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4년(정조 18년)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어사 정약용 서계
[ -積城麻田(漣川朔寧-丁若鏞書啓 ]
출처 : 일성록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어사를 제수받아 1794년(정조 18년)에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4개 읍을 다녀와 이 서계를 바쳤으며, 각 추생지역의 전현직 수령들에 대하여 상세한 보고를 올리고 있다.
경기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暗行御史)와 적간(摘奸) 나간 사관(史官)이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올립니다.
적성(積城), 마전(麻田), 연천(漣川), 삭녕(朔寧) 4개 읍에 파견된 어사 정약용(丁若鏞)이 서계를 올려 보고합니다.
서계(書啓)
적성 현감 이세윤(李世胤)은 정치를 순후(醇厚)하고 신중하게 하고 몸가짐을 소탈하게 하며, 송사(訟事)를 결단함에서는 비록 강직한 면이 부족하지만, 백성을 무마(撫摩)하는 데는 갈수록 더 부지런하게 하였습니다. 초호(抄戶)는 재차 실시하는 수고를 꺼리지 않아 처음에는 착오가 있었지만 끝내는 공평하게 하였고, 표재(俵災)는 자신의 재량으로 2결(結)을 삭감하고, 과다한 데에서 덜어내어 적은 데에 보태었습니다. 기장을 환곡(還穀) 받으면서 잉여분을 취(取)한 것은 그것을 사용한 곳이 사사로운 데가 아니었으므로 용서할 만합니다.
마전 군수 남이범(南履範)은 송사(訟事)의 심리(審理)를 강직하고 분명하게 하며, 일처리는 본말(本末)을 종합하여 면밀하게 하였습니다. 간사한 무리를 죄주고 도태시키니 백성들은 통쾌하다고 칭찬하였고, 창고지기를 곤장으로 다스리면서 먼저 되와 말[升斗]을 간혹 함부로 많이 받은 것을 먼저 살폈습니다. 납세를 거부하는 부잣집 무리에게 조세의 상납을 독촉하면서 흉년이 들었다고 봐주지 않았고, 피폐(疲弊)하고 가난한 백성을 초록(抄錄)하는 것은 실상과 합치하도록 공을 들였습니다. 병적(兵籍)에 기록된 인원수가 실제 인구보다 과다한 묵은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였고, 환곡(還穀)은 반드시 곱게 찧고 잘 까불게 하여 미리 새봄의 식량을 대비하였습니다. 부임한 지 2년 만에 정사가 이룩되고 법이 정착되었습니다.
연천 현감 이가운(李可運)은 조심스럽게 마음을 가다듬고 부지런히 공무(公務)를 집행하였습니다. 애초의 평판은 큰 추위가 쉽게 봄날씨로 변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직접 눈에 가득한 민우(民憂)를 보고는 그 여독(餘毒) 속에서 백성이 회생하기 어렵지 않을까 두려워하였습니다. 빈 가마니 값을 거두어들이는 법을 비루한 습속이라 하여 영구히 혁파하였고, 조적(??) 곡식을 담는 포(包)를 땔나무로 보충하는 사례는 또한 가난한 집에서는 덜어내어 주었습니다. 양반들이 포흠(逋欠)한 것을 거두지 못한 것은 비록 권세를 억누르는 힘이 못 미쳤기 때문이지만 족징(族徵)에 원망이 많은 것에 대해서는 지금 한창 그에 대처할 방책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보따리를 싸고 장차 사방으로 흩어지려는 백성을 기필코 안집(安集)시키려 하고, 뇌물을 상납하고서 하리(下吏)에 임명된 무리는 병정(兵丁)에 보충할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스스로 보다 진작하고 쇄신하는 노력을 가한다면 뒤섞여 있는 것을 가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전 현감 김양직(金養直)은 5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면서 온갖 나쁜 짓을 다하였는데, 흐리멍텅하게 일을 수행하여 정사를 어지럽게 만들고 탐오(貪汚)한 짓을 일삼았습니다. 게다가 첩(妾)까지 거느리고 있습니다. 환곡(還穀) 3,500석을 함부로 나누어주었다가 거둔 모조(耗條)를 모두 사사로운 용도에 써버렸습니다. 재결(災結) 51결을 나누어주지 않고 훔쳐먹어 백성에게 내리는 실제의 혜택이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용도가 불분명한 751석을 유고(留庫)로 남겨두고는 모조(耗條)로 거두는 것이 너무 지나치게 많게 하였고, 2,100여 석이나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거짓으로 유고(留庫)라고 하여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속여서 보고하였습니다. 게다가 직책을 팔아 자신을 살찌우면서 신역(身役)을 벗어나게 해준 것이 무수히 많고, 종을 놓아주고 돈을 요구하면서는 코를 찌르는 더러운 이름이 끝이 없을 지경입니다. 이런 사람을 엄히 징계하지 않는다면 백성을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 죄상(罪狀)을 담당 유사(有司)로 하여금 아뢰어 조처하도록 하였습니다. 전후(前後)의 도신(道臣)이 만약 수시로 살피고 조심하도록 경계하던가, 또는 일찌감치 포폄(褒貶)하여 파직(罷職)하였더라면 어찌 이 지경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이 또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녕(朔寧) 군수 박종주(朴宗柱)는 본래 순박하고 삼갈 줄 알고, 이에 더해서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백성의 일에 관계된 것은 모두 직접 수행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이미 봄에 조적(??)을 나누어줄 때 분별해 두어 나중에 초호(抄戶)할 때 지체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화속전(火粟田)을 살필 때 허(虛)와 실(實)이 뒤섞이기 쉬운데, 전체 결부수(結負數)를 조사할 때 가장 정확하고 간략하게 수행하였습니다. 규정에 맞게 창고에 쌓아둔 것을 덜어내어 향기 나는 채소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하였고, 시도 때도 없이 아전을 점검하여 민가(民家)에 잠자는 삽살개가 짖어대지 않게 하였습니다. 쌀과 꿀은 저렴한 가격으로 환산하여 다른 물건으로 대신 징수하고, 형장(刑杖)은 일정한 규정을 준수하여 조심조심 수행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군수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리자 백성들이 혹시라도 떠나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전 군수 강명길(康命吉)은 노욕(老慾)이 끝이 없고, 야비하고 인색함이 너무 극심합니다. 백성의 소송과 관가의 직무에 머리를 흔들며 관여하지 않고, 주방에 들어가는 비용과 자신이 가져가는 녹봉(祿俸)을 손바닥을 치면서 함부로 거두었습니다. 표절사(表節祠)의 줄여서는 안 되는 곡식을 고가(高價)로 부민(富民)에게 강제 징수하였고, 산화전(山火田)에서 함부로 많이 거두는 것의 총액을 흉년에 더 증가시켰습니다. 향임(鄕任)을 임명하는 데에는 뇌물 바치는 문을 항시 열어두었고, 곡식을 실어 나르는 것에서는 지토선(地土船)이 이득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아전들이 원망하고, 백성들이 탄식하는 것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교체되어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지만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은 추첨하여 뽑은 고을입니다.)
양주(楊州) 목사 한광근(韓光近)은 도적을 잡는 것은 비록 허술하였지만 아전을 단속하는 것은 매우 엄중히 하였습니다. 환곡을 받아들일 때에는 되질을 공평하게 하였다는 칭송이 있었고, 군병(軍兵)을 점고(點考)할 때 비용을 절감하는 방안을 수행하였습니다.
파주(坡州) 목사 조택진(趙宅鎭)은 하고자 하는 뜻은 스스로 채찍질하였지만 일을 수행하는 것은 크게 떨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황정(荒政)을 수행하는 것은 제대로 수행하였다는 소문이 없고, 군병(軍兵)을 조사하는 것에서는 혹은 정사를 어지럽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만약 백성을 보살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마땅히 힘써 단속해야 합니다.
고양(高陽) 군수 왕도상(王道常)은 다스림에는 기력(氣力)이 있으며, 정사(政事)가 정비되고 이루어진 일이 많습니다. 아전은 스스로 조심하고, 백성들은 은혜를 입었다고 사모하며, 길가는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흉년이 들었는데 이를 해결한 방도를 시행하였고, 백성을 보살피는 데에 적당함을 얻었습니다.
(이상은 어사가 지나는 길목에 자리한 고을들입니다.)
참고자료
문화콘텐츠닷컴 원문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1794년(정조 18년)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어사 정약용 서계 [-積城麻田(漣川朔寧-丁若鏞書啓]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암행어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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