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낮에 운 닭에 화들짝...서산대사는 왜 '西山대사'일까 [백성호의 한줄명상]
입력 2021.12.29 05:00
업데이트 2021.12.29 10:27
백성호의 현문우답
구독“팔만대장경이 본시 하나의 빈 종이”
#풍경1
‘국내 최고의 학승’으로 불리던 지관 스님(전 조계종 총무원장)이
북한의 산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금강산을 최고로 친다. 그런데 나는 묘향산의 경치가 참 좋더라.”
묘향산은 평안북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려시대 때 창건한 천년고찰인 보현사가 묘향산에 있습니다.
우리나라 5대 사찰 중 하나로 꼽히는 명찰입니다.
묘향산은 평양에서 그리 멀지도 않고, 산세가 무척 빼어납니다.
묘향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비로봉입니다.
높이가 1909m에 달합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고 있는 서산 대사. 선조는 서산 대사에게 팔도십륙종도총섭을 맡겼다. 왜군이 물러가고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올 때 서산 대사와 승병들이 어가를 호위했다.
묘향산은 서북지방의 명산으로 꼽혔습니다.
그래서 예부터 묘향산을 ‘서산(西山)’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아는 서산 대사(1520~1604)의 ‘서산’도 여기서 온 명칭입니다.
#풍경2
“서산 대사”하면 우리는 대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장으로만 기억합니다.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궁궐을 버리고 한양을 떠났습니다.
다급한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람을 보내
서산 대사에게 팔도십륙종도총섭을 맡겼습니다.
조선팔도 전체의 승병장을 뜻합니다.
묘향산에 있는 천년고찰인 보현사. 보현사는 968년 고려 광종 19년에 창건됐다. [중앙포토]
서산 대사는 전국의 승려에게 전문을 띄워
총궐기를 호소했습니다.
승가의 조직 체계는 평소에도 상명하복입니다.
덕분에 일사불란한 군사 조직으로
빠르게 전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조직 구축과 정비에 시간이 필요한 의병과는 차이가 납니다.
게다가 승려는 전국의 지리와 산세를 꿰뚫고 있고,
험준한 산행에도 능하다는 강점이 있었습니다.
서산 대사는 임진왜란 때 갖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의 제자인 사명당 유정도 혁혁한 공을 올렸습니다.
서산 대사는 전쟁이 끝난 후에 직책을 내려놓고
아무런 미련 없이 다시 묘향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렇게 ‘승병장 서산 대사’에는 아주 익숙합니다.
그렇지만 불가(佛家)의 수행자인 선사(禪師)로서
서산 대사는 상당히 낯선 게 사실입니다.
서산 대사의 친필이 담긴 유품이다. 자유롭고 호방한 필체가 눈에 띈다. [중앙포토]
한국 불교사에서 세 개의 높다란 봉우리를 꼽으라면,
신라 시대의 원효 대사, 고려 시대의 보조 지눌 국사
그리고 조선 시대의 청허 서산 대사를 꼽기도 합니다.
그만큼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서산 대사의 안목과 견처(見處)는 굉장했습니다.
#풍경3
서산 대사의 유년은 힘겨웠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갑이었습니다.
부모님이 50살 무렵에 낳은 아들입니다.
어렸을 때 집에서는 ‘운학(雲鶴)’이라고 불렀습니다.
지나가던 스님이 어린 아이가 범상치 않다며 지어준
이름이었습니다.
평안북도 묘향산은 1909m에 달한다. 정상에서 바라본 묘향산의 설경이 무척 아름답다. [중앙포토]
운학이 9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이듬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조선시대는 지금에 비해 평균 수명이 짧았습니다.
태종은 56세, 세종은 54세, 숙종은 60세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니 60세 환갑이었던 운학의 부모님도
당시로선 노령이었습니다.
조실부모하자 가세는 기울었습니다.
삼촌이 있었지만, 운학의 양육을 맡지는 않았습니다.
어린 나이의 운학이 마주했을
삶과 죽음, 그리고 외로움의 무게가
작지 않았겠지요.
마침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와 있던 이사증(李思曾)이
하루 아침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운학을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처소로 불렀습니다.
묘향산 초입에 있는 고려시대 고찰인 보현사. 고려의 석탑이 무척 아름답다. [중앙포토]
이사증은 소년이 예사롭지 않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소년에게 ‘비낄 사(斜)’와 ‘꽃 화(花)’,
두 글자를 운으로 띄웠습니다.
즉석에서 소년은 시를 지었습니다.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비끼니(香留高閣日初斜)
온누리를 덮은 눈이 꽃처럼 곱구나(千里江山雪若花)”
강과 산에 가득한 흰 구름을
꽃에 비유한 운학의 상상력이 참 놀랍습니다.
천리강산에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풍경은
생각만해도 한 폭의 그림입니다.
남다른 그릇을 알아본 이사증은
운학을 자신의 양아들로 맞았습니다.
덕분에 운학은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묘향산에 있는 무릉폭포. 평양에서도 가깝고 산세도 무척 아름다워 북한에서도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힌다. [중앙포토]
서산 대사의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을 읽어보면
명징한 문장력과 적확한 표현력에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운학은 이미 유가의 성리학과 한학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었습니다.
#풍경4
15살 때 진사시에 낙방한 운학은 낙담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운학은 삼남지방의 산과 절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 스님을 만납니다.
그 스님은 운학에게 “심공급제(心空及第)를 해보라”고 합니다.
운학은 스님에게 “심공급제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대답 대신 스님은 눈을 한 번 꿈뻑(瞬目)하며 “알겠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운학은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좇던 운학에게
‘심공급제’라는 말은 충격적이지 않았을까요.
부와 명예, 권력과 가문을 위한 과거시험 급제는 알았지만,
마음이 공함을 깨치는 심공급제는 처음 들었을 테니까요.
묘향산에 있는 금강굴이다. 서산대사의 아호를 딴 청허 방장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중앙포토]
그 스님은 불교의 여러 경전을 소개하며
“부지런히 읽고 생각하다 보면 문(門)에 다가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길로 운학은 지리산의 부용 영관 대사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행자가 됐습니다.
그렇게 6년간 행자 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비구계와 함께 휴정(休靜)이란 법명을 받았습니다.
정식 스님이 된 겁니다.
휴정은 지리산의 여러 암자를 돌아다니면서
안거(安居ㆍ여름과 겨울 석 달씩 산문출입을 금한 채 참선하는 일)를 했습니다.
#풍경5
하루는 휴정이 전북 남원에 있는 지인을 만나기 위해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낮인데 “꼬끼오~!”하고 닭 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휴정은 문득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도송(悟道頌ㆍ깨달음의 시)을 읊었습니다.
서산 대사는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닭울음 소리에 문득 깨달았다. 사진은 초록이 무성한 묘향산.[중앙포토]
머리는 백발이 되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옛사람이 이미 말했네
오늘 닭우는 소리 들으니/대장부 할 일 마쳤네
(髮白非心白 古人曾漏洩
今廳一聲鷄 仗夫能事畢)
홀연 제 집을 발견하니/온갖 것이 모두 이것이어라
천언만어의 경전들이/본시 하나의 빈 종이였어라
(忽得自家底 頭頭只此爾
萬千金寶藏 元是一空紙)
서산 대사는 그렇게 깨달음을 노래했습니다.
머리카락은 육신입니다. 세월과 함께 육신은 시듭니다.
머리카락도 하얗게 세고, 몸도 늙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우리의 본래 마음은 다릅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시공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지만,
사람의 본성(本性)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강물이 아무리 흘러가도
강은 항상 그 자리에 있듯이 말입니다.
묘향산의 바위와 나무가 잘 어우러져 있다. 한양과 평양의 서쪽이라 사람들은 묘향산을 '서산'이라 불렀다. [중앙포토]
그래서 서산 대사는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어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髮白非心白)”고
노래를 했습니다. 마음을 깨친 이가 자신이 본 마음의 속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팔만사천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경전이 있습니다.
이 경전들은 아주 다양한 표현과 어법으로 진리를 설하고 있습니다.
서산 대사는 이 모든 경전에 담긴 핵심을 뚫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팔만사천경을 한 마디로 “일공지(一空紙)”라고 말했습니다.
금강경, 반야심경,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 천수경 등
불교에는 숱하디 숱한 경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경전은 하나의 달을 가리킵니다.
서산 대사는 그달의 심장이 ‘공(空)’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경전은 손가락입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서산 대사는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라며
팔만사천 손가락의 본질을 설했습니다.
“원시일공지(元是一空紙)”라고 일갈하는 바로 그 순간,
진짜 달이 나타납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이 아니라,
손가락 속에 숨어 있던 달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때는 손가락이 달이고, 달이 손가락입니다.
서산 대사의 유물인 경서들이다. 해남 대흥사에도 서산 대사의 유물이 보존돼 있다. [중앙포토]
서산 대사가 품었던 선(禪)의 안목은
이처럼 깊고도 굳건했습니다.
#풍경6
사람들은 묻습니다.
서산 대사의 깨달음이 왜 중요하냐고 말입니다.
그게 우리의 삶과 무슨 구체적 연관이 있느냐고 따집니다.
연관이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를 안고서 살아갑니다.
‘문제없는 인생’ 은 없으니까요.
제아무리 최고의 권력가ㆍ최고의 자산가라 해도,
설령 금수저를 열 개씩 입에 물고 태어난 사람이라 해도
각자의 문제를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 문제를 ‘번뇌(煩惱)’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대부분 삶의 번뇌는 알지만,
번뇌에 대한 해법은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니 문제에서 파생되는 온갖 고통과 삶의 상처는
온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습니다.
결국 인간의 삶은 고통의 바다가 되고 맙니다
조선시대 승과에 급제해 선종과 교종, 양측의 지도자가 됐던 서산 대사의 진영.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 우리에게 서산 대사는 “길이 있다” “솔루션(해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삶의 온갖 번뇌를 한순간에 포맷 시킬 해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해법을 몸소 보여줍니다.
그런 선사가 우리 역사 속 인물이라는 사실에 참 가슴이 벅찹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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