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의 비극?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
[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영화 ‘300′과 자유를 위한 항전
탈레반의 카불 장악이 준 교훈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입력 2021.08.21 03:00
흙과 물. 페르시아에서 온 사신의 요구는 명확했다. 크세르크세스 황제에게 복종하는 뜻으로 스파르타의 흙과 물을 바쳐라. 그러면 영원한 번영과 평화를 제공할 것이다. 거절한다면? 황제의 군대는 땅을 뒤덮고 강물을 모두 마셔버릴 정도로 많다. 그에게 저항하는 것은 그저 미친 짓일 뿐이다.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생각이 달랐다. 페르시아 황제의 사신을 우물로 걷어차며 레오니다스는 외친다. ‘미친 짓? 여긴 스파르타야!’ 그는 결사대 300인을 이끌고 좁은 길목을 막아선 후 처절한 싸움을 시작한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중 테르모필레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300>의 내용이다.
일러스트=유현호
<300>은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6년 말 크리스마스 시즌에 개봉한 작품이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근육질 전사들의 마초적 함성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원작 그래픽 노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과잉된 연출 역시 ‘고상한’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 평론가와 지식인들은 제대로 비판조차 하지 않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중 다른 의견을 제시한 사람이 있었다. 오늘날 매우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슬라보예 지젝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2007년 Lacan.com에 기고한 ‘진정한 할리우드 좌파(The True Hollywood Left)’라는 글에서 지젝은 <300>에 대한 독창적 해석을 펼쳤다. <300>은 야만적 약소국이 문명적 강대국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스파르타가 야만인이라고? 우리 편 주인공은 무조건 선하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면, 맞는 말이다. 스파르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체검사를 하여 기형이거나 발육 상태가 좋지 않으면 내다 버려 죽게 한다. 그 유명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해 아이를 일곱 살 때부터 인간 병기로 길러낸다. 아이들은 남을 때리고, 속이고, 훔치고, 심지어 죽여서라도 자기 목숨을 지켜야 한다. 성인이 된 후에도 집단생활을 하고, 검소한 삶을 강요받으며, 음악과 시와 예술을 즐기지 못한다.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병영국가인 것이다.
반면 페르시아는 어떨까? “나는 관대하다.” 크세르크세스가 레오니다스에게 항복을 권유하며 하는 말이다. 온갖 부와 풍요가 넘쳐흐를 뿐 아니라 스파르타와 달리 ‘다양성’을 존중하기까지 한다. 지젝의 해석에 따르면 그렇다. “다양한 인종, 레즈비언과 게이, 장애인 등 모두가 뒤엉켜 난교를 벌이는 크세르크세스의 궁전은 일종의 다문화주의 라이프스타일의 낙원처럼 묘사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영화 <300>을 보며 스파르타를 미국에, 페르시아를 이라크에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지젝에 따르면 그렇다. 대신 우리는 <300>을 보며 자유와 규율이 지니는 역설적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고 규율을 따를 수도 있고, 규율을 내던진 채 자유만 탐닉하다 보면 자유를 잃을 수도 있는 부조리에 대해 따져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란 딸기 맛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두고 고민하는 안락한 선택의 자유가 아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유는 엄격한 규율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사회계약론>을 쓴 장 자크 루소라든가, 프랑스 혁명 당시 가장 격렬한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자코뱅 당원들은 아테네가 아닌 스파르타를 그들의 이상향으로 삼고 있었다. 자유를 위한 복종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300>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를 포기한 전사들이 그리스 전체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영웅담이다. 얼핏 보면 모순처럼 보이는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광복절을 축하하고 있던 8월 15일, 지구 반대편에서 믿기 힘든 소식이 들려왔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탈레반에게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미군 철수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일부 용맹한 이가 없지 않았으나 대다수 아프간 정부군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물자, 예산, 장비 등에서 뒤떨어진 탈레반에게 백기를 들고 말았다.
탈레반은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들의 야만적 인권유린 행태는 21세기가 아니라 19세기 기준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문명 세계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마땅히 카불 함락을 슬퍼하며 한국 대사관 현지 직원 등 위기에 빠진 이들, 특히 여성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는 없다. <300>을 통해 확인한 자유의 역설 때문이다. 탈레반이 마치 스파르타 결사대처럼 싸우는 동안 아프간 정부군은 크세르크세스의 노예 부대처럼 마지못해 싸우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미국이라는 ‘관대한 제국’의 영향권 안에서 자유와 문명을 누리면서도,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일갈했다시피 그 자유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려 들지 않았다. 미군이 떠난 후 카불이 함락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었을까.
자유는 남이 대신 지켜줄 수 없다. 베트남 전쟁에 이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잔인한 진리다. 반면 우리는 북한의 기습 남침을 당한 후 순식간에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전선을 사수한 후 반격하여 국토를 되찾았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기대와 달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그 처참했던 세계 최빈국은 오늘날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서 있다. 우리는 스파르타처럼 싸우고 일해서 아테네 같은 풍요와 문화와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일부 좌파는 대한민국을 ‘미제의 식민지’라고 비하해왔지만 그들은 틀렸다. 아프가니스탄의 비극이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은 우리 손으로 지키고 만들어온 세계사의 기적이다.
<300>의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스파르타군은 무려 사흘이나 버텼지만 결국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동안 전열을 갖춘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들고 싸워 페르시아를 격퇴한다. 진정한 동맹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연이어 전해지는 아프가니스탄의 비극 앞에서 스스로 묻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는 페르시아의 노예인가, 아니면 그리스의 자유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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