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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뉴스

오늘의 사건과 우표 07.31

오늘의 사건과 우표 07.31

1) 1921 - 미국의 민권운동 지도자 영(Young Jr., Whitney Moore) 출생

영 [Young Jr., Whitney Moore, 1921.7.31~1971.3.11]

1961~71년 세계에서 가장 큰 민권운동단체인 미국도시연맹 의장을 지내면서 산업계와 공직에 있어서 흑인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는 운동에 앞장섰다. 미국의 인종문제 해결에 기여할 대규모 기금조성계획인

'국내판 마셜 계획'을 지지함으로써 민주당 정부가 지원하는 연방정부의 빈곤구제계획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제2차 세계대전중 군대에 복무한 후 관심분야를 의학에서 사회사업으로 돌렸으며, 1947년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사회사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미네소타 주 세인트폴의 도시연맹 노사관계 담당관으로 출발하여(1947~50),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로 옮겨 1950~54년 그곳의 도시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다. 1954년 애틀랜타대학교(조지아 주)

사회사업학 학장이 되어 도시와 대학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2) 1919 - 독일 국민회의 `바이마르 헌법` 가결

독일공화국 국민회의가 1919년 7월 31일 찬성 262표, 반대 72표로 독일공화국 헌법을 가결했다.

신헌법은 국민회의가 개최된 지명을 따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불렸다.

바이마르 헌법은 국민주권을 권력의 유일한 기초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의회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제를

채택한 획기적인 헌법이었다. 국회의원과 대통령도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파괴돼 위험에 처할 경우`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이 부여되었다.

이 조항으로 대통령이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게 됐지만 이것이 후에

히틀러 독재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신헌법은 8월 14일에 공포, 시행됐다.

 

3) 1880 - 인도의 작가 프렘 찬드(Prem Chand) 출생

프렘 찬드 [Prem Chand, 1880.7.31~1936.10.8]

힌디어와 우르두어로 많은 중편·단편 소설을 썼으며, 인도적인 주제를 서양의 문예형식으로 표현하는 데

개척자적인 역할을 했다. 프렘 찬드는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1년 간디의 비협력운동에 가담했다.

그는 우르두어 소설을 발표하고 우르두어 잡지에 기고하면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북인도에서는 프렘 찬드의 작품들이 등장하기까지 벵골을 제외하고는 단편소설이 문예형식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었다. 프렘 찬드는 힌디어 작품을 통해 가장 널리 알려졌지만 그 언어를 완벽히 구사하게 된 것은 중년이 되어서였다.

그의 주요 힌디어 소설 가운데 첫 작품인 〈봉사의 집 Seva sadana〉(1918)은 매춘과 인도 중산계급의

도덕적 타락을 중심적 문제로 다루고 있다.

1) 1884 - 히틀러에 저항한 독일의 시 행정관 괴르델러(Goerdeler, Karl Friedrich) 출생

괴르델러 [Goerdeler, Karl Friedrich, 1884.7.31~1945.2.2]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저항운동과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한 일로 유명하다. 오랫동안 라이프치히 시장으로 있었으며,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새 정부의 총리가 되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한 뒤 1912년부터 졸링겐 시행정부에서 근무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주로 동부전선에 있었다. 1920년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러시아 연방 칼리닌그라드) 부시장이 되었으며, 1930~37년 라이프치히 시장이 되었다. 1931~32년과 1934~35년에는 나치 정권에서 2차례에 걸쳐 연방 가격통제위원회 위원으로 근무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민주주의를 매우 싫어했으며 독일이 1914년 이전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우적 '독일국가인민당'(DNVP)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나치와의 불편한 관계가 계속 악화되어갔다. ...

 

2) 1800 - 독일의 화학자 뵐러(Wöhler, Friedrich) 출생

뵐러 [Wöhler, Friedrich, 1800.7.31~1882.9.23]

프랑크푸르트 부근의 에셔스하임 출생. 1820년 마르부르크대학에 입학했으나 이듬해에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823년에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L.그멜린의 영향을 받아 화학연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823년 스톡홀름의 J.베르셀리우스 밑에서 화학분석에 대하여 배우고 1825년에 귀국하였다. 베를린공업학교의 교사와 카셀공과대학 교수를 거쳐 183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괴팅겐대학의 화학 교수로 근무하였다. 그는 베르셀리우스 밑에 있을 때 시안산()을 발견하여, 그 화학식이 J.리비히가 발견한 풀민산과 일치한 사실에서 두 사람이 공동연구한 ‘이성질체’의 존재를 강조하여 화학구조이론에 선구적 공헌을 하였다.

1828년에는 시안산암모늄에서 그 이성질체인 요소(尿)를 합성하여 유기화합물의 실험실 합성의 가능성을 주장, 유기화학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그 후 리비히와 공동으로 발표한 <벤조산의 기()에 관하여>(1832)라는 논문은 유기화합물의 기()이론 확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알루미늄 ·베릴륨의 단리(), 결정규소() 및 붕소의 제출(), 일련의 규소화합물의 발견, 탄화칼슘의 발견과 그것에 의한 아세틸렌의 제출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업적이 많다.

주요저서로는 《무기화학의 기초》(1831) 《유기화학의 기초》(1840) 등이 있다.

 

3) 1803 - 스웨덴 태생의 미국 조선기사, 발명가 에릭슨(Ericsson, John) 출생

에릭슨 [Ericsson, John, 1803.7.31~1889.3.8]

스웨덴 군대에서 측량기사로 근무한 후, 1826년 런던으로 건너간 그는 1829년 랭커셔 레인힐에서 벌어진

철도경기(이 대회에서 조지 스티븐슨의 '로켓호'가 우승함)를 위해 증기기관차 '노벌티호'를 제작했다.

또한 에릭슨은 군함의 기관을 흘수선 아래에 설치하여 적의 포격으로부터 보호할 계획을 세웠다.

1833년 열기관을 선보인 후 남은 여생을 여기에 바쳤다. 1836년 특허를 얻은 그의 스크루 프로펠러는 런던에서 건조된 '프랜시스 B. 오그던호'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미해군의 로버트 스톡턴 대령은 에릭슨에게 '프린스턴호'라는

소형 철선에 기관과 소형 스크루를 설치할 것을 명령했으며, 이 배는 1839년에 뉴욕에 입항했다.

몇 개월 후 그는 미국으로 이주하여 남은 여생을 뉴욕에서 보냈으며, 1848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1914 - 프랑스 정치가 조레스(Jaurès, Jean) 피살

조레스 [Jaurès, (Auguste-Marie-Joseph-)Jean, 1859.9.3~1914.7.31]

1914년 7월31일 프랑스의 정치가이자 反戰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가 29세의 광신적인 국수주의자에 의해

파리에서 피살됐다. 55세였다.

피살 전 조레스는 당시 프랑스 정부가 외교ㆍ군사적 동맹체제로 구축한 프랑스ㆍ영국ㆍ러시아 사이의 삼국협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와 독일의 反제국주의 세력이 힘을 모아 유럽의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이 그에게 반감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굴욕적으로 패배해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복수의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레스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사회주의 운동과 정치를 이끈 인물이다. 1859년 상인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지식인의

산실로 불리는 파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26세의 나이에 무소속 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한 그는 중도좌파의

경향을 보이면서 사회주의 정당 가운데 가장 온건한 독립사회당에 가입했다. 1904년, 뒷날 프랑스 공산당의

기관지가 된 '뤼마니테'를 창간했고, 프랑스 사회당의 전신인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를 결성,

의회의 부의장을 맡아 진보파의 유력한 지도자로도 활약했다. '드레퓌스 사건' 때는 드레퓌스를 옹호한 탓에

낙선했지만 1902년 다시 의회에 복귀, 이날 피살될 때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  

 

1901 - 프랑스의 화가 뒤뷔페(Dubuffet, Jean) 출생

뒤뷔페 [Dubuffet, Jean(-Philippe-Arthur), 1901.7.31~1985.5.12]

M.타피에에 의하여 앵포르멜 미술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1918년 파리로 나와 단기간에 그림을 배우고, 주로

독학을 했다. 생활을 위해 한때 그림을 포기한 적이 있으나 1942년부터는 그림에 전념했다. 작품은 타르 ·모래 ·유리 등 여러 종류의 정크(폐물)의 집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소재의 직접성이 박력 있는 묵직한 마티에르를 낳는다.

거기에 형성된 인간의 얼굴이나 모양에는 낙서나 어린이 그림을 연상하게 하는 P.클레적()인 소박한 선의 자유스러움이 살아 있다. 1948년 아르 브뤼(생경한 예술)라는 이름 밑에 주로 정신병 환자의 작품을 많이 수집하였다.

 

1886 - 벨기에의 화가, 조각가 페르메케(Permeke, Constant) 출생

페르메케 [Permeke, Constant, 1886.7.31~1952.1.4]

안트베르펜 출생. 브루게의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제2차 라템 생 마르탱파()에 참가하였다.

처음에는 인상파적인 그림을 그렸으나 표현주의로 옮겼으며, 농어촌을 소재로 소박하고 힘찬 표현을 하였다.

1930년대 중반부터 조각에도 손을 대어 사실적 ·표현주의적인 인체상을 추구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이국자()》(1916, 브뤼셀근대미술관 소장)가 있다.

 

1886 - 헝가리의 피아니스트, 작곡가 리스트(Liszt, Franz von) 사망

리스트 [Liszt, Franz von, 1811.10.22~1886.7.31]

라이딩 출생. 에스텔하지 후작의 토지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6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820년 프레스부르크에서 독주회를 가져 천재의 출현이라는 평을 받았다. 1823년 빈으로 가서 K.체르니에게 사사하면서 A.살리에리에게서 작곡을 배우고, 다시 파리로 가서 파에르와 라이하로부터 화성()을 배웠다. 다음해 파리에서

데뷔한 후 프랑스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고, 런던에서도 출연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

그는 1838년 빈에서부터 시작하여 유럽 일대를 무대로 한 연주여행을 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바이마르에 정주()한 1847년까지 계속되었다. 1847년 유럽 전역에 걸친 연주여행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리스트는 바이마르에 정주하였고, 그것은 동시에 여행 중에 알게 된 비트겐슈타인 후작부인과의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바이마르에서는 지휘자 ·작곡가 ·교육가 ·사회활동가로 폭넓게 활동하였으며, 지휘에서는 슈만 ·베를리오즈 ·바그너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창작면에서도 《3개의 연주회용 대연습곡》 《초절기교연습곡()》 《파가니니에 의한

대연습곡》과 소나타 ·협주곡 등의 피아노곡, 《파우스트교향곡》 《단테교향곡》 《전주곡》 《타소》 《마제파》

《오르페우스》 《이상()》 등의 교향시와 대표작을 연달아 내놓았다. ...

그의 작품은 편곡까지 포함하여 방대한 수에 이르며 악종도 다양한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헝가리광시곡》과

《순례의 해》를 포함한 피아노곡과 교향시이다.

 

1883 - 독일의 화가 헤켈(Heckel, Erich) 출생

헤켈 [Heckel, Erich, 1883.7.31~1970.1.27]

작센주 데베른 출생. 처음에는 드레스덴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후에 회화로 전환, 1905년 E.L.키르히너와

함께 표현주의운동의 미술단체 ‘브뤼케[]’를 조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위생병으로 벨기에전선에서 종군하였다. 1937년 나치스로부터 퇴폐예술가로 낙인이 찍혔고, 1944년 공습으로 베를린의 집과 아틀리에가 파괴되어

많은 작품을 잃었다. 유채() 외에 판화, 석판()을 표현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1920년 이후부터 점차 온화한

장식적 경향의 화조(調)를 보였으며, 풍경화도 즐겨 그렸다. 1949∼1956년 카를스루에미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에는 《호숫가의 여인들》《잠자는 흑인여자들》 등이 있다.

 

1877 - 미국의 발명왕 에디슨, 축음기 발명

발명왕 에디슨이 1877년 7월 31일 축음기를 발명했다. 11월 미국 특허국에 특허권을 제출할 당시의 축음기

이름은 '토킹 머신'이었다. 글자 그대로 말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8월 12일 에디슨은 뉴저지에 있는 작업실에서 동료들에게 둘러싸인 채 사상최초의 녹음을 시도했다.

녹음한 내용은 자신과 친구들이 함께 부른 동요 '메리에게 작은 양이 한 마리 있었네(Mary Has a Little Lamb)'였다.

그러나 에디슨의 녹음방식은 왁스를 녹인 원통에 바늘로 기록하는 것으로 오늘날처럼 대량생산을 위한 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에디슨의 축음기는 1878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출품됐다. 그후 1888년 런던 크리스털

팰리스에서 열린 헨델 페스티벌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이집트의 이스라엘인'이 에디슨의 축음기로 녹음됐다.

에디슨 이전에도 녹음기 발명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857년 프랑스 발명가 레옹 스콧이 포노토그라프라는

원시적 형태의 녹음기를 만들었다. 오늘날과 같은 평평한 원형 음반에 소리가 담긴 것은 독일 하노버 태생의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가 미국에서 음반 제작에 성공하면서부터다.


 

1843 - 오스트리아의 향토 소설가 로제거(Rosegger, Peter) 출생

로제거 [Rosegger, Peter, 1843.7.31~1918.6.26]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주 출생.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성장하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17세에 양복재단사의 도제()가 되어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그곳의 풍물을 견문하고 그것들을 글로 쓰기

시작하여 신문에 투고하기도 하였다. 이런 글이 그라츠의 신문사 주필에게 인정되어, 그의 도움으로 1865년 상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1875년에 최초의 방언시 《치터와 침발》로 문단에 오르고, 1875년에는 장편 《임간학교()

교사의 수기》를 발표하였으며, 연달아 뛰어난 자전적() 작품을 써냈다.

이어 《숲속의 고향》(1877)을 내는 등 향토적 민중소설을 쓴 그의 작품세계는 항상 슈타이어마르크의 향토와 밀접하게 연관된 농민생활을 주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향토색 짙은 방언을 교묘하게 구사한 그의 문체는 자연 및 인간의 묘사에 신선한 특색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알프스의 시적 묘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최후의 인간 야곱》(1888) 등 사회적 주제인 역사소설도 몇 편 발표하여 시야가 넓고 역량이 있음을 보여 주었으나,

그러한 경우에도 무대는 항상 향토를 떠나지 않았다.

 

1811 -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 이달고(Hidalgo, Miguel) 처형

이달고 [Hidalgo (y Costilla), Miguel, 1753.5.8~1811.7.31]

멕시코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톨릭 사제.

1789년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새로운 농사 방법을 도입해 돌로레스 교구의 경제 사정을 윤택하게 하는 데 관심을

가졌고 이로 인해 스페인 당국의 의심을 산 적도 있었으나, 처음에는 크게 세인의 관심을 끌 만한 일은 하지 않았다.

180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스페인으로 쳐들어가 국왕 페르난도 7세를 퇴위시키고 자신의 형제인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멕시코의 스페인 관리들은 감히 새 국왕에 대해 반대하지 못했으나, 많은 멕시코인들은 비밀 단체들을 조직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전 국왕인 페르난도를 지지했으며 다른 일부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했다. 이달고도 돌로레스 근처의 산미겔에 있는 이와 같은 비밀 단체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 당국에 의해 음모가 발각되면서 일부 단원들이 체포되었다. 이달고는 몸을 피하라는 경고를 받았으나 즉시 대응 태세를 취하기도 했다.

1810년 9월 16일 이달고는 돌로레스에 있는 교회의 종을 쳐 교구민들을 불러모은 후 스페인에 대한 독립 혁명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그가 산미겔에서 시작한 독립 운동은 상층 계급에 대한 일반 대중의 사회적·경제적 전쟁으로 변했다. 수천 명의 인디언과 메스티소들이 이달고의 과달루페의 성모 마리아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고, 이들은 과나후아토를 비롯해 멕시코 시 서부의 주요도시들을 점령했다. 이달고는 곧 수도의 문턱에 다다랐으나 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흩어졌고 멕시코의 지도층은 큰 사회 불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811년 1월 17일 칼데론에서 패한 이달고는 미국으로 탈출하기 위해 북쪽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도중에 체포되어 사제직을 박탈당한 뒤 모반자로 총살당했다. 이달고가 실제로 성취한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대부분의 멕시코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상징처럼 되었고, 그가 돌로레스에서 독립선언을 했던 9월 16일은 멕시코의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1784 -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Diderot, Denis) 사망

디드로 [Diderot, Denis, 1713.10.5~1784.7.31]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드니 디드로가 1784년 7월 31일 사망했다. 그는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평가받고 있다. 1713년 유복한 가톨릭 장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디드로는 성직자의 길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가정 환경과 그에게 처음 교육을 시킨 사람들인 예수회 수도사들과 관계를 끊고 스스로 폭넓은 교양을 쌓기 시작했다.
1745년경부터 철학적인 저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철학적 에세이, 소설, 희곡, 미술비평, 연극론 등 다양한 장르의 저서들을 남겼지만,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된 것은 '백과전서'의 집필 때문이다. 과학아카데미의 J.R.달랑베르를 감수자로 하고, 볼테르, 몽테스키외, J.J.루소 등 당시의 계몽사상가들을 총동원하여 1751년에 제1권을 내놓았고,

21년이 지난 1772년에 본문 17권, 도판(圖版) 11권의 전서를 완성했다.
이 '백과전서'의 내용은 종교·교회의 비판, 중세적 편견의 타파, 전제정치의 비판 등을 반영한 것이어서

도중에 수많은 탄압과 발행정지 명령을 받았으며, 1759년 이후에는 비밀리에 편집·인쇄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 사업에 바쳤다.  

 

1556 - 스페인의 수도사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사망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7.31]

성인(축일은 7월 31일). F.사비에르와 함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북()에스파냐의 바스코

지방 로욜라 성주()의 아들로 출생,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팜플로나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전()》과 《성인전》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심령수업 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려면 학문이 필요함을 깨닫고 32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 F.사비에르, P.파베르 등 6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1540년 그는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 양성하고 회헌()을 만듦으로써 그 기반을 다졌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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