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3.06.26 15:44
업데이트 2023.06.26 17:14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타스통신=연합뉴스
24일(현지시간) 러시아의 민간군사기업 바그너그룹이 일으킨 봉기는 하루 만에 끝났지만, 블라디미르 푸틴(70) 러시아 대통령의 장기 집권 가도에 치명타를 안겼다는 외신 분석이 잇따르고 있다. 이에 따라 푸틴 대통령이 내년 대선을 앞두고 모스크바의 충성파 간부들을 계속 유지할지, 대거 물갈이를 통해 분위기 쇄신에 나설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5일 “푸틴 대통령이 며칠 안에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바그너그룹의 표적이 된 세르게이 쇼이구(68) 국방부 장관과 발레리(67) 게라시모프 참모총장의 거취를 결정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두 사람은 지난 24일 반란 사태 이후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반란을 진압해야 할 군의 최고위 당국자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이를 두고 미 뉴욕타임스(NYT)는 “그만큼 당혹스러운 크렘린의 내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앞서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62)은 쇼이구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모스크바의 군부 엘리트들을 공개 저격하며 이들의 경질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이번 사태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은 푸틴 대통령이 그의 오랜 정치적 동맹이자 친구인 쇼이구 장관을 내칠 수 있을 것이란 관측이 제기됐다. 모스크바의 국방 싱크탱크 전략기술 분석센터의 루슬란 푸코프 소장은 “쇼이구와 게라시모프를 제거하는 것이 프리고진과 협상의 일부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와 반대로,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 엘리트층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라도 충성파 유임으로 체제 안정에 무게를 둘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미 랜드연구소의 대라 마시코 선임 정치 연구원은 “쇼이구 등이 업무를 형편없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푸틴은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둘 것이기 때문에 유임할 수 있다고 본다”고 내다봤다. 익명을 요구한 모스크바의 한 관계자도 FT에 “프리고진이 망명 중인 상황에서 푸틴이 충성파를 해고할 이유가 없다”며 “이번 사태의 유일한 승자는 쇼이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2년부터 10년 넘게 최장수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 중인 쇼이구 장관은 푸틴 대통령의 몇 안 되는 친구로 꼽힌다. 쇼이구 장관은 2021년 푸틴 대통령과 단 둘이 시베리아 외딴 산골에서 함께 낚시를 즐기는 모습으로 ‘브로맨스’를 과시하기도 했다. 게라시모프 총장도 2012년 임명, ‘검증된 충성파’로 분류된다.
한편 “쇼이구가 사라졌다”는 서방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지자, 러시아 국방부는 26일 그의 행적을 상세히 공개했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티아 통신에 따르면 쇼이구 국방장관은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군의 전방 지휘소를 방문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쇼이구 장관이 특수 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여하는 러시아 군대에 대한 지원과 인력의 안전한 배치를 위해 관심을 기울였다”고도 했다.
푸틴에 부메랑 된 우크라이나 침공
러시아의 민간준군사조직(PMC) 바그너그룹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 AP=연합뉴스
바그너그룹의 반란은 하루만에 끝났지만 23년을 버텨온 푸틴 대통령의 장기 집권 가도엔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됐다. NYT는 러시아 일간 네자비시마야 가제타의 편집장 콘스탄틴 렘추코프를 인용해 “프리고진 사태는 ‘푸틴이 러시아 엘리트들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게 된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렘추코프는 NYT에 “한 달 전만 해도 푸틴의 내년 대선 출마는 무조건적이며 그의 권리처럼 여겨졌다”면서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더이상 그렇지는 않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러시아는 2020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푸틴 대통령이 2036년까지 두 차례 대통령 임기를 연장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푸틴이 ‘21세기 차르(러시아 황제)’란 별명을 갖게 된 배경이었다.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은 30년을 넘보는 푸틴의 집권 가도에 쐐기를 박는 성격이 컸다. 푸틴 대통령으로선 우크라전이 예상외의 난전을 거듭하는 데다, 대선이 다가오는 시점에서 내부 봉기까지 일어난 셈이라 말 그대로 내우외환을 맞게 됐다.
이를 두고 미 정치전문 매체 포린폴리시(FP)는 “프리고진의 반란은 푸틴 체제 종말의 시작점에 불과하다”며 “푸틴이 더 이상 자신이 만든 무장 갱단을 통제할 수 없게 됐다는 걸 노출하면서 그의 갑옷은 뚫렸다” 평가했다. FP는 “러시아의 누구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진정한 의미를 몰랐다”면서 “푸틴은 러시아의 내부 집결을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제 러시아가 실패한 국가로 보이게 됐다”고 꼬집었다. 반(反)푸틴 성향 러시아 독립언론 메두자도 이번 반란이 푸틴 체제의 취약성을 만천하에 드러냈다면서 “프리고진은 황제(푸틴)가 옷을 입고 있지 않다는 걸 폭로한 인물”이라고 비유했다.
러시아 빈부격차 정조준한 프리고진
총 잡은 푸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이 지난 2021년 국방위원회 확대간부회의를 마치고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과 함께 군수 전시회에 방문해 무기를 살펴보고 있다. [AP=뉴시스]
서방 외신들은 강한 지도자론을 앞세웠던 푸틴의 신화가 정작 내부에서 무너질 수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익명의 친(親)크렘린 인사는 FT에 “이번 사건은 비슷한 불안이 다시 들끓을 경우 국가가 붕괴할 수 있다는 유령을 불러 들였다”고 우려했다.
프리고진이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의 빈부 격차 문제를 정조준했다는 점에서 또 다른 봉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프리고진은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의 엘리트층을 강하게 비판해왔다. “빈자의 아들들은 전장에서 죽어 관에 넣어져 돌아오는 동안, 엘리트층의 아이들은 햇볕 아래 엉덩이를 흔들며 놀고 있다”는 식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프리고진이 24일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한 직후 모스크바 외곽의 부촌인 루블료브카에선 부자들이 개인 화기와 경비를 강화하는 등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졌다고 한다. 비행 항적 사이트에선 러시아의 철강 재벌인 블라디미르 포타닌과 또 다른 억만장자 아카디 로텐베르크 등 몇몇 부호들의 개인 제트기가 모스크바를 떠나는 모습이 포착됐다. 러시아의 한 전직 국방부 장관은 “진정한 충격과 히스테리였다”며 “전직 국방부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해봤는데, 아무도 뭘 할지를 몰랐다”고 가디언에 털어놨다.
러시아의 국영 방송들은 푸틴 대통령의 TV 연설을 제외하고 반란 하루 뒤인 25일까지 예정됐던 예능 프로그램을 내보내는 등, 관련 소식을 거의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25일 모스크바의 시민들도 평소대로 일상을 소화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프리고진의 고향이자 바그너그룹의 본거지가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미묘한 바닥 민심의 변화가 감지됐다고 러시아 영자 매체 모스크바 타임스가 전했다. 자신을 루스탐(37)이라고만 밝힌 한 남성은 매체에 “정부를 전복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개혁은 확실히 필요하다”면서 “국방부에 대한 프리고진의 저항에 공감하고 그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새뮤얼 그린 킹스칼리지 런던의 러시아 연구소장은 트위터에 “이번 일은 러시아의 수천만 식탁에 오르내리며 푸틴이 옳았는지를 토론하게 만들 것”이라며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리더십 교체 가능성도 생기게 됐다”고 말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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