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유 게시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 안보 각성에 불 댕겼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 안보 각성에 불 댕겼다

입력 2022-04-24 10:19업데이트 2022-04-24 10:31
 
폴란드·독일 필두로 군비 증강 적극 나서
폴란드, 독일 등 유럽 각국이 구입 계약을 맺은 미국 F-35A 스텔스 전투기. USAF
폴란드는 러시아의 전신인 옛 소련과 악연 관계였다. 18세기 말부터 제정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3국에 123년간 지배를 당하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립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직전 또다시 소련과 나치 독일의 공격으로 분할됐다. 소련과 나치 독일은 1939년 6월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면서 폴란드와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 3국을 각각 분할 통치한다는 비밀의정서를 맺었다. 나치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서부를, 소련은 2주 후 폴란드 동부를 침략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은 비밀경찰을 동원해 1940년 4월, 포로로 잡은 폴란드군 장교와 경찰, 대학교수 등 2만2000여 명을 서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서 비밀리에 처형하고 시체를 암매장했다. 당시 비밀문서에 따르면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폴란드가 다시는 독립하지 못하도록 폴란드 엘리트의 씨를 말려야 한다”며 비밀경찰에 폴란드 주요 인사들을 살해할 것을 지시했다. 이른바 ‘카틴 숲 학살’ 사건이다.

스탈린 “폴란드 엘리트의 씨를 말려야 한다”

에스토니아 병사들이 미국산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을 시험발사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국방부
폴란드 저항 세력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8월 수도 바르샤바에서 나치 독일 점령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였다. ‘바르샤바 봉기’였다. 당시 소련군은 바르샤바 인근까지 진출했지만 폴란드 저항 세력을 지원하지 않았다. 폴란드에 공산 정권을 세울 속셈으로 수수방관한 것이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의 무자비한 보복으로 폴란드인 20만 명이 학살당하고 바르샤바는 잿더미가 됐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바르샤바에 해방군으로 입성했으며, 1947년 폴란드에 공산 정권을 세우고 사실상 간접적으로 통치를 시작했다. 폴란드가 냉전 시기 소련이 지배하던 동구권에서 공산당 일당 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벌인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국가 가운데 우크라이나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나라는 폴란드다. 폴란드는 각종 무기를 비롯해 보급품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고, 난민 270만여 명도 수용하고 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3월 15일 세계 지도자 중 처음으로 포탄을 뚫고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방문해 강한 연대감을 보여줬다. 폴란드의 이런 행보는 두 번이나 나라가 쪼개지고 두 차례나 집단학살을 당하는 등 깊은 상처를 입은 과거 악몽 때문이다.

 
폴란드는 남동쪽으로 우크라이나와 500㎞, 북쪽으로는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에 위치한 러시아 역외 영토 칼리닌그라드와 230㎞에 이르는 국경을 접하고 있다. 폴란드는 1991년 소련 붕괴 후 친서방 노선을 확고하게 견지하며 1999년 옛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으로선 최초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가입했다. 특히 폴란드는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인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기지 건설을 승인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폴란드 기지에 첨단 미사일 추적 레이더와 요격미사일을 배치했다. 폴란드 기지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로부터 1300㎞ 떨어져 있다. 또한 폴란드는 2025년까지 PAC-3 MSE 8개 포대를 실전 배치할 예정이다.

폴란드가 도입하는 미국의 M1A2 SEPv3 에이브람스 탱크. US Army
현재 폴란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이어 다음 목표를 자국으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해 미국으로부터 각종 무기를 구입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 쏟고 있다. 스와보미르 얀 뎅브스키 폴란드 국제문제연구소 소장은 “폴란드는 러시아와 물리적 대결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잘 알고 있다”면서 군 전력 증강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폴란드는 4월 5일 미국과 47억5000만 달러(약 5조8680억 원) 규모의 M1A2 SEPv3 에이브람스 탱크 250대 등 구매 계약에 서명했다. 마리우시 블라슈차크 폴란드 국방장관은 “이번 탱크 구매는 폴란드를 위한 가장 중요한 방위 계약”이라고 강조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3월 26일 바르샤바를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F-35A 스텔스 전투기 등을 조속히 공급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2020년 미국과 46억 달러(약 5조6810억 원) 규모의 F-35A 전투기 32대 구매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미국이 F-35A를 신속하게 공급할 경우 폴란드는 과거 소련의 위성 국가였던 중·동유럽 국가 가운데 첫 F-35A 보유국이 된다.

폴란드와 독일, 전력 강화에 가장 적극적

특히 주목할 점은 폴란드가 미국에 전술핵 배치를 제의했다는 점이다. F-35A는 유사시 미국 전술핵을 운반하는 나토의 핵 공유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미국은 나토 30개 회원국 가운데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터키 등 5개국에 B-61 전술 핵폭탄 100개를 배치하고 있다. 미국은 2020년 F-35A에 탑재한 B61-12 개량형 저위력 전술 핵폭탄의 적합성 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최대 50kt의 폭발력을 가진 B61-12는 미국이 핵무기 현대화 계획의 핵심 목표 중 하나로 삼아 양산 중인 핵무기다. 만약 폴란드가 미국과 핵 공유 협정을 체결한다면 엄청난 전력 증강이 될 뿐 아니라, 러시아의 침공 위협에 대한 억지력도 갖추게 된다. 폴란드는 내년부터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에서 3%로 늘릴 계획이다.

 
폴란드가 중·동유럽 국가 가운데 전력 강화에 가장 적극적이라면 서유럽에선 독일이 앞장서고 있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전범 국가’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재무장에 나서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 전체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국방예산 대폭 증액 등 독일 안보 정책을 바꾸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연방방위군 현대화를 위해 올해 특별예산 1000억 유로(약 133조6150억 원)를 추가하고, 연간 국방예산을 GDP의 1.4%에서 2%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특히 독일의 전력 강화 계획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스텔스 전투기와 공격용 드론,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도입이다. 독일은 미국으로부터 F-35A 35대, 이스라엘로부터 1억5260만 유로(약 2038억 원) 규모의 무장 드론인 헤론 TP 140기를 구입할 예정이다.

독일이 구매 계약을 체결한 이스라엘의 애로우-3 요격미사일. 이스라엘 국방부
독일이 도입하려는 사드는 이스라엘이 미국과 공동개발한 애로우-3다. 이스라엘의 미사일방어망에서 최상층을 맡고 있는 애로우-3는 2단 고체 추진 로켓과 독자적으로 개발한 킬 비히클(Kill Vehicle)을 사용한다. 독일이 애로우-3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러시아의 위협 때문이다. 러시아는 칼리닌그라드에 핵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사거리 500㎞의 이스칸데르-M 탄도미사일을 배치했다. 독일 수도 베를린은 칼리닌그라드에서 500㎞ 떨어져 있다. 독일은 또 이스라엘로부터 슈퍼 그린파인 레이더를 구입해 3곳에 설치할 예정이다. 독일 공군이 담당할 레이더는 24시간 작동하고, 탐지 정보는 독일 서부 위뎀의 국가 지휘소로 전달된다. 독일은 이르면 2025년부터 애로우-3 포대를 운용할 계획이다.

무기 구입 증가로 美 방산업체 재고 바닥

벨기에, 이탈리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노르웨이 등 유럽 각국도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하고 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나토의 모든 회원국이 국방예산을 미국이 제시한 GDP의 2%로 늘릴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미국을 제외한 나토의 모든 회원국이 GDP의 2%를 국방예산으로 하면 연간 전체 국방예산은 총 4000억 달러(약 494조 원)나 된다. 말 그대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유럽의 군비 증강을 촉발한 셈이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우리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에 투자할 필요성을 깨달았다”고 강조한 바 있으며, 마라 칼린 미국 국방부 정책부차관도 “러시아의 침략으로 영토 보전을 위협받는 유럽 동맹국들이 국방비를 2배로 늘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럽 각국은 늘어난 국방예산으로 무기 구입에 적극 나서고 있다. 특히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군을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면서 미국의 지대공미사일 스팅어와 대전차 미사일 재블린을 구매하겠다는 중·동유럽 국가가 줄을 서고 있다. 재블린의 경우 미국 방산업체 록히드마틴과 레이시언의 재고가 바닥날 정도다. 또 미국 F-35A 전투기, 드론, 전차 등과 이스라엘 지대공미사일, MD체제도 인기 품목이다. 미국 국방부는 특별전담팀까지 만들어 유럽 각국의 무기 구입 요청을 지원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국 방산업체들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 미국과 군사 협력 관계를 강화해 안보를 보장받으려는 중·동유럽 국가들과 안보를 소홀히 해왔던 서유럽 국가들의 군비 증강에 따라 미국산 무기 구입이 크게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방산업체 주가는 2008년 러시아의 조지아 침공, 2014년 크림반도(크름반도) 강제병합 당시에도 상승한 바 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336호에 실렸습니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