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돌 직전에 전격 철군 결정… 제재 맞선 ‘심리전’이었다는 분석
입력 2021.04.23 03:00 | 수정 2021.04.23 03:00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 의회에서 국정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누구도 러시아와 관계에서 ‘레드 라인’을 넘지 않기 바란다”고 했다. /AP 연합뉴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군사적 충돌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국경 지대에 최근 배치한 병력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미국·EU(유럽 연합)의 제재에 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의도적으로 갈등을 키웠다가 풀며 서방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쳤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22일 “우리의 군사적 능력을 체크했다는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만큼 내일부터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과의) 접경지대 병력을 원래 위치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독일 공영방송 도이체벨레는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몇 주간 계속된 지정학적 긴장 상태를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 둘러싼 군사력 배치 상황
러시아는 이날 철군 명령을 내리기 직전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우크라이나를 위협했다. 지난달부터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과 접경 지대에 병력을 늘리기 시작했고, 최근엔 병력이 약 10만명에 달했다. 전체 러시아 육군의 10분의 1에 달하는 규모다. 독일 슈피겔은 2014년 크림반도를 침공한 이후 러시아가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시킨 것이라고 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시아 공군이 이 일대에 수호이(Su)-30 전투기를 이달 들어 배치했다며 위성사진을 공개했고, BBC는 러시아 흑해 함대가 상륙함 등을 추가 배치했다고 전했다. 육해공을 총동원해 우크라이나를 에워싼 형국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은 7년 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이후 친러 반군이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교전을 벌이는 곳이다. 지금까지 군인·민간인 1만4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러시아군이 반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주고 사실상 대리전을 벌이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러시아의 서진(西進)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안보를 미국과 EU에 의지해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EU의 안보를 정면으로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일이 현실화되면 러시아가 미국과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충돌하는 국제적 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높다.
“나발니 석방하라” 러시아 전역서 시위… 1000여명 체포 - 21일(현지 시각) 러시아 모스크바 도심에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 지지자들이 집결해 휴대전화 손전등 불빛을 비추며 그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이날 러시아 전역의 100여 도시에서 나발니 석방 촉구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나발니에게 자유를” “푸틴은 도둑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나발니는 최근 3주간 이어온 단식의 여파로 건강 상태가 악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AFP 연합뉴스
푸틴이 7년 만에 다시 우크라이나를 거세게 위협하며 긴장을 유발시킨 이유는 러시아 국내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서방에 보내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미국은 지난 1월 바이든 행정부 취임 이후 러시아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특히 미국은 지난달 EU(유럽연합)와 함께 러시아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에 대한 독살 시도 책임을 물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측근들을 대상으로 제재를 가했다. 이어 지난 15일 러시아 외교관 10명을 추방했다. 러시아는 이에 맞서 미국 외교관 10명을 추방했다.
이와 관련해 푸틴은 21일 의회 국정 연설을 통해 “누구도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레드 라인’을 넘지 않기를 바란다”며 “필요할 경우 (서방의 도발에 대한) 대응은 비대칭적이고 신속하고 단호할 것이고 도발한 자들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푸틴의 최근 행동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외부 세계를 향해 편집증적 공세를 취하는 것 같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나발니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지지가 굳건해지고, 장기 집권과 불황에 따른 민심 이반이 두드러지자 푸틴이 ‘외부의 적’으로 국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술책을 부렸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최근 교도소 내에서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나발니를 석방하라는 시위가 21일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져 모두 1600명 넘는 시위대가 체포됐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는 22일 푸틴이 참석한 기후정상회의가 열리기 직전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에 배치한 병력의 철수를 발표했다. 우크라이나를 실제 침략할 의도가 있었다기보다 서방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고도의 심리 싸움을 전개한 모양새다. 러시아 군사 전문가인 알렉산드르 골츠는 “실제 침략할 의도가 있다기보다는 서방을 향해 군사적 힘을 과시 정도한 정도”라고 했다. 외교 전문매체 포린폴리시는 “무력 시위로 임기 초반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시험하려는 성격이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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