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실종 미스터리...전남·경남 벌통 11만개가 텅텅
다른 농업까지 타격
“꿀벌이 없으면 농작물 40%가 사라진다”
원인불명… 전국 양봉 농가 조사
지난 19일 오전 경남 창녕군 고암면의 한 양봉 농가. 이곳에서 벌을 기르는 노천식(65)씨가 벌통을 열자 겨울잠을 자고 있어야 할 꿀벌들은 온데간데없이 빈 벌집만 덩그러니 있었다. 벌통 하나당 벌집이 10개 정도 있는데, 노씨 농가 벌통 안 벌집엔 먹다 남은 먹이와 얼어 죽은 꿀벌 몇 마리만 보일 뿐 일벌부터 여왕벌까지 대부분 사라졌다. 이곳 농가 벌통 약 500개 모두 같은 상황이었다. 노씨는 “지난달 월동 중인 벌을 깨워 사료(화분떡)를 주기 위해 벌통을 열었더니, 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30년 넘게 양봉업을 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했다.
최근 경남 등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양봉 농가의 벌들이 사라지거나 죽은 채 발견되는 현상이 잇따르고 있다. 농촌진흥청 등 관련 기관들이 현장 조사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꿀벌은 식물의 꽃가루받이(수분·受粉)를 해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꿀벌이 줄어들면 주변 농작물과 식물 생장에 영향을 미쳐 추가 피해 가능성도 있다. 꿀벌이 생태계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꿀벌 감소가 생태계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꿀벌이 사라지는 피해는 경남과 전남 지역 벌통 약 11만개에서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경남도에 따르면 지난 1월 말부터 2월 초까지 약 2주간 18개 시·군 양봉 농가로부터 피해 신고를 받은 결과 321개 농가 벌통 3만8433개에서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 지역 전체 벌통 34만6477개 중 11.1%가 피해를 입은 것이다. 평균적으로 벌통 1개에는 약 2만 마리의 꿀벌이 산다. 한국양봉협회 전남지회가 지난달 27일 자체 조사한 결과 전남에서도 826농가 7만1655개의 벌통에서 피해가 발생했다.
양봉 농가가 입은 피해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겨울철 꿀벌은 벌통 안에서 월동하는데, 1월에 잠자던 벌을 깨워 먹이를 주며 본격적인 양봉 준비를 하는 ‘봄벌 깨우기’ 과정에서 꿀벌이 사라진 것이 확인됐다. 한국양봉협회는 농촌진흥청과 농림축산검역본부 등 관련 기관에 원인 조사가 필요하다고 요청했고, 지난달 7일부터 27일까지 전남과 경남 등 남부 지방에 대한 현지 합동 조사가 이뤄졌다. 양봉협회에 따르면 국내 양봉 농가는 2020년 12월 기준 2만7000여 곳이다. 이들 농가에선 약 270만 개 벌통에서 벌을 사육하고 꿀을 생산하고 있다.
벌들의 실종 이유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농업과학원 양봉생태과 관계자는 “봉군(蜂群·벌 무리) 관리 기술 부족, 이상기후, 병해충 피해, 약제 과다 사용 등 다양한 원인을 놓고 분석 중”이라며 “바이러스 등 질병 피해 여부는 농림축산검역본부에서 조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진청 등은 피해가 집중된 남부 지방뿐만 아니라 전국 양봉 농가로 조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21일부터 충남·북, 경기·강원, 경북 등 3개 권역으로 나눠 현장 조사가 진행된다. 조사 결과는 3월은 돼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윤화현 한국양봉협회 회장은 “2006년 미국에서 처음 보고된 벌 군집(群集) 붕괴 현상(CCD·Colony Collapse Disorder)과 같은 상황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고 했다. CCD는 꿀을 채집하러 나간 일벌들이 어떤 이유로 벌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아 유충이 집단 폐사하는 현상을 말한다. 바이러스·농약·기상 악화·살충제·전자파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거론되지만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꿀벌의 감소는 생태계를 위협할 수도 있다. 꿀벌은 꿀을 찾아 이 꽃 저 꽃을 옮겨다니며 자연스럽게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전달하며 식물의 수분(受粉)을 해준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100대 작물 중 약 71%가 꿀벌을 매개로 수분한다고 한다. 꿀벌이 사라지면 과일과 채소 등 농작물 생장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지난 2015년 하버드 공중보건대 연구팀은 꿀벌이 사라질 경우 과일·채소 등 생산량이 감소하고 이에 따른 식량난과 영양 부족으로 한 해 142만명 이상이 사망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UN은 2017년 꿀벌을 보존하자는 의미로 매년 5월 20일을 ‘세계 벌의 날’로 지정했다.
정철의 국립안동대학교 식물의학과 교수는 “꿀벌은 식물 번식과 자연 생태계를 유지해주는 생태계 조절 서비스 역할을 한다”며 “연구 결과 과일·채소 등 우리나라 농작물을 생산하는 데 꿀벌이 미치는 공익적·경제적 가치만 약 6조원에 달한다. 꿀벌이 멸종할 경우 우리나라 농산물 생산량의 39% 이상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했다. 윤화현 한국양봉협회 회장은 “이번 벌 실종 현상을 단순히 양봉 업계 피해로 보면 안 되고, 정부·지자체 차원의 조사와 지원 등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창녕=김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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