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중기 화가 탄은 이정 이름 새겨진 거문고…47년만에 다시 세상에 나와
묵죽화(수묵으로 그린 대나무 그림)의 대가 탄은 이정(灘隱 李霆, 1554~1626)의 호와 제작시기가 새겨진 거문고가 공개됐다. 거문고 그림과 글씨도 이정 것으로 보인다는 ‘육안 감정’ 결과도 나왔다. 거문고 유래를 담은 문서와 1950년대 말, 1970년대 중반 언론 보도들도 확인했다. 나무 조직 검사 등 과학 검증을 거쳐야 하는 단계만 남았다.
탄은은 세종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으로 석양군(石陽君)에 봉해진 인물이다. 유덕장, 신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 화가로 꼽힌다.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중국미술연구소 소장 전윤수는 최근 이 거문고를 경향신문에 공개했다. 길이는 161㎝, 너비는 20.2㎝, 높이는 14.5㎝이다. 재질은 오동나무다. 거문고 몸통 판엔 ‘萬曆丁巳秋 灘隱(만력정사추 탄은)’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있다. 만력은 중국 명나라 신종의 연호(1573~1620)로 조선에선 선조와 광해군이 사용했다. ‘정사추’는 정사년인 1617년(광해군 9) 가을을 뜻한다.
거문고 몸통 왼쪽이 대나무 그림, 오른쪽이 매화 그림이다. 오른쪽 상단에 ‘萬曆丁巳秋 灘隱(만력정사추 탄은)’이라는 명문(銘文)이 보인다. 김종목 기자
탄은 이정, 대나무, 견 섬유, 119.1x가로 57.3㎝, 1622년. 국립중앙박물관은 “이 그림의 오른쪽 아래 부분에 ‘천계 임술년 봄에 탄은이 월선정에서 그렸다(天啓壬戌春灘隱寫干月先亭)’라는 글이 적혀 있어 1622년 봄에 이정이 그린 그림임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비가 내려 촉촉이 젖어 있는 대나무를 표현한 ‘우죽도(雨竹圖)’로 속세의 티를 씻어낸 맑은 대나무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우죽은 일반적으로 이단 구성으로 그려지는데, 앞쪽에는 비에 흠뻑 젖어 있는 대나무를 그리고 뒤쪽에는 짙은 안개에 휩싸여 흐릿하게 보이는 대나무를 그린다. 이 그림에서도 앞쪽의 대나무 잎은 빗물을 머금어 처져 있다. 그러나 힘이 없이 처져 있다기 보다는 생생함과 탄력은 여전하다. 뒤쪽의 안개 속에 옅게 비쳐 보이는 대나무는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썼다.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몸통 판에 사군자 중 매화와 대나무 그림도 각인됐다. 전윤수는 “이정이 판에 호를 쓰고, 그림을 그린 뒤에 거문고 제작자가 음각한 듯하다”고 말했다. 전 소장은 “거문고 상단과 중간 부분에 부착된 옥장식과 공명판이 바닥에 닿지 않게 하기 위해 거문고 측면 부분에 덧댄 나무 조각(雲足, 운족)도 정교하게 조각·세공했다. 한눈에 보아도 상당한 고급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거문고에 부착된 옥장식. 김종목 기자
조선 회화 전문가인 이화여대 명예교수인 홍선표는 이 거문고 실물을 육안으로 확인했다. 그는 기자와 통화하며 “거문고에 새겨진 매화와 대나무 그림은 이정의 것과 양식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그림만 놓고 보면 이정의 것이 거의 틀림 없다”고 말했다. 홍선표는 “단, 18~19세기 누군가가 이정의 그림과 글씨를 새겨넣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 나무가 17세기 것인지 과학 검증을 거쳐야 한다. 나무 연대만 최종 확인하면 상당한 문화 유산”이라고 했다.
홍선표는 국보나 보물로 문화재에 등급을 매겨 국가가 관리하는 체계 자체를 비판해왔다. 다만 그는 “이 거문고가 당시 것으로 최종 판명되면, 대중적으로 알기 쉽게 말하면 ‘보물급’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악기장인 고흥곤은 그간 여러 문화재 감정에 참여했다. 고흥곤도 이 거문고를 육안 감정했다. 그는 기자와 통화하며 “아주 오래된 게 맞다. 육안 감정으로 볼 때 최소 300년 이상은 됐다. 그 당시 거문고라고 90% 이상 확신한다. (흉내 내기 힘든) 손때나 기술이 남았다”고 말했다. 고흥곤도 “나무 조직 검사 등 과학적 검증은 한 번 더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거문고엔 ‘自辜孫拱(자고손공)’의 전서체 명문도 있다. 전윤수는 “이 거문고 제작자가 원나라의 유명한 악기공예가 손공보다 자신의 솜씨가 못하다는, 겸손의 뜻으로 새긴 글씨같다”고 말했다.
거문고에서 파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전윤수는 “17세기 거문고 중 이처럼 온전한 형태로 전해진 건 드물다”고 말했다. 이 거문고와 똑같은 크기·형태의 거문고도 함께 나왔다. 전윤수는 “거문고에 국립국악원 전신인 ‘이왕직(李王職) 아악대(雅樂隊)’라는 글씨를 새긴 것으로 보아 후대 어느 제작자가 이정의 거문고를 그대로 모방한 것 같다. 그 정도로 이정 거문고의 가치가 큰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미술연구소 소장 전윤수가 탄은 이정의 호(灘隱)가 새겨진 거문고(왼쪽)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 아래 놓여진 게 모방 거문고(오른쪽)다. 이 거문고엔 국립국악원 전신인 ‘이왕직(李王職) 아악대(雅樂隊)’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김종목 기자
전윤수는 국악계 거목이자 서울대 음대 교수였던 고 이혜구가 거문고 유래를 적은 문헌도 공개했다. 이혜구는 탄은 이정을 두고 “시서화 삼절 특히 죽화로 이름을 날리(었고)” “임란(임진왜란) 때 오른팔이 상처를 입어 한 때 그림 중단. 치료 후 더욱 화필이 능란해졌음”이라고 적었다.
이혜구는 흥선대원군이 이 거문고를 설경패에게 하사했고, 대원군 사랑에서 사용됐다고 기록했다. 설경패는 노래와 가사에 능했던 기생이다.
기록은 이어진다. 설경패는 이왕직 아악부의 악사장 함화진(1884~1948)과 악사 이수경의 끈질긴 권유로 이 거문고를 넘겼다. 함화진을 통해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일가 동생인 성악가 전형철에게 팔렸다. 이때 탄은의 호를 확인했다. 전형철은 당시 음악 박물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각종 악기와 악보를 수집했다. 이 거문고를 입수한 뒤 함화진, 이수경, 이혜구와 근대 전통무악의 거장 한성준을 명월관으로 초대해 자축연을 베풀었다.
이혜구가 거문고 유래 등을 적은 글. 중국미술연구소 제공
전형철의 수집품들은 해방 뒤 사업 실패 때문에 경매에 넘어갔다. 이 거문고는 함화진에게 빌려준 상태라 팔리지 않았다. 함화진이 약값 대가로 친우 현철에게 거문고를 넘겼고, 현철의 아들 현종건이 아버지 작고 후 보관했다.
1973년 6월12일 작성한 이 기록에서 이혜구는 현종건 앞으로 거문고를 팔게 될 경우 (서울대) 음악대학에서 구매하고 싶으니 통지해달라고 적었다.
이 기록에는 오류도 있다. 이정의 생몰연대는 1554~1626년인데, “임진왜란 전에 별세했다”고 돼 있다. 임진왜란은 1592~1598년이다.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생 설경패는 대원군이 죽던 해(1898년) 네 살이었다. 당대 최고 권력자와 이름 날리던 기생에 관한 각각의 이야기를 뒤섞어 만든 허구가 전해진 듯하다.
이혜구가 기록한 이 거문고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언론 보도도 2건 확인했다. 조선일보는 1959년 5월4일자에 ‘비고를 열고(4) 현철씨의 거문고’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중앙일보는 1975년 6월3일자에 “이 거문고는 재미 음악가 현종건씨가 소장했던 것으로 문화재관리국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하거나 이를 구입하여 민속박물관에 보존할 방침으로 전해진다”고 썼다.
조선일보 1959년 5월4일자 ‘비고를 열고(4) 현철씨의 거문고’.
이후 거문고에 관한 기록은 찾기 힘들다. 행방이 묘연하다가 47년 만에 존재가 확인된 것이다.
전윤수는 현재의 개인 소장자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 거문고를 구했는지 밝히지 않았다. 그는 “개인 소장자가 국악 관련 박물관에서 이 거문고를 전시하고, 문화재 심의 지정 신청을 하려고 실물 공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미술연구소 소장 전윤수가 탄은 이정 호가 새겨진 거문고 특징과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김종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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