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근목피에 의지하여 살던 보리 고개 단상
우리조상들이 살았던 시절은 워낙 가난한 나라였기 때문인지 우리말에는 가난에 관련된 말이 많다. ‘식사하셨습니까?’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으면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 ‘입에 풀칠도 못한다.’ 등의 말들이 모두 가난에 관련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역사에서 고대로부터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가뭄이나 홍수, 황해(蝗害:메뚜기로 인한 농사피해) 등으로 인하여 벌어졌던 참담한 굶주림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나타난다. 정약용(丁若鏞)은 기아시(飢餓詩)를 지어 보릿고개의 참상을 그리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일부 시골에서는 해마다 춘궁기 ‘보리 고개’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느라 얼굴이 누렇게 떠있던 부황증(浮黃症:오래 굶어 살가죽이 들떠서 붓고 누렇게 되는 병)에 걸린 농민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의 농촌의 참상을 내 눈으로 보고 자란 나이기에 군사혁명을 일으키어 우리나라를 산업화 사회로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전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에 대하여 지금도 찬사를 드린다.
북한은 아직도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며 TV프로에 출연하여 굶주림과 배고픈 고통 속에서 살아온 탈북 민들의 증언을 경청할 때마다 나는 눈시울이 붉히게 되고 가슴이 미어지 듯하다.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비극 중 최고의 비극은 배고픈 일이다. 이는 배를 채우지 못하면 인간은 생명을 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배고픔 앞에 선과 악, 종교와 도덕, 철학, 정치이념 등 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싶다.
우리가 못 먹고 굶주린 시절의 보리 고개 란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지난해 가을에 걷은 식량이 다 떨어져 굶주릴 수밖에 없게 되던 4∼5월의 춘궁기(春窮期)를 표현하는 말이다.
농민이 추수 때 걷은 수확물 중 소작료, 빚 또는 그 이자, 세금, 각종 비용 등을 지급하고 난 뒤 나머지 식량으로 초여름에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버티기에는 그 양이 절대 부족했다.
따라서 이 때에는 풀뿌리와 나무껍질(草根木皮) 등으로 끼니를 잇고 걸식이나 빚 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으며, 수많은 유랑민이 생기게 되고 굶어 죽는 사람 또한 속출하였다. 이 때, 식량이 궁핍한 농민을 춘궁민 또는 춘곤민(春困民)이라 하였다.
보릿고개를 넘기는 구황식물로 산나물이나 쑥을 많이 채취해서 먹었다. 나물 자체만으로는 반찬이나 되지 요기는 될 수 없다. 밀가루나 하다못해 보릿가루라도 있어야 버무려 쪄서 식사대용으로 한다. 이것마저 떨어지게 되면 들판의 풀뿌리까지 캐어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뿌리로는 칡뿌리에서 녹말을 내어 먹었다. 아이들이 칡뿌리를 학교에까지 들고 와서 먹었다
지금 시대에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주로 생기는 것으로 알고 있는 변비는 옛날에는 가난의 대명사였다. 옛말에 ‘×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는 가슴 아픈 표현의 말이 있는데 그 의미와 유래에는 이렇다.
목피라고하면 나무껍질인데 대표적인 것이 소나무 속껍질이다. 이것은 워낙 딱딱해서 그냥 먹을 수는 없다. 먹으면 죽는다는 양잿물을 넣고 삶으면 부드럽게 풀어진다. 이를 물에 담가 양잿물 독성을 빼고 먹었다.
소나무 껍질은 섬유질인 채소나 과일과는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이 껍질은 물이 많을 때는 부드럽지만 수분이 줄어들면 매우 딱딱하게 굳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소나무껍질을 아무리 오래 끓여서 죽으로 만들어 먹더라도 그것을 모두 소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나머지는 변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을 거치면서 수분을 빼앗긴 소나무껍질은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지게 된다.
소나무껍질은 먹을 때는 괜찮지만 감처럼 떫은맛을 내는 수렴작용을 하고 변비를 유발시키는 탄닌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 과다 섭취하면 배설이 어렵다보니 그 후에 문제가 발생하는 특징이 그런 말이 나온 것이고 거의 섬유질로 구성된 음식을 먹으니 변 보기가 어렵다. 위장의 기능이나 배변 힘이 약한 노인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나무 껍질을 먹은 백성들은 자연이 변비에 걸리게 되고, 변을 볼 때 너무 힘을 주어서 항문이 찢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해마다 겪었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상황을 말할 때 이런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서민들은 보릿고개에 대비하기 위하여 추수 뒤에도 쌀·보리·무를 혼식하든지 또는 보리죽을 먹거나 질 나쁜 곡물을 조금씩 섞어 먹을 수밖에 없었다고 이들은 초근목피 중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었다. 소나무껍질·칡뿌리·솔잎 외 그 대표적인 것이 전단토(田丹土)나 흰 찰흙을 죽에 섞어먹기도 하였다.
보리는 쌀이 나오기 까지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곡식으로서 양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수확량이 줄어들어도 덜 익은 보리를 베어서 먹어야 했다. 보리가 덜 여물면 껍질을 벗기는 방아를 찧을 수가 없다. 보리이삭을 낫으로 잘라서 가마솥에서 덖으면 익으면서 딱딱해진다. 이를 대충 껍질만 벗겨서 밥을 한다. 이 밥을 삼킬 때 목이 뜨끔뜨끔 할 정도로 보리가시가 목을 찔러댄다.
보리는 그래도 먹을 것이 바닥난 춘궁기 5, 6(음3, 4)월경 넘기고 이렇게 보리를 수확할 경우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있어 식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근래 가수 진성철,( 1966년 8월 6일 전라북도 부안군 행안면 출생 ) 부른 진성보리고개 노래가사 속에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진성 - 보릿고개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 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아야 우지마라 배 꺼질라 가슴시린 보릿 고갯길
주린배 잡고 물 한바가지 배 채우시던 그 세월을 어찌 사셨소
초근목피에 그 시절 바람결에 지워져 갈 때
어머님 설움 잊고 살았던 한 많은 보릿고개여|
풀 피린 꺾어 불던 슬픈 곡조는 어머님의 한숨이었소
어머님의 통곡이었소
+ 보릿고개
보리피리 삘리릭 춤추는 소리
보릿고개 허기진 배
잠 못 이루네.
춘삼월 삘리릭 서러운 소리
뱃가죽 달라붙어
도랑물 이루네.
가려네 삘리릭 어서 가려나
보릿고개 가렴아
어서 가렴아.
(윤용기·시인, 1959-)
소개한 노래와 시처럼 배고픔과 굶주림의 처절한 시대를 이렇게 우리 선조들은 살아갔다.
흉년에 콩죽 한 그릇하고 자기 생명인 논 서마지기를 바꾼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배고픔은 참기 힘들다. 부잣집에서 초봄에 쌀 한가마니를 장리쌀로 빌리면 가을에 추수하면 한가마니 반을 갚아야한다. 이자로 치면 10개월에 50%인 셈이다. 과히 살인적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장리쌀을 먹지 않으려고 발버둥 했다.
이렇게라도 해서 보릿고개를 넘은 사람은 다행이지만 배고픔을 참지 못해 장리쌀로 빚을 지면 자식을 남의 집 머슴으로 보내거나 농토를 팔아야 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토를 헐값에 파는 것이 그나마 살길이다. 자기의 농토가 줄어들면 다음해는 더 고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대정 논 한마지기 사려고 하지 말고 입하나 덜라고 했다. 새 중에서 제일 큰새가 먹새라고 먹을 입인 식구를 줄이는 것이 큰 바람이기도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우린 어릴 적에 시골 살면서 쌀밥은 상상도 못했고 꽁보리만 가득한 찬밥 덩이를 찬물에 말아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먹으면서도 음식 투정하지 않았다”고하면 젊은이들은 고개를 흔들며 들으려하지 않는다.
아직은 보릿고개의 전설을 어렴풋이나마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겪은 보릿고개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선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서 후세들이 똑 같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젊은 세대는 의식주 불편 없이 사는 것은 선대들의 피나는 노력에 대한 하늘의 큰 축복임을 알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성실하게 삶을 살아 갈 때만이 젊은 세대에게 희망이 있게 된다.
오늘날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앞에 국부는 무한경쟁시대에 무역으로 노출되어 있으며 자국의 선진기술과 부를 지켜 나가는데 방심하면 도전해오는 나라에께 우리의 현재의 위치를 내어주게 된다. 인간 세상은 결코 평등하게 다 잘 살게 되어 있지 아니하다. 일국의 국부는 전 국민의 피나는 노력의 댓가에 의한 성적표에 의하여 정해진 삶의 모습이고 이것은 국민의 마음가짐에 따라서 한 순간 비참한 상태로 전락하게 되기도 한다.
'시대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1794년(정조 18년) 경기도 적성 마전 연천 삭녕 어사 정약용 서계 (0) | 2019.06.11 |
---|---|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代 紙上 戰犯재판 (0) | 2019.06.10 |
박정희와 김일성 차이 (0) | 2016.05.27 |
한민족은 이스라엘 '단 지파' 민족이다 (0) | 2015.10.22 |
현충일 즈음하여 (0) | 2015.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