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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국방

[단독] “北공작원들 매주 기밀 보고… 합참·미군 정보 건당 1만5000불 거래”

[주간조선] 북한 정찰총국 前 대좌 충격 증언

이동훈 기자
입력 2022.06.19 05:30
 
지난 6월 13일 주간조선과 인터뷰를 한 전 북한 정찰총국 대좌 김국성(가명)씨.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해 10월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에서 “1990년대 청와대 내 북한 간첩이 암약했다”는 주장을 내놔 파장을 일으킨 전 북한 정찰총국 대좌 김국성(가명)씨가 지난 6월 13일 주간조선과 만나 “구(舊)소련이 해체될 무렵 조선노동당 대외연락부가 사할린에 소련과 합작법인을 세웠고 이를 공작거점으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는 남한 동포들의 고국방문을 이용해 남한 적화를 위한 공작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일본의 조총련계 재일 동포들과 중국의 조선족 동포들을 남한에 간첩으로 침투시킨 사례는 많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까지 남한 적화에 이용했다는 증언이 북한 정보계통에서 30년 가까이 종사했던 고위인사의 입에서 나와 파장이 예상된다. 김씨가 속했던 정찰총국은 형식상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소속이지만, 김정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의 직접 지휘를 받는 독립부서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강점기 때 경상도, 전라도 등 한반도 남부에서 당시 일본령 사할린섬으로 징용됐던 사람과 그 후손들로, 일제 패망 후 사할린섬 전체가 소련에 귀속되면서 신분이 모호해졌다.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일대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과도 별개 집단으로 취급된다. 이에 한·소 수교 등 북방외교를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 때인 1989년부터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을 진행해 경기도 안산과 파주, 김포 등지에 대규모 정착촌을 형성하고 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지금까지 국내로 영주귀국한 사할린 동포만 4400여명에 달한다.

아울러 김씨는 “전두환 정부 때인 1984년 김일성이 남한에 수해지원을 보냈을 때 이를 가지고 남한에 내려온 인원들의 60% 이상이 노동당 대외연락부 및 작전부 산하 대남요원들이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또한 그는 “북한 직파간첩 또는 간접적 방식에 의한 공작으로 한 주일에 한 번씩 이메일을 통해 한국의 기밀정보가 넘어왔다”며 “비무장지대(DMZ) 열영상 카메라 관련 기술자료 일체는 물론 합참(합동참모본부) 핵심 군사자료, 경기도 평택 미군기지 자료를 공작해 북에서 ‘영웅칭호’까지 받은 사람이 있다”고도 밝혔다. 그는 아울러 “김정은이 사용하는 군사용 쌍안경도 미국산 브랜드로, 내가 남한으로부터 중국을 경유해 북한에 들여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김씨는 “김정은은 2003년부터 지도자 수업을 거쳤고 2005년부터는 당 내부행사를 비롯한 김정일 주재 연회 참가를 비롯해 보이지 않는 실질적 지도자였다”며 “2008년 김정일이 뇌졸중으로 뻗은 후부터는 사실상 최고지도자로서 김정은에게 핵심 부문의 결재보고서가 집중됐다”고도 했다. 그는 “당 중앙위 정보기관에서 직접 보좌했던 핵심 일꾼들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라며 “2009년 정찰총국이 조직되고 김정은의 특별 지시에 따라 ‘남조선 정치예속화 전략’이란 제의서를 직접 기안해 김정은에게 올렸고 수표(사인)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언급은 김정은 위원장이 후계자로 낙점된 시기가 2003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여서 관심이 모아진다. 1984년생으로 알려진 김정은이 19살 때로, 당시만 해도 국내 언론은 2017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독살된 김정일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여전히 유력한 후계자로 꼽아왔다. 김정일의 후계지위가 공식확정돼 대외에 공표된 것은 2010년 김정은이 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출되면서다.

1959년 평양 모란봉구역 개선동에서 태어난 김씨는 북한 정보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서는 귀순 인사 중 최고위급이다. 김씨는 평양금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책공업종합대학 전자공학부와 인민경제대학, 이른바 ‘정보일꾼(간첩)’ 양성소인 ‘김정일 정치군사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다. 2014년 남한으로 탈출하기 전까지 노동당 대외연락부 6년, 당 6부(작전부) 10년, 당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 5년, 정찰총국 5년 등 30년 가까이 북한 정보수장들의 비서관 위치에 있었다. 귀순 전까지는 2010년 ‘천안함 폭침’을 지휘했던 김영철 초대 정찰총국장의 전략비서관으로 일했다.

하지만 그는 2013년 12월 김정은 위원장의 고모부이자 ‘친중파’의 대표 격인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이 전격 체포돼 처형된 이듬해인 2014년 중국 근무 중 탈북했다. 그는 “장성택과는 1984년부터 근 30년간 특별관계의 인연”이라며 “장성택 처형 후 나를 잡으려고 체포조를 파견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제3국을 통해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고 했다. 그는 “주중 북한대사관에서는 비공식 인물로 공사의 직분을 가졌고 대사관 당비서, 대사도 나를 보면 인사했다”며 “만약 김영철이 나를 비호하려 했다면 자신의 목이 달아났을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정부 때인 2014년 한국에 정착한 김씨는 정체를 숨긴 채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서 책임연구위원으로 5년간 근무했다. 2021년 10월 BBC와 인터뷰를 시작으로 국내 언론과 간헐적으로 만나온 그는 정권교체 후 주간조선과 처음으로 인터뷰를 가졌다. 그 역시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한국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가진 인터뷰로는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시내 모처에서 2시간가량 진행된 인터뷰에는 경찰청 공안문제연구소와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연구관 출신으로 대공전문가인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이 배석했다.

지난해 10월, 영국 BBC 로라 비커 당시 서울특파원(왼쪽)과 인터뷰한 김국성(가명) 전 북한 정찰총국 대좌. photo BBC

지난해 10월 BBC 로라 비커 전 서울특파원과 인터뷰 때 검은 선글라스로 자신의 눈을 가렸던 그는 이번에는 약간 색이 들어간 시력보호용 안경만 낀 채 기자와 마주 앉았다. 그는 “정찰총국 19과(테러전담)에서 나를 겨냥한 테러공작이 진행 중이라는 정보를 접했다”며 “왜 남한에 살면서까지 북한의 위협을 받아야 하는지”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인터뷰에 배석한 유동열 원장은 “정찰총국 대좌라고 하면 한국군 대령을 떠올리지만, 북한이라는 특유의 체제에서 김 선생이 수행한 직분은 당 중앙위 부부장급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라며 인터뷰 내내 깍듯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김씨는 “나는 대한민국에 지은 죄가 많은 사람”이라며 “테러가 뒤따라올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목숨 내놓고 투쟁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종국적 승리와 자유통일을 위해서”라고도 밝혔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문재인 정부 당시 국정원이 과거 청와대 내 간첩 '박명수'의 존재에 대해 공식 부인했다. "응당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웃음)

- 청와대에 침투한 '박명수'는 왜 움직이지 않았나. "국내외적 환경이 그런 참화를 빚어낼 시기가 아니었다. 북에서 '남조선 해방의 길에 나선다. 작전개시'라고 했을 때 쏘는 것이다. 간첩 하면 다들 넥타이 멘 사람을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다. 내가 냉난방 공조기술자라고 하니까 다들 입을 봉하지 않았나."

- 모 언론과 인터뷰에서 ‘김남희’라는 여간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김남희는 노동당 35호실(대외정보조사부)에서 직파한 공작원이다. 35호실은 칼(KAL,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비롯해 버마 랑군(현 미얀마 양곤) 폭발사건(아웅산 테러) 주관부서다. 김남희는 이제 나이가 60세쯤 됐을 것이다. 북에는 남편과 자식들이 있다. 아들은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 학생이었는데, 노동당 입당을 위해 과외 시간에 평양시 중요 건설에 자발적으로 참가하곤 했다.”

- '김남희'를 직접 관리한 사람이 있나. "김남희의 담당관은 정찰총국 5국 3과 부과장을 맡고 있는 주철문이다. 주철문은 김남희가 2013년 9월에 북한에 복귀했을 때 김일성종합대학 당 비서를 만나 김남희 아들의 입당까지 받아냈다. 북한에서는 '육체적 생명은 버려도 정치적 생명은 영원하다'고 사상교육을 하는데 정보기관 사람들에게 차려지는 '배려'는 최고다. 김남희는 그때 20일가량 북한에 체류하면서 사상교육과 정보실무교육,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서 사격훈련 등 정치사상적 재무장을 하고 그해 9월 말 다시 한국으로 재입국했다."

- ‘김남희’가 아직도 남한에서 활동 중인가. “김남희가 남한에 침투해 공작활동을 한 기간을 현재로 계산해 보면 20년이 넘는다. 이전에 침투했던 여간첩 이선실을 보지 않았나. 최근에 북한 공작원들에게 있어서 남한 사회는 꽃 비단길과 같다.”

- 북에 있을 때 직접 기안한 대남전략이 있나. "2009년도 '남조선 정치예속화 전략'이 내가 직접 기안한 것이다. 70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진행했던 지하공작 토대와 핵무력에 기초해 남조선의 정치예속화를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내가 이 전략을 기안해 김정은에게 올렸고 김정은이 직접 수표(사인)했다. 대단히 만족스럽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금 그 전략 그대로 가고 있다."

- '남조선 정치예속화'의 세부 방안은 무엇인가. "문재인 정부 때 봤듯이 좌파단체가 자유·민주·인권 등을 가지고 투쟁하는 것을 밥 먹듯 하지 않나. 물밑에는 대남기관이 알게 모르게 작동한다. 이것이 바로 정치예속화의 주춧돌이다. 지하공작과 공식적인 통일전선사업의 병행은 정치예속화를 위한 대남전략의 기본이다. 남한 사회의 좌우로 갈라진 이념갈등, 사회갈등, 빈부격차 등은 대남공작의 마르지 않는 샘물의 원천과 같다."

- 남한 시민단체 상당수가 북에 장악됐다는 말을 BBC에서 했다. 같은 맥락인가. "민주조선, 자주시보, 김정은 연구위원회, 주체사상연구위원회 등 우리 동포돕기 운동 및 우리 민족끼리 구호를 내는 수많은 단체들은 북한이 추구하는 대남전략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남한은 집회·시위·결사·표현의 자유를 가진 사회다. 북한 정보기관에는 남조선 법률연구소가 있다. 남한에서 가장 합법적인 대남공작 투쟁방법을 찾고 연구하는 비밀기관이다. 남한 헌법에 딱 맞는 방법을 찾아 공작하고 투쟁하니 남한 정부도 어찌할 수 없다. 자주시보가 싣는 내용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노동신문을 훨씬 능가한다."

 

- 요즘도 여전히 공작원을 남한에 침투시키나. “북한은 남한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사회적 뼈골간을 이미 만들어 놨다. 하부 조직은 물론 국회를 비롯해 정치권, 청와대, 국방부 등 주요 요충기관에 직파간첩, 포섭된 남한 국민들이 들어가 있다. 북한은 이미 2006년 남파 공작원 파견을 일단 중지했다. 더 파견할 가치가 없어서다. 그러다 김정은이 2009년 정찰총국을 조직한 후, 2012년부터 새롭게 대남 공작원 파견을 지시했다. 그해 많은 공작원이 남한에 침투했고, 유엔(UN) 기구에서 활동하던 공작원도 그 당시 남한으로 침투했다.”

- 남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언제 어떻게 전달받나. “한 주일에 한 건씩 한국에서 기밀정보가 이메일로 북한에 넘어온다. 이메일로 전송되는 내용은 절대로 해독 못 한다. 남북한 간에 인터넷이 안 되지만, 중국 통신은 북한 국경지역에서 잘 작동된다. 그 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남한에서 발행되는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 신문을 비롯해 한겨레, 주간조선, 월간조선 등 필요한 모든 출판물들을 무더기로 싹 들여온다. 우리 같은 사람은 보기 싫어서 안 볼 정도다.”

- 주로 무슨 정보를 빼가나. “지난번 특전사 현역 대위가 북한에 기밀정보를 빼주는 것을 보지 않았나. 합참의 핵심 군사자료, 평택 미군기지 관련 자료도 간접적 방법으로 건당 1만2000~1만5000달러로 공작해 북한으로 가져왔다. 그 임무를 수행한 사람이 오극렬(전 국방위 부위원장)의 차남 오세현이다. 오세현은 그 공로로 ‘영웅칭호’를 받았다. 오세현은 내가 당 작전부에 최초 공작기구를 조직하고 공작원으로 추천해 받아들인 공작원이다. 그 외에도 DMZ(비무장지대)에 설치한 남한 군의 열영상 카메라 장비의 기술자료와 장비도 들여왔다. 해상침투를 위한 해안 감시장비에도 큰 신경을 쓴다.”

- 사람이 직접 인편으로 전달하기도 하나.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북한에서 잃은 것도 있지만, 대남공작 측면에서는 유리한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졌다. 중국을 경유해 북한에 들어갈 때는 비공개 입출국증을 여권과 같이 줘서 입출국 도장이 여권에 찍히지 않는다. 그보다 더 비밀스러운 대상은 당 작전부 전투원들의 호위 밑에 입출국을 진행한다. 필요에 따라 북한 체류일정은 20일에서 30일, 특별한 경우는 6개월 이상도 한다."

- 포섭 대상은 어떻게 정하나. "공작에 앞서 사람들을 분류한다. 돈 먹이면 될 놈(사람), 처지를 놓고 말로써 될 놈, 흠을 잡아서 멱을 꿰야 될 놈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북한에 서너 번 드나든 사람은 여성 공작에 넘어간 사람들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목사, 정치인들이다. 해당 처방이 내려와서 벙어리로서 알게 모르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다."

- 간첩교육은 어떻게 시키나. "남한 사람들을 데리고 가 교양(교육)을 하면 어떤 면에서 북한 사람들보다 더 새빨간 사람이 된다. 일생을 자유세상에서 살다 보니 집단주의에 목마른 것 같다. 대부분은 집단주의의 첫 모습을 경험하면서 당의 힘, 국가의 힘, 순결성 등에 휙 하고 가더라. 충성맹세를 하고 그 위치에 따라 김정일, 김정은에게 충성의 편지도 쓰게 한다. 편지 내용은 장군님의 뜻을 받들어 남한의 혁명 전위투사로 조국통일의 그날까지 목숨 바쳐 싸우겠다는 것이다."

- 포섭된 사람 중에 정치권 인사도 있나. "부들부들 떠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BBC에 나간 뒤 민주당의 한 의원이 모 방송에 나와 나보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폄하하면서 인간 모욕을 하더라. 그때 '국회의원이란 사람이 저렇게 몰상식하고 무분별한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 가족 모두 잠을 들 수 없었다. 나는 국정원으로부터 '최고의 정보자산을 가져왔다'고 평가받은 사람이다. 실례로 정치권의 정보요원을 심는다면 우선 국회의원 보좌관부터 흡수하면 된다. 그때부터 국회의원은 알게 모르게 적의 지시를 받아야 한다."

- 북한의 7차 핵실험이 임박했다는데. "김일성이 제시한 국방에서의 자위노선이 바로 첨단화된 핵 억제력을 가지는 것이다. 북한은 그 목표의 최종단계에 있다. 북한의 핵 억제력은 본질에서 김정은 세습체제의 장래를 담보하기 위한 데 있다. 김정은은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북한의 핵무력은 남한의 정치예속화를 무력으로 담보하고, 종국적으로는 적화통일을 위한 최종 병기로 사용할 것이다."

- 북이 실제로 핵을 사용하겠나. "대한민국은 잘 먹고, 잘 입고, 잘 쓰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자유로운 국가다. 잘 먹고 잘살면 생(生)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핵무력 토대 위에서 남한을 때리려고 하면, (남한이) 멍멍 짓다가 살기 위해 결국 머리를 숙이는 것이 정치예속화의 핵심이다. 평화정책은 결국 구걸정책이다. 비핵화 실현을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대국민 사기극이자, 정치인들의 기만술이다. 미국도 못 시키는 비핵화를 어떻게 이룩하나."

- 가장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남한 정권은. "내가 활동하기 전이지만 전두환 때였던 것 같다. 버마 랑군(현 미얀마 양곤) 폭발(아웅산테러)로 시작해, 북으로부터 수해물자도 지원받고, 이산가족 상봉, 칼(KAL,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등 남북관계 종합세트였다. 당시 북의 수해지원 물자를 가져온 60%가 대남기관 요원들이었다. 기본 수행성원 말고 보좌성원들은 기자들까지 기관요원들이었다. 기자들은 '314연락소' 사람들이 위장해서 들어갔다. 내가 보기에 전두환 정부는 냉·온탕을 오가면서도 남북 관계를 유순하게 가져갔던 것 같다. 노태우 때는 북방외교 때문에 상당히 고통스러웠던 것 같다. 북으로서는 가장 치명타였다."

- 노태우 북방외교 때 기억나는 일화는. "동구권이 망했을 때 사할린에 남한 동포들이 많았다. 당시 한 4만명 정도 됐던 것 같다. 북한이 얼마나 집요하냐면, 소련이 넘어졌을 때 우리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때 내가 제일 먼저 사할린에 들어가서 합작회사를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할린 사람들이 남한에 친척 방문한다고 봄에 둑 무너지듯 들어갔다. 그때 성과를 많이 얻었다. 정보가 삼태기째 들어왔다."

- 윤석열 정부는 북의 대남전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대신 한·미 동맹의 강화, 한·중 관계의 발전으로 맞서야 한다. 노동당 전원회의 한다고 김정은 얼굴을 크게 비춰 주면 안 된다. 북한에서도 한때 남한 정치인들의 비리 같은 것들을 노동신문에 냈다가 수년 전부터 싹 없애 버렸다. 남한 자체를 인민들 머릿속에 두지 말라는 얘기다."

- 최근 리선권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최선희가 외무상에 기용됐다. 변화가 있을까. "리선권, 최선희 이름이 나오니까 '대화를 위한 협상용 아니냐'는 군불을 때던데 그게 아니다. 북한은 자본주의 체제처럼 어떤 개인이 장관이 됐다고 시책이 바뀌는 집단이 아니다. 북한에는 당에서 놓아준 길이 있다. 누가 되든 그 길에서 0.01㎜라도 차이가 나면 곧장 목을 잘라 버린다."

- 장성택 전 노동당 행정부장과는 어떤 사이였나. "장성택하고는 1984년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한 30년간 특수관계에 있었다. 장성택 숙청 당시 나는 중국에 나와 있었다. 숙청 후 북한에서 나를 잡으러 체포조가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 정도 되면 정보라인이 있다. 다음날 아침 당장 비행기를 타고 제3국을 거쳐 인천으로 들어왔다."

- 김영철 전 정찰총국장이 당신을 구명해줄 수 없었나. "장성택 숙청은 김정은의 '특명 지령'이다. 김영철은커녕 김영철의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됐을 것이다. 만약 김영철이 나를 비호하려 했다면 자신의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 김정은은 왜 장성택을 숙청했나. "김정은은 백두혈통이 못 된다. 고용희의 아들이다. 고용희는 '귀국자'로, 막말로 일본종(種)이다. 게다가 무용수다. 그래서 자기 어머니 공개를 못 한다. 고용희의 묘가 평양 대성산(혁명열사릉)에 있는데 몇몇 사람들만 군불을 때는 데 그친다. 간부들은 대개 나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김정은은 간부들에 대한 믿음을 못 갖는다."

- 북한에 남은 가족은 없나. "평양에 아들이 남아 있다. 딸과 아내만 데리고 나왔다. 아들은 내가 탈북한 후 정치범수용소에 잡혀갔다고 들었다."

- 아들이 북에 남았는데 두려움이 없나. “우리는 결심하면 목숨을 내놓고 한다. 나를 죽이기 위해 정찰총국 19과(테러전담)에서 이미 동작하고 있고, 좌파단체들과 직파간첩들도 나를 죽이기 위해 줄서서 동작하고 있다. 헛말이 아니다. 내가 구비만 되면 김정은의 실상에 대해 알리고 싶다.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국제무대에서 북한이 저지른 테러, 마약, 위조지폐, 인권유린 등의 실상을 그대로 설명해 북한을 외톨이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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