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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이야기

‘아시아 네마리 용’은 잊어라... 대만, 세계 1등 경제로 승천한 비결

[Cover Story] 코로나 팬데믹에도 작년 3% 성장 기적, 대만 경제의 비결은

김지섭 기자

입력 2021.02.26 03:00 | 수정 2021.02.28 17:47

 

 

“대만은 지난해 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실적을 낸 나라(the strongest performers) 중 하나다. 올해도 그 추세를 이어갈 것이다.”

미국 경제 매체 블룸버그의 대만 경제 평가다. 대만의 지난 1월 수출액은 343억달러(약 38조원)로 지난해 같은 달 대비 40% 가까이 증가했다. 월별 기준 역대 최고치다. 지난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세계 주요국 성장률이 일제히 마이너스(-)를 기록한 와중에 대만은 3.0% 성장해 30년 만에 중국(2.3%)을 앞질렀다. 실업률도 지난해 5~6월을 제외하면 꾸준히 3%대를 유지하고 있고, 경제 역동성을 보여주는 산업생산(전년 대비)은 지난해 2월을 빼고 단 한 번도 감소한 적이 없다. 수출액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꾸준한 회복세이고 올 들어서도 전년 대비 30~40%가량 늘었다. 주요 IB(투자은행)들은 대만이 올해도 4% 가까이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 붕괴로 침체의 길을 걷기 전,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홍콩·싱가포르·대만)’으로 불리던 1990년대 전성기를 떠올리게 한다”는 말까지 나온다.

인구 2400만의 섬나라 대만이 다시 한번 비상(飛上)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 여파로 전 세계 경제가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지는 ‘나 홀로 질주'다. Mint가 글로벌 경제의 불안 속에서 혼자 역주행하는 대만 경제의 비결을 심층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①신종 코로나 방역의 성공 ②비대면 중심의 4차 산업혁명에 올라탄 대만 경제의 구조 ③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요소가 된 대체 불가능한 요소로 녹아든 첨단 부품·제조 기술 중심의 산업 생태계가 대만 경제의 승천(昇天)을 이끌었다고 분석한다.

◇코로나 방역 모범국, 반등도 빨랐다

전문가들은 공통적으로 “K방역을 뛰어넘는 ‘T(타이완)방역’의 성공”을 첫째 비결로 꼽는다. 대만은 지난해 1월 21일 첫 코로나 확진자가 나오자 2월 초 신속히 중국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코로나 발생 사흘 만에 마스크 실시간 재고 앱(애플리케이션)을 만들었고, 마스크 배급제를 실시했다. 또 신종 코로나 무료 검사를 신속하게 시작해 ‘무증상 감염자’를 일찌감치 걸러냈다.

초동 진압의 성공 덕택에 대만은 다른 나라들처럼 강도 높은 ‘거리 두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내수 타격의 최소화로 이어졌다. 23일 현재 대만의 신종 코로나 누적 확진자는 942명, 누적 사망자는 9명에 불과하다. 대만 정부 관계자는 “코로나 방역에 성공하며 제조업체들이 투자를 지속할 수 있었다”며 “소비 감소도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T방역이 찬사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불필요한 예산 낭비를 막을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대만 정부는 코로나 사태 이후, 총 세 차례에 걸쳐 4100억 대만달러(약 16조2000억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지난해 네 차례에 걸쳐 대만의 4배인 67조원의 추경 예산을 쏟아부었다. 완벽하지 못했던 초동 방역 대응 탓에 양국 간 인구 차이(2배)를 크게 웃도는 경기 부양 비용을 지출하게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비대면 경기 회복 최대 수혜

신종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위기도 대만 경제엔 기회였다. 전 세계적으로 비(非)대면 문화가 확산하면서 스마트폰과 PC, 서버 등의 수요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연이어 지난해 하반기부터 신종 코로나 백신 개발 소식과 함께 미국과 유럽에서의 록다운(lock down·경제 봉쇄) 조치가 완화하자 자동차와 가전 등의 내구재 수요까지 급증했다.

이는 반도체와 전자 부품 주문의 폭주로 이어졌다. 모두 대만 기업들이 주름잡는 분야다. 반도체의 경우 TSMC와 UMC 등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제조) 업체 외에도 미디어텍·노바텍·리얼텍 등 시스템 반도체 업체, 르웨광·신텍·중화정밀테크 등 반도체 패키징(제품 가공)과 테스트, 기판 업체 등이 있다. 설계부터 제조, 패키징, 테스트에 이르는 반도체의 모든 공정에서 시장 점유율 최상위권을 휩쓸고 있다.

세계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의 파운드리 라인(팹16) 외부 모습. TSMC가 올해 역대 최대 시설 투자액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업계가 들썩이고 있다. /TSMC

최근엔 부품 공급이 달리면서 자동차와 IT 장비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자 미국·독일·일본 정부가 대만 정부에 “반도체 생산을 늘려달라”는 요청까지 할 지경이다. 이는 반도체와 전자 부품 공급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대만 경제에 더 큰 호재가 됐다. 대만 증시 공시 시스템(MOPS)에 따르면 대만 IT 산업의 총매출액은 지난해 3월부터 올해 1월까지 11개월간 한 차례(지난해 9월)를 제외하고 모두 전년 같은 기간 대비 증가세를 보였다. 심지어 지난해 12월 매출은 전년 대비 23%나 늘어난 1조7190억 대만달러(약 69조원)에 달해 2013년 이후 7년 만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다.

대만 IT(정보기술) 산업의 질주는 올해도 이어지고 있다. 대만 IT 산업의 1월 매출액도 1조3735억 대만달러(약 54조원)로 전년 대비 32% 늘었다. 최근 일본 닛케이 아시아판에 따르면 설 연휴 기간 TSMC는 폭증하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반도체 공장 증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프랑스 증권사 나티시스(Natixis)의 알리시아 가르시아-에레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첨단기술 제품에 대한 글로벌 수요로 대만은 향후 반도체 핵심 공급자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분업 경제 ‘허브' 된 대만

대만에는 삼성전자나 애플처럼 막강한 브랜드 파워를 가진 IT 기업이 없는 대신 부품과 ODM(제조자 개발생산) 시장에서 초강세를 보이고 있다. 반도체뿐만이 아니다. PC 부품 업체 ASUS와 MSI, 스마트폰 제조사 HTC, NAS(네트워크 저장장치) 업체 시놀로지와 큐냅, 아이폰 등 다양한 IT 기기를 위탁 생산하는 폭스콘과 페가트론, 위스트론 등도 모두 대만 업체다. 대만 컴팔과 콴타는 세계 최대 노트북PC ODM 기업이기도 하다. 유종우 한국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스마트폰 관련 부품 업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대만일 것”이라고도 했다.

소수 대기업이 아닌,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중소기업이 우수한 기술력과 낮은 단가를 앞세워 전 세계 테크 기업에 부품을 공급하고, 그들의 제품을 대신 생산함으로써 글로벌 산업 생태계의 중추를 이룬다. 따라서 전 세계 경제가 동반 침체하지 않는 이상 대만 경제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글로벌 경제 구조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대만의 산업 생태계는 대만 출신 기업인들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고 있다. 그래픽 반도체 최강자 엔비디아의 창업자 젠슨 황(Huang)과 인텔과 함께 CPU(중앙처리장치) 시장을 양분한 AMD의 리사 수(Su) CEO(최고경영자)는 모두 대만계 미국인이다. 엔비디아와 AMD는 대만 TSMC의 가장 큰 고객이기도 하다.

삼성전자, 현대차 판매가 부진하면 그 아래 수많은 하청업체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휘청거리는 한국과 대조적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기업 간 철저한 분업과 공고한 협업 체제가 대만 경제의 큰 경쟁력”이라고 말했다. 반면 원청 업체에 값싸게 제품을 공급해야 하다 보니, 무리한 비용 절감으로 근로자의 소득이 충분히 늘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실제로 지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최저임금이 10년 가까이 동결되면서 대만은 극심한 내수 침체를 겪었다.

◇정부의 치밀한 산업 전략

정부의 역할도 컸다. 대만은 1973년 산업기술연구기관인 ITRI를 설립해 전자통신 부문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고, 곧이어 ITRI 산하에 반도체 기술 개발을 위한 ERSO(Electronics Research Service Organization)를 만들었다. 삼성전자가 한국반도체를 인수(1974년)해 반도체 산업에 첫발을 내딛던 때다. ITRI는 1976년 설립된 우리나라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대기업 오너의 결단과 리더십에 의존한 반도체 육성이 이뤄졌다면, 대만은 이 과정이 철저히 국가 주도로 추진됐다. EROS는 미국에 기술 인력을 파견하는 등 수년간 노력한 끝에 반도체의 재료가 되는 얇은 원판인 웨이퍼(wafer) 시험 생산에 성공했다. 파운드리 기업 TSMC와 UMC도 사실상 대만 정부의 작품이다. UMC는 1970년대 후반 ITRI가 자본금의 44%를 투자해 설립했다. EROS는 UMC에 200여명의 기술 인력과 반도체 생산 기술 및 설비를 지원해 집중 육성했고, 1987년 민간 기업들을 모아 TSMC도 설립했다. 대만 미디어텍은 1997년 UMC의 설계 부문이 떨어져 나와 탄생한 기업이다.

안 상무는 “1980년대는 미국 반도체 업체들이 생산 공정을 외주화하던 때”라며 “대만이 그 전초기지 역할을 맡으며 UMC와 TSMC가 빠르게 안착했다”고 했다. 두 회사는 사업 다각화보다 ‘반도체 생산'이란 본업에 집중해 국내외 다른 기업들과 협업하는 생태계를 만들었다. 팹리스, 파운드리 업체가 따로 발달하면서 전문적인 패키징, 테스트 업체들이 함께 클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졌다.

◇대만 직접 투자는 환차손 우려

타국을 압도하는 경기 활황에 힘입어 지난해 3월 20일 9230선에 머물었던 대만 가권지수(TAIEX)는 올해 2월 사상 최초로 1만6000선을 돌파하며 11개월 만에 1.7배가 됐고 23일 1만6443포인트를 기록하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국내에서도 국내 증권사 시스템을 통해 대만 증시에 직접 투자가 가능하다. 하지만 타이완증권거래소(TWSE)와 타이페이거래소(TPEX)의 주식을 직접 사들이면 미국 달러로 한 번 환전한 후에 다시 대만 달러로 바꿔야 해서 환차손이 커질 수 있다.

TSMC와 UMC, 패키징 및 테스트 전문기업 ASE테크 등 유명 기업은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에도 상장되어 있다. 종목 투자가 부담스럽다면 미국 시장에 상장된 ‘아이셰어즈 MSCI 타이완 ETF’나 ‘프랭클린 FTSE 타이완 ETF’처럼 대만 주요 기업들을 담은 ETF를 매수해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좋다고 투자 전문가들은 조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