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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삶

[선데이 칼럼] 민주주의 활성화로 반지성주의 극복해야

[선데이 칼럼] 민주주의 활성화로 반지성주의 극복해야

중앙선데이

입력 2022.05.1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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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식 연설에서 ‘반지성주의’를 시대의 화두로 던졌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문제를 민주주의 위기로 진단하고, 원인으로 반지성주의를 지목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나친 집단 갈등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내용만 보면, 대통령의 반지성주의는 인지과학에서 말하는 ‘우리 편 편향(myside bias)’과 비슷하다. 키스 스타노비치의 『우리 편 편향』(바다출판사 펴냄)에 따르면, 이 편향은 ‘우리 편 중심 사고’에 빠져 우리 편에게 유리한 사실만 받아들이고, 정치적 적들한테서 나온 주장은 무조건 거짓으로 여기는 것으로, 소셜미디어 확산과 정치 팬덤화에 따라 점차 퍼지고 있다.

윤 대통령 취임식 연설서 거론
반지성주의는 ‘우리 편 편향’ 현상
다른 관점서 보는 능력 갖추고
비판과 수정을 시스템화 해야

우리 편 편향은 지성과는 큰 상관이 없다. 흔히 성숙한 인지 능력을 보유한 사람은 편향에서 더 자유롭다 여기지만, 고도의 지적 훈련을 받은 사람들도 창조과학을 믿는 등 우리 편 편향에서만큼은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에서 벗어나면 배척당하고 공격당할까 하는 두려움 탓이다.

선데이 칼럼 5/14

인간은 소속된 집단의 신념이 다르면 같은 사실도 달리 본다. 인간은 사실에 따라 신념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신념에 맞추어 사실을 모으기 때문이다.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 확고한 신념은 때로 행동에 강한 추진력을 부여하나, 사실과 멀어진 낡은 신념에 사로잡히면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한때 번영했던 수많은 문명이 변화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몰락했듯, 어긋난 신념을 고수하는 이들은 현실 부정에 빠져 결국 도태될 뿐이다. 정치 역시 마찬가지다. 공공 정책은 지배 세력의 신념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실제로 참인 것에 바탕을 두었을 때 구성원들을 잘살게 만든다.

 

반지성주의는 우리 편 편향과 관련 있으나, 완전히 같은 현상은 아니다. 이 말은 ‘지성’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지성주의’에 반대하는 태도다. 『미국의 반지성주의』(교유서가 펴냄)에서 처음 이 용어를 사용한 리처드 호프스태더에 따르면, 반지성주의는 “지성이나 지식인에 대한 순수한 혐오”나 “정신적 삶의 가치를 얕보려는 경향”을 뜻한다. 그는 전문가를 혐오하고 아마추어를 옹호하는 것, 쓸모를 모르겠다면서 순수과학을 멸시하는 것, 대학이나 연구소 등의 지적 독립성을 비난하는 것, 전위적 예술 사조를 무시하는 것, 과학보다 종교를 우위에 놓는 것 등을 예로 들었다.

이들은 모두 극단적 반공주의에 사로잡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부정하고, 자신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감시하고 색출하고 몰아내고 탄압했던 매카시즘의 주요 특징이었다. 매카시는 “비판적 지성을 처참할 정도로 경시”하고, 지식 문화 자체를 공격함으로써 미국 사회에서 다양성을 증발시키고 관용과 자유를 뿌리째 빼앗았다. 지식인들이 지성을 빌미로 권력과 결탁해 정치에서 보통 시민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약자의 고통을 외면한 채 헛된 이념 논쟁만 반복할 때 반지성주의가 활개를 친다.

모리모토 안리의 『반지성주의』(세종서적 펴냄)에 따르면, 반지성주의엔 “자기성찰을 잃은 지성에 대한 반대, 지성과 권력의 유착에 대한 감시와 견제” 등 긍정적 기능도 있다. 그러나 기독교 근본주의가 반공주의와 결합한 1950년대 매카시즘, 극우 보수주의와 결합한 2010년대 트럼피즘 시대엔 “명료하게 선악을 나누는 도덕주의, 생경하고 거만한 사명 의식, 체험을 우선하는 행동주의, 노골적인 실리 지향, 성공과 번영에 대한 자화자찬” 등 부정성이 압도했다. 진화론과 낙태에 대한 거부, 긍정의 힘에 대한 무한 강조, 자기 계발 열풍, 자유 지상주의와 냉전적 사고, 정의의 전쟁을 실현하려는 군사 외교정책 등은 그 산물이다.

『반지성주의를 말하다』(이마 펴냄)에서 우치다 다쓰루는 “반지성주의를 움직이는 힘이 단순한 게으름이나 무지가 아니라 외곬의 지적 정열”로, “네가 동의하든 말든 내 말의 진리성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태도라고 말한다. 반지성주의자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지금, 여기, 나’만을 고집한 채 변화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지성이란,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여기가 아닌 장소로, 알지 못하는 자기의 바깥, 저 저편으로 향하는 정신적 운동이다.

우리 편 편향을 극복하고 반지성주의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스타노비치에 따르면,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는 ‘인지적 분리’를 실천함으로써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을 갖춰야 우리 편 편향을 이겨낼 수 있다. 한마디로, 적대적 의견을 수용해 자신을 바꾸는 실천을 생활화해야 한다. 호프스태더의 반지성주의 해결책도 비슷하다. 열린 태도로, 솔직히 의견을 주고받는 논쟁과 토론을 활성화하고 이를 위한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학자 사회처럼 견제와 균형, 비판과 수정을 시스템화해야 한다. 정치에선 민주주의가 이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 편 편향에 빠져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을 때 반지성주의가 나타난다. 대통령이 시대의 과제로 삼았으니, 이번 정부에선 숙고와 경청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활성화함으로써 이 땅의 반지성주의를 척결했으면 좋겠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