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유하는 삶

금강산 우뚝 솟은 효봉…최초의 조선인 판사는 왜 엿장수 됐나 [백성호의 한줄명상]

 

금강산 우뚝 솟은 효봉…최초의 조선인 판사는 왜 엿장수 됐나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2021.12.22 05:00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풍경1

북한의 금강산에 간 적이 있습니다.
흔히 ‘금강산’이란  명칭이
‘금수강산’의 줄임말이라 생각합니다.

사실은 다릅니다.
‘금강산’의 ‘금강’은 불교 용어입니다.

금강산에 있는 4대 사찰 중에 하나인 표훈사의 전경이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표훈사는 파괴되지 않고 옛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중앙포토]

불교 경전 『금강경』의 ‘금강(金剛)’과 같은 뜻입니다.
불교에서 ‘금강’은 진리를 가리킵니다.
진리는 절대 변하지도 않고, 부서지지도 않고, 세월이 흐른다고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금강입니다.
『금강경』의 영어 이름은 ‘다이아몬드 수트라(Diamond Sutra)’입니다.

그러니 금강산의 뜻은 ‘진리의 산’입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금강산에는 1만2000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이란 노래 가사도 있습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이 봉우리마다 마음을 닦는 수도처인 암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강산의 봉우리는 1만2000개인데,
금강산의 암자는 무려 8만9개였다는 이야기가 내려올 정도입니다.

바라만 봐도 아찔한 금강산 보덕암. 천길 낭떠러지에 구리 기둥을 대고 서 있다. 바람이 불면 `삐걱`거려서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중앙포토]

실제 한국 불교사에서도 그랬습니다.
금강산은 산 전체가 거대한 선방이었습니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돌아가시자
율곡은 3년 상을 치렀습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고민하던 젊은 율곡은
머리를 깎고 금강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금강산 봉우리마다 깃든 암자를 일일이 찾아다녔습니다.
선사들과 문답을 주고받으며
생사의 문제를 마주했다고 합니다.

금강산의 유명한 마하연 선방은
한국 불교사에서 내로라하는 굵직한 선승들이
다들 거쳐 갔을 정도입니다.

#풍경2

금강산에는 4개의 큰 절이 있습니다.
유점사와 장안사, 표훈사와 신계사입니다.
이 중에서 표훈사만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한국전쟁 때 불타 버린 신계사는 남북관계가 풀렸던 기간에
남한의 조계종에서 다시 복원했습니다.

북한 금강산의 외금강에 있는 신계사의 절터. 폐허에 가깝던 이곳에다 조계종은 신계사를 복원했다. [중앙포토]

대한불교 조계종에게 신계사는 각별한 절입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인 효봉(曉峰, 1888~1966) 스님이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습니다.
출가 당시 효봉 스님의 나이는 38세였습니다.
늦어도, 상당히 늦은 나이였습니다.
사연이 있었습니다.

효봉 스님의 고향은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입니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어린 나이에 사서삼경을 줄줄이 꿰었다고 합니다.
평양감사가 개최한 과거 시험에서 장원급제할 정도였습니다.

효봉은 일본 와세다대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을 위해 일하겠다는 생각에
그는 현해탄을 건너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 법관이 되려면 고등고시에 합격해야 했습니다.
효봉 스님은 고등고시를 통과해 조선인 최초로 판사가 됐습니다.
그렇게 서울과 함흥, 평양 등에서 10년간 판사로 일했습니다.

대한불교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 스님.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초의 판사이기도 했다. [중앙포토]

그러다가 조선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선고를 내린 효봉은 인간적 고뇌에 빠졌습니다.
사람이 과연 사람의 생명을 끊는 선고를 할 수 있는가.
그런 고민 끝에 효봉은 법복을 벗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뒤로 한 채 집을 나갔습니다.

그 뒤에는 엿장수로 살았습니다.
입고 있던 양복을 벗어서 팔고,
그 돈으로 허름한 옷과 엿판을 샀습니다.
그 엿판을 목에 걸고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전국을 떠돌며 3년간 엿장수로 살던 효봉은 금강산으로 갔습니다.
머리를 깎으려고 신계사로 갔을 때도
목에는 엿판을 걸고 있었다고 합니다.
신계사에서 효봉은 “엿장수 중”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자신의 정체도 숨겼다고 합니다.
그냥 엿을 팔다가 출가한 스님이라고만 말했습니다.

금강산 내금강에 있는 진주담 계곡. 남성적인 풍경의 외금강에 비해 부드럽고 동글동글한 바위가 많은 내금강은 여성적이다. [중앙포토]

나중에 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관광차 금강산에 왔다가
신계사에 들렀습니다. 그때 효봉 스님을 봤다고 합니다.
그래서 효봉 스님의 이력이 처음 알려졌습니다.
그때부터 절집에서는 ‘엿장수 중’에서 ‘판사 중’으로 별명이 바뀌었습니다.

#풍경3

늦은 나이에 출가했지만
효봉 스님의 구도심은 남달랐습니다.

좌선할 때 한번 앉으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생긴 별명이 ‘절구통 수좌’였습니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백용성 스님과
경허 선사의 맏상좌인 수월 스님 등을 찾아가 가르침을 구했습니다.

북한 금강산 내금강의 표훈사 앞에 있는 마애불. 둥그런 얼굴에 한국인의 미소가 담겨 있다. [중앙포토]

1930년에는 금강산 법기암 무문관 토굴에서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일 일식(一日一食)을 했습니다.
잘 때도 눕지 않는 장좌불와(長坐不臥) 정진을 했습니다.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6개월만인 이듬해
효봉 스님은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토굴을 뚫고 나온 효봉 스님은
깨달음의 노래, 오도송을 읊었습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안 소식을 누가 능히 알꼬
   흰 구름 서쪽에 날고 달이 동쪽으로 뛰누나.”

그때 효봉 스님의 나이는 44세였습니다.

#풍경4

효봉 스님의 오도송을 한 글자씩 짚어봅니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이 대목만 봐도 놀랍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제비가 어떻게 바다 밑에 들어갈 것이며,
더구나 그곳에 집까지 지을 수 있을까요.
사슴은 어떻게 거기서 알을 품을 수 있을까요.

북한 금강산 내금강 표훈사에 있는 마애불이다. 고려 말의 대표적 고승이었던 나옹 선사가 직접 새겼다고 전해진다. [중앙포토]

“불 속의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또 불 속에서 활활 타는 거미집에서
고기가 어떻게 차를 달일 수 있을까요.
다들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풍경이다.’

그럼 이게 아주짝에도쓸모 없는
상상의 서술에 불과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효봉 스님의 오도송에서
오히려 무한의 자유가 밀려옵니다.

다들 투덜거립니다.
현재는 답답하고, 과거는 아프고, 미래는 막막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갇혀서 사니까요.
효봉 스님의 오도송에는
삶에 절망하는 우리의 답답함을
일시에 뒤집어버리는
무지막지한 통쾌함이 있습니다.

효봉 스님이 주장자를 들고서 마루에 앉아 있다. [중앙포토]

우리는  제4차 산업혁명의 초입에 서 있습니다.
빠르고 강한 변화의 물결이
우리의 일상을 물결치게 하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일들이
속속 현실적인 기술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전기차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메타버스(Metaverse, 가상의 세계인 메타와 현실 세계이 유니버스의 합성어)의 시대가 도래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는’ 창의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를 뚫고 나가는 핵심은
사고의 패러다임에 갇히지 않는 겁니다.

불교의 마음공부는 간단합니다.
생각의 패러다임을 무너뜨리고,
거기에 갇히지 않는 일입니다.

1966년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열린 효봉 스님의 장례식. 조계종은 종단장으로 초대 종정의 장례식을 치렀다. [중앙포토]

자유로운 창조, 자유로운 활용, 자유로운 파괴를
마음껏 오가며 써먹는 일입니다.
효봉 스님의 오도송은 그런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에 잠시라도 짬을 내보면 어떨까요.
눈을 감고 내가 갇혀 있는 생각의 패러다임을 찾아보면 어떨까요.
어디 한 번 무너뜨려 보면 어떨까요.

누구에게나 가능한 무지막지한 통쾌함을 위해서 말입니다.

 
  •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