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가끔 해변을 걷는다.
하루 종일 걷고 또 걷다 보면 머리가 맑아진다.
그렇게 걷다 주워 온 돌이 몇 개 있다.
모양은 다르지만 다들 겉이 만질만질하다.
기분이 처지거나 심란할 때 이 돌들을 만지작거리면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다.
딱딱한 돌에서 느껴지는 말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감촉이 거칠어지는 마음을 만질만질하게 해준다.
이 만질만질함은 어디서 온 걸까?
단단한 걸 보니 화강암이나 현무암일 텐데,
그렇다면 아마 수백 수천만 년 전 지구 저 깊은 곳에서 그 어떤 것보다 뜨거운 상태로 솟구쳐 나와 굳어졌을 것이다.
원래 바다에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다 바다로 흘러 들어 갔을 수도 있지만 날이면 날마다 수천 번씩 파도에 씻기며 거친 모습을 떠나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돌 하나에 수백 수천만 년의 시간이 담겨 있는 셈이다!
온갖 세파를 다 겪은 이런 축적된 시간이 내 마음을 다독이는 건지도 모른다.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알고 보면 오랜 시간의 결과들이 밤하늘에도 있다.
우리가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중 가장 멀리 있는 게 우리 옆 은하인 안드로메다 성운이다. ‘우리 옆’이라고는 하지만 250만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참 먼 이웃이다. 1년 동안 빛이 가는 거리(약 9조5000억 km)를 1광년이라고 하니 빛의 속도로 달린다 해도 무려 250만 년을 가야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보는 안드로메다 별빛이 우리 인류가 생겨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옛날 출발했다는 뜻이다.
원시 인류인 호모하빌리스가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근근이 살아가던 그 시절에. 이에 비하면 예로부터 밤길의 지표로 삼는 북극성 별빛은 그야말로 최근 것이다.
불과 400년 전 떠났으니 말이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 중 가장 밝다는 시리우스 별빛은 8년 7개월 전 떠난 ‘아주 따끈따끈한’ 것이고 말이다.
반면 햇빛은 8분 만에 우리 눈에 도착한다. 세상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시인들이 햇빛보다 별빛에 더 눈길을 주는 건 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별빛만이 아니다. 시인 박철은 ‘개화산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고 있다.
‘사실 낮은 산이 더 오래된 산이다
.조용한 산이 높은 산이다’ 맞다. 높은 산은 대체로 최근에 생긴 것이다.
낮은 산은 생긴 지 오래되어 낮아진 것이다. ‘눈보라에 이것저것 다 내주고 작은 구릉으로어깨를 굽히고 앉았’기에 마음 편히 오를 수 있는 산이다.
오랜 시간을 거쳐 온 것이기에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많다.
우리도 이럴 수 있을까? 나이 들수록 부드러워진 단단함으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고, 밤하늘의 별들이 그렇듯 어두운 시간을 함께해 주며 좌표가 되어 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스타(star)일 것이다.
더 나아가 위치가 높아질수록 높은 산처럼 조용하고, 살면 살수록 낮은 산처럼 마음이 편한 자연을 닮으면 나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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