18年)에는 고구려의 승려 曇徵이 五經과 彩色과 종이와 먹과 년애(碾磑 : 맷돌)등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왔으며, 담징은 그림도 잘 그리는 화가여서 法隆寺의 金堂에 觀音像을 그렸다. 특히 일본의 맷돌은 이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한다. 664년(天智 四年)의 기록으로 이는 이미 百濟가 망하였지만 百濟의 達率 答㶱春初로 하여금 일본 長門國에 城을 쌓았고, 또 達率 憶禮福留達率 四比福夫로 하여금 茿紫國에 大野城과 椽城을 쌓았다. 이는 이미 日本에 건너가 있던 百濟 達率인지 또는 百濟가 망하고 난 후 망명한 사람들인지 모르지만 百濟人이 城을 축조하는 기술로 뛰어났기 때문에 築城工事를 시킨 것이었다.
   百濟가 망하는 과정에 많은 百濟人이 당시 百濟의 우방국인 日本에 건너갔을 것만은 사실이다. 이들이 日本文化에 기여한 공로도 컸던 것이다.
   日本이 倭란 명칭에서 日本으로 칭한 것은 三國史記에 文武王 10年 670年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日本과 百濟는 오랫동안 선린관계를 유지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으며, 百濟의 王家가 日本에 거주한 일들이 오래되는 과정에서 日本 王室에 시집간 百濟王族이 더러 생겼다.
   그리하여 日本 皇族 속에는 百濟의 피가 섞었으니 仁德, 欽明, 敏達, 用明, 崇峻, 推古, 欽明 등은 百濟王室의 外孫들이다. 이뿐 아니라, 日本書紀 新撰姓氏錄에는 수많은 百濟계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다.
   日本 최고의 역사책이요 日本人이 聖書처럼 여기는 日本書紀의 편찬에도 百濟人의 참여가 곳곳에 보이며, 984年에 편찬한 의학서적인 醫心方三十券에 百濟新集方과 新羅法師方의 의학서적들의 내용이 인용되고 있으니 백제 의학은 대단히 높았던 것이다.
   百濟는 日本이 자랑하는 飛鳥時代(538-645)文化를 낳게 한 어머니였다. 日本 飛鳥文化는 百濟文化의 移植이며 모방이었다.
   아스카 시대인 624년(推古 32年) 기록에 의하면 寺院이 46개소 승려가 816人 비구니가 569人이나 되었다 하며 이 이후 日本은 오늘까지 東洋의 최고 불교국가가 되어 있다. 근년에 593년에 건립하였던 飛鳥寺址가 발굴되었는데 百濟의 蓮花紋 막새와 똑같은 기와가 출토되었다. 지금 法隆寺 夢殿에 봉안되어 있는 觀音菩薩像, 大寶藏殿에 있는 百濟觀音像과 廣隆寺에 있는 半跏思惟像, 中宮寺에 있는 半跏思惟像, 法隆寺의 玉虫廚子 등 日本 國寶의 最高의 文化財가 모두 百濟人이 만든 것이니 百濟文化가 어느 정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660년 7월 그날의 戰禍 속에 이땅의 百濟文化는 한 줌의 재로 화하였던 것이니 夫餘, 熊津, 그 찬란한 文化의 中心地가 폐허로 남아 다만 옛 일을 생각케 할 따름이다.

 

V. 백제의 숨결 - 일본문화

1.불교전래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보다 12년이 뒤져 384년인 침류왕원년 東晋으로부터 마라난타에 의해서였다. 불교가 전래된 이듬해 漢山(서울지역)에 佛寺를 조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서울 근방에서 백제의 사찰터가 확인된 바는 아직 없다. 백제의 사찰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도읍을 공주로 옮긴 후부터다. 즉 ‘삼국유사’에 나타나는 大通寺라든가 水源寺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의 사찰유적이 본격적으로 밝혀지는 것은 聖王代 이후인 6세기 초 부여시대(사비시대)에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는 절 이름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만도 王興寺를 비롯하여 虎巖寺, 漆岳寺, 鳥含寺, 道讓寺, 資福寺, 帝釋寺, 五金寺, 普光寺, 彌勒寺, 師子寺, 北部修德寺 등이다. 이중에서 도양사, 자복사, 보광사 등의 위치는 아직 찾지 못하였지만 그외에는 대체로 위치가 밝혀져 있다.
   백제는 538년 일본에 불교를 전해주고 아울러 경전과 불상은 물론 造佛, 造寺工을 보내어 불사를 조영하는데 기술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였다. 따라서 아스카지(飛鳥寺)를 비롯하여 四天王寺, 法隆寺 등 飛鳥時代(552-645년)와 奈良時代 초기의 불사건축들의 대부분은 백제의 기술에 의존하여 세워졌다고 믿어진다.

2.장신구의 특징

   지난 1971년 무령왕능(武寧王陵) 발굴당시 참으로 많은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웅진시대(AD475-538년) 공예미술의 극치를 보여준 무령왕릉은 가히 백제문화의 寶庫였다. 무령왕이 세상을 뜬 것은 AD 522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6년 뒤에 도읍을 사비로 옮겨 사비시대(AD538-660년)를 개막했던 것이다.

   . 전해진 유물 적어
     백제의 유물로 남은 장신구는 신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다. 특히 사비시대가 비명으로 막을 내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럴 수 밖에 없다. 가장 신분을 뚜렷이 나타내는 금동관의 경우 도성유적에서 출토된 완형은 전해지지 않는다.
   도성유적 출토품이라야 부여 능산리 고분군의 中上塚에서 나온 금동관의 솟을장식(笠節)만이 겨우 전해질 뿐이다. U자형 금동관에 봉황과 흘러가는 구름문양을 맞새김한 이 솟을장식의 꼭대기는 산모양을 이루었다.
   그러나 사비시대 금동관모는 대단히 훌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사비도성 먼 변방에서 해당하는 전남 나주군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도 멋들어진 금동관이 출토되었다는데 있다. 신촌리 출토 금동관은 아주 얇은 금동판을 구부려 만든 타원형 관띠의 정면과 좌우에 맞새김 초화문 솟을장식을 올렸다. 그리고 솟을장식과 관띠에 작고 둥근 달개를 담았고 장식 끝부분마다 파란색 구슬로 마감했다.
   나주 신촌리 금동관은 내관도 갖추고 있다. 내관으로서 이 관모(冠帽)는 반타원형으로 오린 2장의 금동판을 붙이고, 그 맞붙인 부분을 다시 금동판을 구부려 감쌌다. 관모의 양쪽판은 두들겨 만들어낸 점선이 연결되어 물결문양을 이루었다. 그 사이사이에는 당초문과 인등꽃문양이 끼어있다. 기본적으로 고깔과 흡사한 관모라 할 수 있다.
   이같은 금동관모는 부여에서 그리 멀지않은 전북 익산군 웅포면 입점리 고분에서도 출토되었다. 입점리 고분에서 나온 관모에는 다만 S자형 장식이 달렸다. 입점리 출토품 형식과 꼭 맞아 떨어지는 관모가 일본 구마모또현(熊本顯) 후나야마(船山) 고분유적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사비시대의 고예술이 일본으로 건너간 뚜렷한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기도 하다.

   . 여인들 비녀사용
     백제의 여인들은 머리를 가꾸는데 비녀를 사용한 모양이다. 조선의 여인들처럼 비녀를 가지고 쪽을 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백제여인들도 비녀를 사용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 고분에서 출토된 비녀 1점이 유일하게 현재 전해진다. 이 비녀는 길이 10.1cm로 머리부분에는 다섯꽃술의 꽃문양을 조각한 금제장식이 달렸다. 그리고 은제 몸뚱이에는 작은 동그라미와 대나무잎새를 점선으로 조각했다. 금두은잠(金頭銀簪)인 것이다. 우아하기 그지없는 장신구로 평가된다.
   충남 부여군 장암면 하황리 고분에서 출토된 앙증스러운 유물은 아직도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은 유리공에 네 잎새모양의 은관과 꼭지를 붙이고 꼭지에 은봉을 꼬인 이 유물의 용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꼭지쪽에 꼬인 은봉 부분에는 방울까지 달아매 더욱 앙증스럽다. 학자들이 오래 논의한 끝에 장신구라는 결론을 얻었다. 장신구중에서도 여자들이 머리를 묶어 장식하는 결발구(結髮具)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 세공술 日에 전파
     금제 목걸이에서는 백제인들의 독창적 공예술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고리가 달린 여러 개의 금막대를 연결한 목걸이가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7마디짜리와 8마디짜리 금목걸이가 출토되었다. 백제쪽에서만 나타나고 있는 유물이다. 武寧王陵에서는 왕의 유품이 분명한 금제 귀고리가 나왔다.
   백제쪽에서는 반지가 그리 흔히 발견되지는 않고 있으나 무령왕릉 출토 왕비의 은반지는 유명하다. 안에는 ‘경자년에 다리라는 장인이 왕비를 위해 만들었다’(庚子年 二月 多利作大夫人分二百州主耳)는 새김글씨가 들어있고 밖에는 혀를 내민 용이 조각되었다.
   띠꾸미개(帶金具)와 띠드리개(腰佩) 역시 무령왕릉 출토유물의 명품이다. 이밖에 충남 공주시 송산리 고분 출토 짐승머리모양 띠꾸미개(銙帶)는 그 형식이 일본 長野顯 須坂市 요로이츠키(鎧)고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3. 제사(祭祀) 유적

   우리 민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베풀었다. 옛 기록에 나오는 부여(夫餘)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등이 모두 제천의식이다. 특히 국가형태가 완전히 갖추어지면서 국가경영과 관련이 있는 제례가 제도화하는 가운데 사직(社稷)이나 종묘(宗廟)와 같은 제사유적이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여느 민간사회에는 마을 주민들의 무병안녕(無病安寧), 다산(多産)과 풍요(豊饒), 풍어(豊魚) 등을 기원하는 제사터가 마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백제강역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제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을 대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출토된 바 있는 충남 부여 능산리 유적이 제사터였다는 국립부여박물관의 발굴조사 결과가 나왔다. 이 능산(陵山)리 유적은 충남 공주 송산리 개로왕의 가묘(1988년 문화재연구소 발굴), 전북 부안 변산반도(邊山半島)의 죽막동 유적(1994년 국립전주박물관 발굴)과 함께 몇 안되는 백제 제사유적으로 떠올랐다.

   . 죽막동 제사유적
     백제의 제사유적 중 전북 부안군 죽막동 제사유적은 변산반도 해안절벽에 자리잡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이 발굴한 이 유적에서는 구멍이 뚫린 원판(有孔原板)과 구리거울(銅鏡), 활석으로 모방한 갑옷, 굽은 옥(曲玉), 쇠칼, 동물을 형상화한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을 발굴한 국립전주박물관은 죽막동 제사유적은 AD5세기를 전후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이 죽막동 제사유적은 일본 오키노시마(沖島)노천유적과 거의 비슷한 조건을 갖추어 주목을 끈다. 부안 죽막동은 섬은 아니지만, 해안가 절벽에 위치했다는 입지가 우선 비슷한 것이다. 유적 형성시기는 부안 죽막동 유적에 비해 훨씬 늦은 AD7-8세기경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출토유물 성격도 비슷한 내용을 보여 백제의 영향을 받은 유적으로 보고 있다.

   . 오키노시마(沖島) 출토품
     오키노시마(沖島)는 일본 규슈(九州)와 한반도 사이의 현해탄 망망대해 속의 섬이다. 둘레는 약 4Km이고 해발 2백43m의 산이 우뚝 서 있다. 절해고도인데다 지형마저 험준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거의 상주하지는 않지만 여러 시대의 제사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야요이(彌生) 시대로부터 고훈(古墳)시대를 거쳐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제사유적이 밀집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오키노시마를 ‘바다의 정창원(正倉院)’이니 ‘섬으로 된 정창원(正倉院)’ 따위의 호칭을 붙였다.
   이 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근대화 이전의 에도(江戶)시대부터다. 그러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는 지난 1953년부터 이루어졌다. 현재까지 23개소의 유적이 조사되었다. 오키노시마 출토유물로는 굽은 옥, 철제무기류, 토기, 활석 제사용품 등이 있다. 이들 유물은 거의가 바위 끝자락에 만들어 놓은 제사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오키노시마 제사유적은 일본에서 가장 일찍 나타나는 제사유적인 동시에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데 자리잡았다.  더 설명을 곁들이자면, 오키노시마 유적은 우리 부안의 죽막동 유적을 원형으로 삼아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의 유물을 수용했다는 사실도 포함될 것이다.
   어떻든 한반도계의 유물이 오키노시마에서 나오는 것은 이른바 도래인(渡來人)과도 결부시켜 생각할 수 있는 문제이고, 더 흥미로운 것은 고대인의 정신세계마저도 정확하게 반영시켰다는 점이다. 갑옷을 모방한 활석제 제사용품이 부안 죽막동 유적 출토품과 같다는 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오키노시마 출토의 금동제용두(金銅製龍頭)도 경북 풍기와 강원도 양양 출토품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 伽倻유물도 나와
     그리고 우리 가야(伽倻)고토의 여러 고분에서 흔히 출토되는 말띠드리개가 오키노시마에서도 나오고 있다. 오키노시마가 극히 좁은 섬이라는 현실을 고려하면 실제 말을 타는 기마용(騎馬用) 말갖춤(馬具)의 일부라기 보다는 제의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말갖춤 장식에 불과한 말갖춤까지도 신성시한 당시 오키노시마의 풍속을 엿보는 듯하다. 이렇듯 한반도의 문화는 현해탄 가운데 섬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일본열도로 흘러 들어간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몇몇 백제의 제사유적을 살펴보았다. 현재 뚜렷하게 나타난 유적이 3개소에 불과하지만, 더 발견되 수도 있다. 이와 더불어 유적연구가 진전된다면 유적의 성격은 물론 백제인들의 기층심성에 갈린 제례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어느 정도 규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의 사직이나 종묘와 같은 제사유적이 민족의 정신적 구심력을 형성하는데 공헌한 역할론도 제기될 것으로 기대해 본다.

4. 백제의 음악

   충남 부여읍 능산리에서 발굴된 百濟시대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의 상단부에 조각된 5명의 秦樂像은 백제음악사연구에 결정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 보름달같은 모습
     5명의 秦樂人이 연주한 악기는 비파(琵琶)와 피리, 북, 현금소,(玄琴簫)로 발표되었다. 이 가운데 琵琶로 본 현악기는 阮咸이 분명하다. 琵琶와 완함의 가장 뚜렷한 차이점은 몸통과 목부분에서 발견된다. 비파는 물방울 모양의 몸통과 짧은 목을 지녔지만 완함은 보름달처럼 둥근 몸통과 긴 목을 가지고 있다. 이런 모양의 완함은 조선조에 씌어진 악학궤범‘樂學軌範’에서는 월금(月琴)으로 소개되고 있다.
   완함의 연주모습을 보여주는 고고학자료는 安岳3號墳 壁畵(357년)를 시작으로 通溝三室塚(4-5세기) 및 江西大墓(7세기경)등 주로 고구려벽화에서 나타난다. 三室분의 완함은 4줄짜리지만 나머지 줄이 몇개인지 불분명하다. 완벽한 실물이 전하는 日本 正倉院의 완함 역시 4줄이다. 그러나 금동향로의 백제 완함은 3줄짜리라는 저에서 독특하다. 둥근 몸통을 가슴부분에 밀착시킨 가운데 왼손으로 목부분을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퉁겨 소리를 낸다는 공통점을 지녔기 때문이다. 백제가 중국의 北朝가 아닌 南朝의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또 ‘日本後記’권 17에 의하면 橫笛, 군후, 莫目 등 3종의 백제악기가 일본궁중에 소개되었다. 이 악기들이 ‘北史’나 ‘隨書’의 백제악기보다는 ‘일본후기’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특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 百濟제조품 확실
     횡적은 비암사(碑巖寺)의 삼존석불(三尊石佛)에서도 발견됨으로써 백제악기임이 더욱 분명해진다. 또 백제향로에 나타난 거문고는 군후이고 막목은 장적의 일종일지도 모른다. 만약 군후와 막목을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면 백제향로의 주악상에 나타난 악기들은 ‘北史’나 ‘隨書’의 백제악기보다는 ‘日本後記’의 백제악기와 밀접하게 관련됐다고 보는 것이 무방할 듯 싶다. 이는 특히 이 향로가 전래품이 아니라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사실을 음악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 6세기 들어 큰 발전...일에 전파
     4세기 고(鼓)와 각(角) 등 타악기와 관악기 위주였던 백제음악이 남조음악의 유입으로 6세기즈음에는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해갔다. 이렇게 형성된 백제음악은 일본의 欽明天皇5年에 해당하는 554년 음악인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삼국 중 일본의 음악문화 발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5. 백제가 아스카문화에 끼친 영향

   일본 사학계에서는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승되자 그 영향하에 일본문화가 꽃핀 6-7세기를 ‘飛鳥-아스카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에도 백제문화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飛鳥(아스카)라는 말을 이해하고 보면 그보다 훨씬 이전인 4세기 무렵부터 백제인에 의해 飛鳥시대가 열린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비조, 즉 나르는 새인데, 이를 일본에서는 아스카로 읽는다. 왜 그렇게 읽어야 하느냐고 일본인들에게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한다. 다만 ‘일본서기’ 등에 그렇게 읽도록 쓰여 있다고 한다.
   아스카를 살펴보면 이 말도 우리 말임에 틀림없다. 奈良顯에는 백제인들이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며 살았다는 明日香村이 있다. 이 명일향을 ‘아스카’로 읽을 뿐 아니라 그곳에는 ‘아스카(飛鳥)’신사(神社), ‘아스카(飛鳥)’궁적(宮跡) 등 ‘아스카’란 이름이 붙은 유적이 적지 않다. 여기 아스카에 ‘명일(明日=아스)’이란 한자가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보면 깜깜한 밤과 암흑시대에 갑자기 외래 선진문화의 충격을 받아 원시 왜인사회가 ‘오랫동안의 잠에서 깨어나 새가 아침에 비상하듯이 명일을 맞이했다’는 뜻으로 썼고, 그 시대를 바로 ‘아스카시대’라고 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 말에 처음을 뜻하는 ‘아시’가 있고, 동녘에 해가 솟을 무렵을 ‘아침’, ‘아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아사’(朝), ‘아사개’(朝明)가 됐다. 그리고 동쪽을 ‘아쓰마’라고 한다. ‘아사히’(朝日)는 우리말 ‘아시해’가 건너간 것이듯이 ‘아스카’는 ‘아시께’, ‘아적‘에서 간 말이다. 따라서 飛鳥시대는 명일시대라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일본서기’와 ‘고서기’의 기록을 봐도 4세기(근초고왕시대)무렵부터 백제로부터 운송과 교통을 위한 종마(種馬)가 들어갔는가 하면, 글이 없던 왜인사회에서 왕인(王仁)박사에 의해 학당이 설립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칼, 거울 등 문물은 물론 제철기술자와 대장장이, 술을 빚는 기술자, 옷감짜는 여자 등 선진기술 보유자들이 한반도로부터 쏟아져 들어감과 동시에 여기저기에 한인농업기술자에 의해 한인지(韓人池)가 구축되면서 쓸모없던 왜지의 황무지가 기름진 논밭으로 변해갔다. 특히 칠지도와 함께 고도로 발전한 제철기술이 들어가서 1천6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존이 가능한 최상품질의 철제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의 왜열도 개척은 그 이후에도 더욱 가속화 되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시대부터 시작해서 7세기 백제가 한반도에서 사라질 때까지 무려 3백년 동안 왜열도를 개척, 통치하며, 원시 왜인사회를 문명국가로 성장시켰다. 百家濟海(백가제해)의 국력으로 중국 일부와 왜열도를 장악했던 백제를 본국으로 삼은 한왜통합국가가 신천지였던 열도에 존재했던 것이다.
   일본왕실과 지배층의 계보를 정리한 ‘신찬성씨록’을 분석하면 고대 왜열도역사의 실체가 밝혀진다. 역사의 주인공들을 추적하면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한인들이었으며 백제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찬성씨록’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지배자들의 실체를 정리한 것이며, ‘일본서기’는 본국(백제)와 왜열도에서 전개된 개척-통치사를 담고 있는 것이다.
   천손이 무지개같은 다리(天浮橋)를 타고 내려왔다는 설화적 장면은 한반도 남쪽에서 대마도를 거쳐 여러 개의 작은 섬들을 지나 왜열도에 상륙한 한인들의 이주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왕인박사의 문명전파도 왜열도에 정착한 백제계의 후손들이 본국의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왕인박사를 모셔갔으며, 이런 사실은 ‘일본서기’와 ‘신찬성씨록’에서 확인된다.
   ‘신찬성씨록’을 통해 그 당시 아신왕 옹립을 위해 바다를 건너온 한인들의 성씨를 추적한 결과 그들의 시조가 모두 백제왕실이나 귀족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확인됐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應神이나 國神들도 그 뿌리는 백제계에 두고 있으며, 고대 왜열도에서의 왕권교체란 백제계 이주민 집단 사이의 권력재편 과정에 불과하다. ‘신찬성씨록’을 보면 ‘일본서기’에 천왕으로 등재된 인물들이 물부계(物部系)와 대반계(大伴系)로 크게 나뉜다. 물부계로서 ‘일본서기’에 복중(復中)이나 인현(仁賢)으로 기록된 인물은 바로 백제의 근초고왕이며, 근구수왕은 수인(垂仁), 경행(景行) 등의 인물로 분화되어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이 여러 한자로 표기된것은 백제사를 억지로 왜사로 변형시키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위장한 수법이다.그러나 물부계의 가계도표를 따라가면 근초고왕에서부터 시작해서 침류왕을 거쳐 의자왕까지 연결된다. 그 사이로 아신왕 옹립을 위해 신묘년 바다를 건너온 무내숙니(武內宿彌)라는 백제계집안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천무(天武)의 선조가 된다.
   이와 함께 백제가 3백년 동안 왜열도를 통치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유물이 현재 일본 석상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 등 상당수에 이른다. 그들 스스로 만든 문헌자료와 땅속 깊이 묻혀있던 유물들이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6. 금당벽화

   일본 미술의 최고의 정점인 호류지(法隆寺)는 쇼토쿠 태자의 지시에 의하여 삼국의 조불사(造佛寺)들이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이 호류지의 금당(金堂)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유명한 고구려인 담징을 위시한 한반도계 화공집단에 의하여 그려진 12면 벽화가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세계적 문화재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내부보수공사 도중에 전기취급 부주의로 화재가 일어나서 소실되고 말았다.
   현재 호류지 금당에 있는 12면 벽화는 소실 이후에 일본인 화가들에 의해서 복원 제작된 것이다. 일본은 이 사건을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서 ‘문화재 보존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 한반도 미술문화의 정수이기도 한 금당벽화는 그 어디에서도 확인할 길이 없게 되었다. 실로 우리에게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7. 일본에 있는 주요 한국문화재

   고대의 국적이 불분명한 문화재를 제외하고라도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는 문화재관리국조사만으로도 2만 6천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아직 조사가 되지 않은 것까지 포함하면 어느 누구도 그 숫자를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들 중에는 한일관계의 역사에서 선린외교의 일환으로 일본측의 요청으로 건너간 것도 있지만, 상당량은 임진왜란과 일제시기의 조직적인 약탈, 그 이후 방치된 문화재의 도굴, 도난 등으로 인해 불법적으로 반출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는 주로 서적, 불화 등의 약탈이 자행되어 후지미테이(富土見亭)문고, 스루가(駿河)문고 등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 우리나라에도 남아있는 것이 없는 방대한 양의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고 일본 각지의 사원 및 박물관 등에는 80여점의 고려불화, 200여점의 조선불화 등이 보관되어 있다.
   또한 50여 점의 종(鐘), 일일이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도자기, 조선시대의 회화 등을 비롯하여 아직 조사가 수행되지 않은 방대한 양의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있다.

   . 칠지도(七支刀)

     한일고대사 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의 하나가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顯) 천리시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있는 한자루의 칼이다. 이 칼의 이름은 칠지도(七支刀)이고, 그 형상은 오랜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상징한다.
   칠지도는 날 길이 74.8cm, 꽂이 9.1cm에 가지가 6개 있고, 앞에 있는 창끝같은 날까지 모두 7가지가 되는데, 철제로써 글씨를 금으로 상감(象嵌)하였다. 이 칼에 대하여 신공기(神功紀) 52년 9월조에 ‘백제사자저구저등 소헌칠지도(百濟使者久氐等 所獻七支刀)’라 기록되어 있다. 이 칠지도에 대한 기록을 ‘일본서기’와 ‘고사기’에서 찾아보면 ‘신공(神功)52년 백제의 구저(久氐)가 칠지도와 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하여 각종의 귀한 보물(重寶)을 가져왔다’ 하였고, 또한 ‘應神記’에도 ‘백제국주(百濟國主) 조고왕(照古王)이 횡도(橫刀) 및 대경(大鏡)을 보냈다’ 하여 백제 근초고왕때 이 칠지도가 왜에 전해진 것으로 되어 있다.
   1천6백년 동안 석상신궁에서 신물(神物)로 보존되어온 칠지도가 만들어진 4세기 후반 백제의 국력을 살펴보면 지나대륙(中國)쪽으로는 요서(遼西)부터 양자강을 거쳐 유성(오늘의 廣西자치구 柳州의 柳城)까지 장악하고 있었고 황무지나 다름없는 왜열도는 백제왕족을 비롯한 백제인들이 대거 쇄도하고 있었다.
   백제에서 만든 칠지도의 명문은 다음과 같다.

   앞면 : ‘泰和四年 九月十六日 丙午正陽, 造百練鐵七支刀, ()僻百兵, 宜供供候王, ()()()()作,
   뒷면 :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앞면 : ‘태화사년 구월십육일 병오정양, 조백련철칠지도, ()벽백병, 의공공후왕, ()()()()作,
   뒷면 : 선세이래미유차도, 백제왕세자기생성음, 고위왜왕지조, 전시후세)


   이 명문에서 ‘泰和四年’의 태화는 지나(중국)의 동진연호(東晋年號)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로 돼있지만, 이때 대륙까지 석권하고 있던 백제가 하필 동진의 연호를 빌러썼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태화’4년(369)은 근초고왕24년, 백제가 사방을 크게 아우르던 시기이다.
   다음 ‘()벽백병(()僻百兵)’에서 ()부분에는 희미하게 글씨가 보이는데, ‘출(出)’또는 ‘생(生)’과 닮은 글자로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맥으로 보아 ‘개(豈)’로 읽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벽(僻)’도 자전에서 보면 ‘피(避)’와 함께 통용할 수 있는 글자이므로 이 명문을 ‘개피백병(豈避百兵)’으로 읽으면 ‘백병을 어찌 피하겠느냐’는 뜻이 된다. 이는 곧 백제의 군사적 위력을 크게 과시하는 것이다.
   공공(供供)의 ‘공(供)’을 자전에서 찾으면 ‘급(給)’의 뜻과 함께 ‘봉(奉)’(받들음)의 뜻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공공(供供)’은 ‘받들고 받들라’는 뜻이다. 그 다음 ‘()()()()작(()()()()作)’은 어떤 글자가 빠졌는지를 짐작할 수가 없지만, ‘백제()세()(百濟()世())’는 ‘백제왕세자(百濟王世子)’로 읽는데 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기생성음(奇生聖音)’은 ‘신령스럽게 태어난 샌님’이라는 뜻인데, 여기서의 ‘샌님’은 지금도 쓰지만 고대국가에서는 더 올린 경칭으로 사용됐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을 검토해서 다시 칠지도의 명문을 풀어 읽으면, ‘태화사년오월십일일병오정양’에 백번(百番)이나 쇠붙이를 단야(鍛冶)하여 이 칠지도를 만들었다. 어찌 ‘백병’을 피하겠느냐. 마땅히 ‘후왕’을 받들고 받들라. 선사이래로 이와 같은 칼은 아직 없었다. 백제왕세자는 신령스럽게 태어난 샌님이다. 그래서 왜왕이 되는 것이고 그런 취지에서 이 칼을 만들었다.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라.
   이 칼을 1천6백여년동안 잘 보존해오고 있는 石上神宮은 백제근초고왕을 시조로 하는 물부수(物部首)로부터 연원이 시작한다. 이 신궁은 물부씨(氏) 그 후손들인 삼(森=모리)씨들이 명치유신이후 일제시대를 빼고는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궁사로 신물인 칠지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8. 문명의 전파

   . 농경 - 식생활
     벼농사는 ‘문화의 영향’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벼농사에 익숙한 사람들의 직접적인 이주의 결과물이다. 벼농사의 일본열도로의 전래에는 여러 설(說)이 있으나, 고대미(古代米)의 종류가 양쪽 모두 단립형(單立形)의 자포니카종이며, 농경과 관련된 토기, 농기구 등이 한반도 남부 출토물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한반도 남부로부터 전파되었다는 설이 정설(定說)이다.

   . 온돌 - 주생활
     시가(滋賀)현 穴太유적에서는 오늘날 일본에서 사용하지 않는 7세기경의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의 온돌 사용자는 물론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으로 추정된다.

   . 복식 - 의생활
     나라(奈良)현 다카마쓰(高松) 고분벽화 중 동측북벽의 여자군상은 고구려 쌍영총, 수산리벽화 등에서 표현된 여인들의 복식이나 그 표현수법과 흡사하다. 당시 동북아시아 지배계층의 의복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일본 고대복식에 끼친 한반도의 영향을 느끼게 한다.

   . 다카마쓰총 벽화
     1972년 3월 나라(奈良)현 아스카(飛鳥)촌에서 발굴된 수장급 고분인 다카마쓰(高松)총에서는 극채색의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발굴 조사단은 황급히 발굴을 중단하고 그 실체의 공개를 한사코 거부하다가 슬그머니 발굴을 진행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들이 발굴을 중단하도록 만든 원인은 이 고분의 벽화가 고구려 벽화와 양식과 내용이 놀랍도록 흡사하다는 점 때문이다. 피장자의 신분은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40대 텐무(天武)천황인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으며, 이는 일본 황실과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한 여러가지 추측을 낳게 하고 있다.

   . 문자
     일본에서 글자가 사용된 것은 공식적으로는 4세기 후반에 건너간 백제인(百濟人) 왕인(王仁)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것에서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글자를 사용한 예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금석문이나 토기 등에 새겨진 것들에서인데, 여기에서 소개되는 칠지도(七支刀), 이나리야마고분(稻荷山古墳)출토 쇠칼, 스다하치만신궁(隅田入幡神宮), 구리거울 등은 대표적인 고시대 글자사용의 예이다.
   그런데 이 고대의 유물들은 모두 백제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건너갔거나 일본 거주 백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유물들은 제작연대에 대한 해석 등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칠지도(七支刀)는 거기에 새겨진 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의 고대사가 좌지우지될 정도로 중요한 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 아직도 일본에 삼국시대의 지명이...
     아메리카로 이주한 유럽인들이 자기 고향과 유사한 지명을 신대륙에 명명(命名)한 것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건너간 고대 한반도인들은 자신이 개척하거나 정착한 곳에 모국어로 된 지명을 붙였다. 이러한 지명은 고등안 많이 개칭되고 변하였지만 아직도 일본 각지에는 한반도와 연관된 지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지명은 그 땅 역사의 화석‘이라 한다.
   고려천(考慮川), 백제역(百濟驛)과 같이 삼국의 국가명칭이 오늘날까지 일본지명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 고구려 마을 고마노사토(考慮鄕)
     도쿄(東京)에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사이타마(埼玉)현, 히다카(日北)시에는 고구려 마을인 고마노사토(考慮鄕)가 있다.
   이 마을은 속일본기(續日本記)에 의하면 716년 고마오잣코(高麗王若王)가 고마군(高麗郡)을 설치하고 황야를 개척하고 산업을 일으키는 등의 치적을 쌓은데서 유래한다. 이 마을에는 고구려인들을 모신 사원인 쇼텐원(聖天院), 고마신사(高麗神社) 등이 있으며, 특히 고마역(考慮驛)앞의 장승은 이곳의 명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마을을 일군 고마(高麗)씨 일가는 간토(關東)무사들을 배출한 명가로서 오늘날까지 고구려인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계보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만주를 호령하던 고구려인의 후손이 이국(異國)일본에서 그 맥을 유지하며 일본 속의 또다른 한국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 백제 마을 난고(南鄕)촌
     미야자키(宮崎)현 휴가(日向)시에서 서쪽으로 40Km지점에 백제마을 난고촌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인의 흔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인 나라(奈良), 아스카(飛鳥)지역에 집중되어있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건너간 백제왕족의 한 집단(禎嘉王)이 이곳 규슈지역에 정착하여 오늘날까지 백제인으로서의 일체감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된 것이다.

9. 삼국계 고분과 유물

   일본역사에서 고훈시대(古墳時代)로 분류되는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삼국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 삼국간의 치열한 항쟁은 일본으로의 이주를 촉진시키는 원인이 되었고, 그 결과 선진문물의 전파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발견되는 고분의 양식과 부장품들의 상당수가 당시 한반도의 그것과 매우 유사한데, 이는 그 고분에 묻힌 사람과 한반도 이주민과의 밀접한 관계, 혹은 그 피장자가 한반도인 그 자체임을 반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니쟈와센총(新澤千塚) 126호분과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출토품들이 삼국의 그것과 확실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서, 이를 통해 고대 한일교류의 구체적 근거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 니쟈와센총(新澤千塚) 126호분
     1962년 발굴 조사된 니쟈와센총은 한반도계통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으며, 고대 삼국과 관련이 깊은 나라(奈良)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 집단의 무덤군으로 추정된다. 발굴조사기관인 가시하라 고고학연구소는 특히 126호분에서 신라, 가야, 백제계의 특성을 띠고 있는 유리공예품 등의 유물이 출토된 점에 미루어 이 고분을 5세기 후반 삼국출신 귀족의 무덤으로 분류하고 있다.

   . 후지노끼 고분
     나라현 이카루가(班鳩)에 있는 후지노키((藤ノ木)고분은 1985년 최초 발굴 당시부터 한, 일 양국 학자간에 이 고분의 성격을 둘러싸고 활발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후 총 3차에 걸쳐 실시된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안장가리개나 관장식 등의 부장품이 삼국계통의 유물이 확인되어, 피장자가 삼국계통이주민으로 추정되고 있다.

   . 고대 유물
     일본에서 출토되는 고대 유물은 그것의 원류를 추적하면 삼국과 가야에까지 이른다.
   5세기를 전후로 하는 시기에 일본에서 발견된 금속제 유물은 한반도에서 직접 건너간 경우가 대부분이고, 후에 일본에서 금속생산이 시작되면서 한반도 기술의 영향하에 제작된 것이 또한 대부분이다.
   특히 일본에서의 마구(馬具)의 출현은 그 자체가 한반도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물새모양 토기 등과 같은 토기(土器), 관(冠), 갑주(甲冑) 등 거의 대부분의 고대 유물의 양식이 당시 한반도 출토유물과 유사성을 띤다.
   당시의 교통이나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고도의 기술은 간단히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유물과 함께 묻힌 이의 신분은 적어도 한 집단의 우두머리 격이라고 한다면 고대의 한일관계에서 선진기술 전파의 주인공 또는 일본 상층계급의 집단이 어떤 인물들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금제 장신구
     일본의 철기(鐵器) 및 금동제품(金銅製品)의 생산기술은 한반도 이주민들의 새로운 기술에 의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당시 금(金)이 일본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귀걸이 등의 금제품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것을 가져온 경우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 마구(馬具)
     일본에서 마구(馬具)의 등장은 말을 타던 한반도 이주민들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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