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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문화

代 이어 보존되는 한국 ‘맛의 씨’… ‘K소스’ 간장, 세계가 탐낸다

오승준 기자

입력 2022-08-20 03:00업데이트 2022-08-20 03:06
 
[토요기획]세계인 밥상 노리는 K푸드 씨간장-김치
새로 담근 간장에 씨간장 첨가… 한국만의 독창적 ‘겹장’ 문화
“집안 음식맛 책임지는 한식 정수”… ‘장 담그기문화’ 유네스코유산 신청
콩 발효때 미생물이 효소 분비
전남 담양의 기순도 전통장 명인이 직점 담근 간장.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 맛이 가장 좋은 간장을 엄선해 오래 유지해온 간장이다. 부드럽고 강한 풍미를 내는 씨간장은 진한 흑색을 띠며 ‘맛의 씨’가 되는 역할을 한다. 담양=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1. 미슐랭 1스타를 받은 ‘윤서울’의 김도윤 셰프는 종갓집에서 직접 씨간장을 받아 와 자신의 요리에 쓴다. 씨간장이 입맛을 돋워주고 때로는 초콜릿 향이 나고 단맛 쓴맛 신맛 등 오묘한 맛이 나면서 오감을 만족시켜 준다는 판단에서다. 그는 “씨간장을 죽 무침 조림류 등에 두루 쓴다”며 “씨간장은 오래될수록 특유의 향이 있는데, 보관만 잘하면 쾨쾨한 냄새 없이 오래 쓸 수 있다”고 했다.

#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7년 방한했을 당시 청와대 국빈만찬에 ‘360년 된 씨간장으로 구운 한우갈비구이’가 등장했다. 씨간장은 오래 묵힌 진간장 중에서 맛이 가장 좋은 간장을 엄선해 오랫동안 묵힌 간장을 뜻한다. 부드럽고 강한 풍미와 단맛, 감칠맛을 동시에 내는 씨간장은 진한 흑색을 띠며 깊고 풍미 있는 요리의 ‘맛의 씨’ 역할을 한다. 외신들은 기순도 명인이 담근 이 씨간장에 대해 “미국보다 역사가 오래된 간장이다”라며 큰 관심을 보였다.

간장은 동양문화권에서 널리 사용돼 온 장류이지만 씨간장은 한국만이 가진 고유한 전통간장이다. 종갓집 등에서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씨간장에는 발효 등 과학적 원리를 활용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도 녹아 있다. 올해 3월 정부가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를 신청하면서 씨간장 등 한국 장문화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 K푸드 세계화 속 주목받는 한국 간장

K콘텐츠의 후광을 입은 한국 음식의 세계화 바람을 타고 한국 장류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간장 된장 고추장 등 3개 품목의 수출액은 8237만 달러(약 1072억4000만 원)로 2018년(6043만9000달러)에 비해 약 36% 증가했다. 한식이 해외에서 저변을 넓혀가면서 장류 소비도 자연스레 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장류는 해외 시장에서 이른바 ‘K소스’로 통칭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한식에 광범위하게 쓰이는 간장 수출액도 성장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지난해 간장 수출액은 2018년보다 28.8% 증가했다. 발효로 만들어지는 간장은 단순한 짠맛과는 다른 특유의 감칠맛을 비롯해 단맛, 신맛 등 복합적인 맛을 낸다. 깊은 풍미만큼 종류도 다양하다. 발효 기간에 따라 햇간장부터 청간장(1∼2년), 중간장(3∼4년), 진간장(5년 이상)으로 분류된다.

간장 특성상 발효 시간이 길어질수록 색이 짙어지고 풍미가 깊어진다는 점에서 맑은 국물 요리에는 햇간장을, 나물이나 찌개에는 중간장을 잘 달여서 맑게 거른 후 사용한다. 진한 진간장은 갈비찜, 불고기, 조림류 등에 사용된다. 우춘홍 간장협회 이사장은 “된장은 발효를 시키고 보존을 할 수 있는 기간이 한정적인 것에 비해 간장은 몇백 년간 이어질 수 있는 힘이 있다”며 “간장은 집안의 음식 맛을 책임지는 한식의 정수”라고 말했다.
○ 수백 년 내려온 씨간장의 비밀 ‘겹장’
간장 중에서도 씨간장은 종갓집 등을 통해 대대로 전수돼 내려오면서 우리만의 독창적이고 차별화된 문화가 반영돼 온 음식이다. 한 집안이 소비해도 남을 정도의 간장을 담그는 집은 주로 종갓집 정도뿐이었다. 씨간장 전통 속에는 흥미로운 요소가 많이 숨어 있다.

장독대에 보관된 씨간장은 매년 요리에 쓰이는 데다 점점 자연 증발해도 수백 년간 동나지 않는다. 여기엔 ‘겹장’이란 비밀이 숨어 있다. 겹장이란 새로 담근 간장에 일정량의 씨간장을 첨가해 햇간장의 풍미를 깊게 하거나 기존 씨간장이 줄어들면 새로 담근 햇간장을 섞어 씨간장 양을 보존하는 행위다. 겹장은 콩으로 간장을 빚는 두장 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다.

 
겹장에는 과학적 원리도 숨어 있다. 콩을 발효시키면 자연의 미생물들이 콩을 분해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효소를 분비한다. 우리 전통 간장에서 나타나는 특유의 맛이나 향 역시 미생물이 분비하는 여러 효소 때문이다. 효소는 뜨거운 열을 가해 달이면 사멸하지만 적절한 환경이 되면 발효 미생물이 다시 효소를 분비한다. 씨간장 맛과 향이 풍부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장의 달임 과정이나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에도 끄떡없이 깊은 맛이 유지된다.

메주로 장을 담그면 그 집안의 고유한 균이 간장에 들어간다. 맛이 균일한 공장식 간장과 직접 담근 간장 맛이 다르고 집안별로 간장 맛이 다른 이유다. 겹장을 하면 간장별로 있는 균 중 가장 강하고 건강한 균이 살아남는다.
○ 부르는 게 값, 모든 요리 풍미·감칠맛 더해
오랜 세월 깊은 풍미를 이어가게 해주는 씨간장은 옹기째 훔쳐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부터 높게 평가돼 왔다. 우리 선조들은 장맛이 변했다고 느끼면 손맛이 좋은 집의 씨간장을 조금 얻어다가 섞어 먹었다. 씨간장은 마을 전체의 장맛을 책임져 왔다. 씨간장은 종갓집에서도 한 항아리 정도씩만 보관할 정도로 소량 보관돼 왔기 때문에 부르는 게 값이다.

단순히 오래된 간장이 씨간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간장의 종자가 될 수 있을 만큼 맛있어야 한다. 몇 대를 걸쳐 내려온 수백 년 된 씨간장도 있지만 맛있는 진간장을 골라 옹기에 5년만 숙성시켜도 훌륭한 씨간장이 될 수 있다.

깊은 풍미를 자랑하는 씨간장은 건강에도 유익하다. 숙성될수록 짠맛은 줄어들고 단맛을 비롯해 풍부한 맛을 자아낸다. 특히 양질의 단백질과 풍부한 지방을 함유해 탄수화물 중심의 식사를 보완해준다. 스님들은 천연 소화제처럼 간장을 물에 섞은 간장차를 마신다. 씨간장은 다양한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애피타이저 개념으로 씨간장에 들기름을 섞어 먹으면 양식에서의 발사믹 소스와 올리브오일을 섞은 것 같은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차경희 전주대 한식조리학과 교수는 “씨간장은 짠맛이 덜하고 아미노산과 당이 비교적 많아 감칠맛이 나는 등 풍부한 맛을 자아내는 천연 조미료”라고 강조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