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 06.0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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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91 - 미국의 작곡가 포터(Porter, Cole) 출생
포터 [Porter, Cole (Albert), 1891.6.9~1964.10.15]
인디애나주 페루 출생. 6세 때부터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우고 1916년 최초의 뮤지컬 《먼저 아메리카를 보라 See America First》를 발표하여 이름이 나기 시작하였다. 한때 군(軍)에 복무하기도 하였으나 1928년 《파리 Paris》 등으로 호평을 얻고 그후 많은 뮤지컬을 창작하였다. 도시적 세련미와 가장 미국적인 감각을 가진 작곡가로
대표작에 《Night and Day》 《Begin the Beguine》《I love Paris》 등이 있다. - naver
2) 1597 - 네덜란드의 화가 산레담(Saenredam, Pieter Jansz) 출생
산레담 [Saenredam, Pieter Jansz(oon), 1597.6.9~1665.5.31]
얀의 아들. 아버지와 함께 하를렘의 프란스 피테르순 데 그레버의 공방에 들어가 1623년 하를렘의 성(聖)루가화가조합에
가맹하였다. 정확한 데생과 원근법의 화가로 알려졌고 건축물을 충실하게 묘사한 최초의 화가이다. 대표작에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암스테르담 구(舊)시청청사》(1657) 《하를렘의 성바퍼성당 내부》(1635) 등이 있다.
3) 1865 - 덴마크의 작곡가 닐센(Nielsen, Carl) 출생
닐센 [Nielsen, Carl, 1865.6.9~1931.10.3]
노르린델스 근처 솔테룸크 출생. 보병연대의 트럼펫 연주자로 일하다가 1884년 코펜하겐음악원에 들어가 음악공부를 하고, 그 뒤 왕립관현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를 거쳐 1914년에는 왕립음악원 원장이 되었다. 주요작품으로는
6곡의 교향곡을 비롯하여 오페라 《다윗과 사울》, 3곡의 현악4중주곡, 기타 피아노곡 ·가곡 등이 있다.
1870 - 영국의 소설가 디킨스(Dickens, Charles) 사망
디킨스 [Dickens, Charles (John Huffam), 1812.2.7~1870.6.9]
영국의 위대한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1870년 6월 9일 58세로 사망했다. 디킨스는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문인 최고의
영예인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안장됐다.
궁핍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에 어려서부터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던 디킨스는 변호사 사무실 사환과 법원 속기사, 신문사 통신원 등을 거쳤다. 신문사 통신원 생활은 그가 글쓰기에 접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됐다.
각지의 풍속을 스케치해 본사에 송고하는 일이 통신원으로서의 그의 할 일이었다. 이 당시에 썼던 글들을 모은 단편소품집 `보즈의 스케치`(1836) 출간은 작가로서의 시작이었다. `피크위크 페이퍼스`(1837)에 이어 1838년 출간한 `올리버 트위스트`는 작가로서의 명성과 위치를 확고하게 해주었다. 그가 몸소 체험했던 사회의 부조리와 서민들의 애환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비판적으로 묘사한 그의 글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받았다.
이같은 그의 작품경향은 자전적 소설 `데이비드 코퍼필드`(1850)와 `황폐한 집`(1853) 출간을 계기로 변해갔다.
주인공 한 사람의 성장과 체험을 중심으로 한 초기의 작품경향과는 달리 많은 인물들을 등장시켜 사회의 여러 계층을
폭넓게 바라보는 이른바 파노라마적인 사회소설로 접근해 간 것이다. 개인의 힘으로는 어쩔수 없는 사회의 두터운 벽에
직면해 유머를 잃고 무력과 좌절감이 전편에 흐르는 작품이 주조를 이뤘다.
그럼에도 그의 창작의욕은 꺾일 줄 몰라 `두 도시 이야기`(1859) `위대한 유산`(1861) 등의 작품을 출간했다.
1843 -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평화주의자 주트너(Suttner, Bertha von) 출생
주트너 [Suttner, Bertha (Felicie Sophie) von, 1843.6.9~1914.6.21]
킨스키백작가(家)에서 태어나 작가 A.주트너(1850∼1902)와 결혼하였다(1876). 여성의 입장에서 전쟁 반대를 부르짖은
소설 《Die Waffen Nieder》(2권:1889)는 유럽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평화운동에 헌신하여 ‘
오스트리아 평화의 벗의 모임’을 창립(1891), 베른(1892)·앙베르(1894)·함부르크(1897) 등의 평화대회에 참석하였으며, 190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주요저서로 《Inventarium einer Seele》(1883) 《Trente et Quarante》(1893) 《Einsam und Arm》(2권:1896) 《Das Maschinenzeitalter》(1899) 등이 있다.
1781 - 영국의 증기기관차 발명가 스티븐슨(Stephenson, George) 출생
스티븐슨 [Stephenson, George, 1781.6.9~1848.8.12]
탄광기관부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의 조수가 되고, 이어 기관부 ·기관공이 되어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에
통달하였다. 그 후 킬링워스탄광에서 탄광주를 설득,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1814년 7월 탄광에서 시운전에 성공하였다.
1823년 뉴캐슬에 세계 최초의 기관차 공장을 설립하고, 1824년 스톡턴∼달링턴 간의 세계 최초의 여객용 철도가 부설되어, 1825년 그의 공장에서 제작한 개량형 기관차 로커모션호(號)를 달리게 함으로써 철도수송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1824년부터 리버풀~맨체스터 간의 철도를 부설하고, 1829년 그의 로켓호를 달리게 하여, 1830년에 정식 개통시켰다.
그 후, 1830년대부터 거의 모든 선진국에 증기철도가 건설되게 되었다. 그 자신도 벨기에 ·에스파냐 등에 진출하여 많은
철도 부설사업에 종사하였다. 1847년 철도관계 기술자들이 중심이 되어 버밍엄에 창설한 세계 최초의 기계학회(Institution of Mechanical Engineers)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762 - 프랑스, 루소의 <에밀>에 대해 유죄판결 내리고 체포령 내림
루소(Rousseau, Jean-Jacques, 1712~1778)의 교육론『에밀·Émile ou De l'éducation』(1762)
『에밀』은 출간되자마자 그 종교적 내용과 관련하여 스위스의 신교와 프랑스의 구교로부터 모두 비판을 받게되었다.
파리의회가 이 책을 압수하고 저자의 체포령을 내림에 따라 루소는 프랑스를 탈출하여 스위스로 도피했지만
제네바당국도 『에밀』과 『사회계약론』에 대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책을 소각하자 그는 유럽 각지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고 심지어 추적 당하고 있다는 망상에 시달리기까지 하였다. 이 기간동안 루소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파리 대주교
『크리스토프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La lettre à Christophe de Beaumont』(1763)와 『산에서 보내는 편지·Lettres de la montagne』(1764)를 써야 했으며, 1770년에야 비로소 파리에 돌아올 수 있도록 허가됨으로써 망명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
http://blog.bucheon.go.kr/blog/post/post_list.jsp?page=45&urlid=m20800&cnum=0&viewdate=2007/07/25
1672 - 러시아의 차르, 황제 표트르 1세(Pyotr I) 출생
표트르 1세 [Pyotr I, 1672.6.9~1725.2.8]
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의 황제(재위 1682∼1725). 알렉세이의 14째 아들이다.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後妻)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 때에 궁중혁명(宮中革命)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하였다. 정규 교육이라고는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하여, 초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砲術) ·조선술(造船術)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 익혔다.
1682년 이복형(異腹兄) 이반 5세, 이어서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竝立)하여 정무(政務)를 보다가,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가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다. 1695년 돈강(江)의 하구(河口)에 있는 터키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가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技師)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匠人)들을 소집하여 함대(艦隊)를 편성하고, 이듬해 다시 터키를 공격하여 아조프를 차지하였다.
1697년에는 터키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使節團)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하여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職工)이 되어 포술 ·조선술 등을 익혔다.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銃兵隊)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써 중단되었으나, 귀국 후 즉시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하여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개혁을 단행하였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和議)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하였다. 1721년 원로원(元老院)은 그에게 ‘임페라톨’(황제)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또 ‘대제(大帝)’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왕정이 확립되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河口)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首都) 상트페테르부르크(표트르의 도시라는 뜻)를 건설하여,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窓口)’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海)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다.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으로서
군사·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이었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官等表)’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帝政)이 몰락할 때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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