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재령 출신 청년 송복희는 해주의 음악학교에 다니던 중 6·25를 맞았다. 폭설이 쏟아지던 그해 겨울, 목숨 걸고 피란길에 올랐다. 폭격으로 무너진 철로를 건널 땐 총탄이 날아왔다. 그걸 피하다가 추락했는데 비죽 튀어나온 철근을 붙잡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해주에서 연평도로 나와 유엔군 상륙함을 얻어 타고 남하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 바다 위에서 이름을 송해로 바꿨다.
▶송해는 서울 입정동에서 황해도 출신이 운영하는 냉면집을 즐겨 찾았다. 몇 해 전 그곳에 갔는데, 주인이 “합석해도 되느냐?” 묻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송해였다. 반색하며 “음식 값은 제가 내겠다”고 했더니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짜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베풀기를 좋아했다. 새해가 되면 후배들 불러 밥을 샀다. 송해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주머니 사정을 걱정한다며 후배들이 하는 말이 “100명만 모을까요?”였다. 300명 밥을 산 적도 있다. 장지갑에 5만원권 두둑이 채워두고 세배하러 오는 이들도 맞았다. 너무 몰려와 돈이 떨어지면 “외상이야, 내년에 와!”라며 돈 대신 웃음을 줬다.
▶송해는 라디오 교통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를 진행하던 80년대 말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 사고 후 “자, 오늘도 안전 운전 합시다!”라는 오프닝 멘트가 입 밖에 나오지 않아 방송을 중단했다. 슬픔에 빠져 살던 그에게 배우 안성기의 형인 안인기 PD가 찾아왔다.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기며 “나랑 전국을 떠돌며 바람이나 쐬자”고 했다.
▶방송인 송해가 95년 인생 항해를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그가 건넌 한국 현대사의 바다는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격랑이었다. 전란 속에 고향을 등졌고 부모와 생이별했다. 젊은 시절 가난에 절망해 남산에 올라 투신했다가 소나무에 걸려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남 앞에 드러내 위로를 구하지 않았다. 마이크를 든 송해는 ‘일요일의 남자’로, ‘오빠’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별세를 전하는 기사에 “하늘에선 천국노래자랑 사회를 보시라”는 댓글이 붙었다. 국민 가슴속에 오래 살아 있을 그를 이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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