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표와 사건 06. 08 (1)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986 - 발트하임 전 유엔사무총장,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당선
1986년 6월 8일 오스트리아의 외교관인 쿠르트 발트하임(Waldheim, Kurt, 1918~ )이 오스트리아 대통령 결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되었다. 발트하임은 제4대 국제연합(UN) 사무총장으로 취임해 1972~81년 2차례에 걸쳐서 사무총장직을 역임한 외교관이었다. 사무총장 역임 당시 발트하임은 방글라데시·니카라과·과테말라 등지에서 구조작업을 효과적으로
펼쳤으며,
1982년 UN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1986년 인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당에 가담한 전력 때문에 후보자격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다. 발트하임은 과거에 대해 솔직하지
않았음은 시인했으나 잔학행위에 가담한 사실은 부정했다. - 브리태니커
2) 1942 -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타보 음베키(Thabo Mvuyelwa Mbeki) 출생
타보 음베키 [Thabo Mvuyelwa Mbeki, 1942.6.8~ ]
남아프리카공화국 남부 퀸스타운(Queenstown) 에서 출생. 1962년 통신강의로 영국 런던대학교를 마치고,
석세스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ANC 런던사무소에서 일하였고 구소련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1956년 14세의 나이에 ANC 청년동맹에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전 생애를 ANC에 헌신하였다.
1975년 ANC 중앙집행위원, 1984년 ANC 정보국 책임자, 1989년 ANC 국제국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넬슨 만델라 정부에서 1994년 부통령이 되었고 1997년 넬슨 만델라의 뒤를 이어 집권여당인 ANC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99년 양원제 의회의 하원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부통령 시절부터 1994년에 입안된 재건개발계획(RDP)과 성장고용재분배정책(GEAR)을 주도하는 등 경제개혁을 이끌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는 기존의 경제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통령 보좌 기능을 강화하고, 흑인 전문 관료의 등용을
확대하는 한편, 야당인 인카타자유당(IFP) 소속 인사를 등용하는 등 친정 체제 구축과 정치적 안정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고수하였다.
또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부문에 걸친 인종 간 불평등과 비효율을 치유하는 데 역점을 두고, 남부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경제교류 확대와 외국인 투자 및 외국 자본 유입, 고용 및 내수시장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 밖에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치료를 위한 국제적인 신탁기금 마련 등 에이즈에 대한 세계 공동대처운동을 추진하고, 비동맹운동(NAM)회의 의장으로서 이집트·요르단의 중동평화안을 지지하는 등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004년 4월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3) 1953 - 한국전쟁 포로교환협정 조인
포로교환문제는 1951년 12월부터 다뤄지기 시작하여 1년여를 끌었다. 합동소위원회에서 쌍방의 포로명부를 교환하게
됨으로서 같은 해 말 현재로 공산군측이 억류하고 있던 유엔군 측의 포로가 1만1천여 명으로 밝혀졌다.
1952년 4월 30일 공산군 측이 포로교환 교섭 재개를 요청함에 유엔군측은 이에 응하여 회담을 재개했으나,
핵심문제가 전혀 진전되지 않아 다시 회담이 결렬되었다. 그 다음 해인 초에 크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상병포로의
선행교환을 공산측에 요구함으로서 3월 30일부터 회담이 재개되었다.
이때 주은래 중국 수상이 새로운 제안을 내 놓은 것이다. 그 동안 주장해 온 전 포로의 강제송환 요구를 포기하고 본국송환을 희망치 않는 포로는 중립국으로 이송함을 승인하는 자유송환원칙을 수락함으로서 포로교환문제가 급진전된 것이다.
이 같은 회담 진전은 다분히 스타린의 사망, 미국의 수폭실험 성공 ,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종전공약
그리고 중공군의 피해 급증 등이 배후에 깔려 있었기에 순기능을 한 것이다.
1953년 4월 3일 김일성은 포로문제에 관한 주은래의 제안이 북한과 중국이 합의한 바라고 공식 표명함으로서
문제는 쉽게 풀리게 되었다.
그 후 포로에 관한 회담이 급진전되어 5월 30일까지 송환이 끝났다. 그리고 공산 측은 본국 송환거부 포로는 중립국으로
보내고 귀환희망자는 송환 후 30일 내에 군사적 관리를 해제하기로 유엔군 측과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953년 6월 8일 포로교환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7월 27일 드디어 회담 시작 2년여만에 158회의 회담 끝에
휴전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그 당시 한반도의 통일을 염원하여 휴전을 결사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반대시위를
주요도시에서 계속하게 하고, 휴전회담 한국군 대표이던 최덕신 장군에게 협정 서명을 거부토록 명령했으며,
2만7천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등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① 휴전 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② 200만 달러의 장기경제원조제공
③ 한국군 증강 ④ 휴전협정에 의한 정치회담 이전에 한미고위급회담 개최란 전후 보장 5개항에 동의함으로서
더 이상 미국과 등을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1) 2) 3)
1) 1955 - 영국의 컴퓨터 공학자 버너스 리(Berners-Lee, Tim) 출생
버너스 리 [Berners-Lee, Tim, 1955.6.8~]
월드와이드웹(WWW)의 창시자. 월드와이드웹의 아버지로 불린다.
1955년 6월 8일 런던의 과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 물리학과를 졸업한 뒤, 플레시 텔레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여러 업체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운영체계 연구원 등으로 일하였다. 1980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에 몸담아, 같은 해 최초의 월드와이드웹(WWW) 아이디어인 하이퍼텍스트 방식의 '엔콰이어(Enquire)'
시스템을 제안하였다.
1989년에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의 과학자들 사이에 정보 공유를 쉽게 하기 위해 글로벌 하이퍼텍스트 공간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이 개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월드와이드웹이다. 이듬해 자신이 만든 웹 브라우저의 이름을 월드와이드웹으로 정하고, 기술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써야 한다는 믿음 아래
1991년 월드와이드웹 아이디어를 공개하였다.
버너스리의 아이디어 공개를 통해 전 세계 인터넷 시대의 문이 열렸고, 이후 월드와이드웹은 인터넷 주소 체계인 URL
등으로 발전하였다. 1994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 월드와이드웹컨소시엄(W3C)과 컴퓨터과학 및 인공지능연구소(CSAIL)를 세우고, 2005년 현재까지 W3C 소장으로 있으면서 인터넷 발전을 위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예술과학아카데미·영국왕립학회·영국컴퓨터학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에는《위빙 더 웹 Weaving the Web》(1999),《스피닝 더 시맨틱 Spinning the Semantic》(2005)이 있다.
2004년 대영제국 기사 작위 가운데 두 번째로 높은 '나이트 커맨더' 작위를 받았고, 같은 해 핀란드 정부가
제정한 제1회 밀레니엄기술상(상금 14억원)을 받았다. 2005년 1월에는 '2004년 위대한 영국인'에 선정되었다.
2) 1990 - 제14회 월드컵 이탈리아서 개막
제14회 월드컵축구대회(The 14th FIFA World Cup)는 2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90년 6월 8일부터 7월 8일까지 31일간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었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총회에서 이탈리아는 6개국을 제치고 제2회대회(1934)에 이어 56년만에
개최지로 선정되었고, 멕시코와 함께 대회를 두 번 유치한 나라가 되었다.
112개국이 지역예선에 참가하였는데, 개최국인 이탈리아와 전 대회 우승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하여 24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대회는 로마·밀라노·바리·나폴리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경기방식은 4개팀씩 6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 1·2위팀 12개팀과 각조 3위팀 6개팀 가운데 상위 성적 4개팀을 포함하여 총 16개팀이 2회전에 오른 후 토너먼트로
우승을 가렸다.
마테우스 로타르(Matthaus Lothar)를 중심으로 한 서독(지금의 독일)은 브라질·이탈리아에 이어 3회 우승한 3번째 나라가 되었고, 감독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우승하였다. 아르헨티나가 준우승, 이탈리아가 3위를 차지하였다. 52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251만 7348명, 평균관중은 4만 8411명, 총득점은 115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2.21점이다.
한국은 지난 대회에 이어 본선에 연속 진출하였으나 3패로 조별 리그전에서 탈락하였다. 강압수비 위주의 '압박축구'로
인하여 대회 사상 최소득점을 기록하였으며, 결승전 승부가 대회 사상 최초로 페널티킥으로 결정되는 등 대회 내내 지나친 수비 위주의 경기흐름이 새로운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38세의 로저 밀라(Roger Milla)가 활약한 카메룬은
아르헨티나·루마니아·콜롬비아를 물리치고 8강까지 진출하면서 '아프리카 돌풍'을 일으켰다. 칠레는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골키퍼가 부상을 위장함으로써 몰수패와 함께 다음 대회의 지역예선 참가가 금지되었다.
3) 1949 -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Nineteen Eighty Four> 출판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Orwell, George, 1903~1950)의 역유토피아 소설 <1984년-Nineteen Eighty Four>은
1949년 간행되었는데, 1984년, 가공의 초대국(超大國) 오세아니아에서 자행되는 전체주의적 지배의 양상을 묘사한 저자
만년의 작품이다. 권력집중이 자기목적화(自己目的化)한 당(黨)에 의한 대중(프롤레타리아계급)지배, 지배수단으로서
항상적(恒常的)인 전쟁상태의 유지, 거의 신격화한 지도자 빅 브러더에 대한 숭배, 개인생활의 감시,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한 언어의 간략화, 당의 무류성(無謬性)을 증명하기 위한 역사의 개서(改書) 등 모든 지배기구가 내포하는
위험성이 미래소설의 형태로 제시되었다.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제도에서 소재를 인용한 이 작품은 때마침 냉전(冷戰) 분위기를 타, 출판 후 1년 사이에 영국 ·미국에서만 약 40만 부가 팔렸으며, 세계 각국에서 잇달아 번역 출판되었다. 반공(反共) 작품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체제를 불문하고 당시의 사회 및 그 연장으로서의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전체주의적 정신풍토를 경고(警告)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 2)
1) 1948 - 독도 부근서 미군기가 어선 10여 척 오폭, 사상자 20여명
어부 150명 '억울한 죽음' 독도 폭격사건
미군정기인 1948년 6월 8일. 우리 어민들은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너무나 큰 비극으로 겪어야 했다.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15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독도 오폭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수로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폭격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독도의 악몽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 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이만 삼천 척 상공에서
폭격하야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14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 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
’(신천지 1948년 6월 30일)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독도 폭격이 고공폭격 연습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 성명서는 11척의 조선 어선을 총·폭격하여 14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고 기타를 부상시켰다고 전해진 이 사건을 불행한
유감스런 사고라고 말한다.”(동아일보 1948년 6월14일, 17일)
폭격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어민들은 옷가지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알이 지나간 뱃전은 헝겊으로 구멍을 막아
울릉도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고(故) 김도암 씨는 “태극기를 흔들어 목메어 소리쳤지만
야속한 비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숫자 등 폭격의 실상이 상당 부분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5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기록한 결과 폭격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은 무려
1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돼 50여 년 간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이 사건은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세상에 알려졌다.
장씨 등 생존자 2명은 “울릉도 방향에서 날아온 12대의 폭격기가 2개조로 나눠 600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폭격,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30여 척의 동력선에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했다. 그러다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을 뿐 진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
-독도박물관 http://dokdomu.dokdomuseum.go.kr/board/gongi4/view.php?tbname=gongi4&number=1023&page=1
2) 1958 - 제6회 월드컵 스웨덴서 개막
제6회 월드컵축구대회(The 6th FIFA World Cup)는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58년 6월 8일부터 29일까지 22일간 개최되었다. 제5회대회의 스위스에 이어 역시 중립국인 스웨덴이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지역예선에는 역대 최대인 53개국이 참가하였고, 개최국인 스웨덴와 전 대회 우승국인 서독(지금의 독일)을 포함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올랐다. 경기는 스톡홀름·말뫼·헬싱보리·할름스타드 등 12개도시에서 열렸으며, 4개국씩 4개조로 나누어 조별 리그전을 벌이고 각조에서 1·2위를 차지한 8개팀이 토너먼트 방식으로 우승을 가렸다. 우승은 브라질이 차지하였고, 스웨덴이 준우승, 프랑스가 3위를 차지하였다. 35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86만 8000명, 평균관중은 2만 4800명,
총득점은 126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3.60점이다.
제2회대회(1934) 이후 출전을 거부하다가 24년만에 참가한 아르헨티나, 제16회 올림픽경기대회(1956)에서 우승한 소련 등 축구강국들이 고루 출전하였으며, 축구왕 펠레가 17세 나이로 월드컵축구대회에 데뷔하였다. 브라질은 월드컵축구대회
사상 유럽대륙에서 우승한 유일한 타대륙 국가가 되었으며, 이 대회 우승을 계기로 축구황금기를 이어나갔다.
이 대회부터 월드컵축구대회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 세계에 본격적으로 중계되기 시작하였다.
- 가봉공화국 봉고 대통령 방한, 1975년 - 전두환 대통령 가봉 방문, 1982년
2009 - 가봉 대통령 오마르 봉고(Omar Bongo) 사망
오마르 봉고 [Omar Bongo ondimba, El Hadj, 1935.12.30~2009.6.8]
가봉 대통령 사망 공식 확인- BBC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스페인 병원에서 사망한 것으로 공식 확인됐다고 BBC가 보도했다.
장 에예게 은동 가봉 총리는 이날 봉고 대통령이 사망한 곳으로 알려진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퀴론병원에서 "봉고 대통령이 마침내 숨을 거뒀다"고 밝혔다.
앞서 가봉 정부는 프랑스와 스페인 언론이 전날 봉고 대통령이 사망했다고 보도하자 이를 공식 부인한 바 있다.
봉고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병원 입원 사실이 언론에 공개됐지만 정부는 단순한 건강 검진을 위한 것이었다며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 왔다.
봉고 대통령은 1967년 이후 41년간 최장기간 가봉을 통치해 왔으며 1975년, 1984년, 1999년, 2007년 등
4차례에 걸쳐 방한한 적 있는 한국와 인연이 깊은 대통령이기도 하다.
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60901093689671&nvr=y
2003 - 고대 이집트 '美의 화신' 네페르티티 왕비 미라 발견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최고 미인 가운데 한 명이자 파라오(왕)에 버금가는 절대 권력을 휘둘렀던
전설적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 ?~?)의 미라를 찾았다고 더 타임스 일요판이 8일 보도했다.
요크대학 고고학 연구진은 12년 간의 조사 끝에 이집트 왕가 계곡의 무덤에서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발견됐던 미라가
투탕카멘왕(Tutankhamen, BC 1370~BC 1352?)의 양어머니이자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누렸던 여성인
네페르티티 왕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가발 조각들과 뼈의 형태 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왕이나 왕비의 미라를 만들 때만 사용하는 방식으로
팔이 꺾여진 사실을 확인해 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요크대의 조안 플레처 교수는 "미라는 18왕조(기원전 1575~1308) 말 엄청난 권력을 휘둘렀던 왕실 여인임이 분명하다"며 "이 조건에 맞는 여성은 네페르티티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이 미라는 지난 1898년 프랑스 고고학자들에 의해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 속에서 다른 미라들과 함께 발견됐으나
훼손된 상태가 심해 주목을 받지 못했으며 1907년 단 한차례 사진 촬영이 허용된 이래 더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플레처 교수는 `젊은 여인'이란 이름이 붙여졌던 이 미라의 사진이 1920년 이래 독일 베를린에서 전시되어온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과 흡사하다는 점을 발견해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했다.
`미인이 왔다'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은 긴 목과 높은 광대뼈, 날렵한 콧날을 가져
현대적 기준으로도 손색없는 미인상으로 유명하다.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다신교를 버리고 유일신을 숭상했던 남편 아크나톤왕(Akhnaton, ?~?)의 재위기간(BC 1379∼BC 1362) 이집트의 수도였던 아마르나에서 발견된 것이다.
아크나톤왕은 다신교 사회였던 고대 이집트에서 이례적으로 유일신을 섬겼으나 사후 이교도로 몰리면서
그와 관련된 모든 유적과 유물들이 조직적으로 파괴됐다.
네페르티티 왕비는 아크나톤왕과 거의 동등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아크나톤왕의 사후 약 3년간은 직접
국가를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런던=연합뉴스) 이창섭 특파원 -연합뉴스 2006.06.08 - Google
http://sparkbbs.dreamwiz.com/cgi-bin/rbbsview.cgi?section=KOSA-DIAL&start=0&pos=5
- 속리산 법주사와 팔상전
2000 - 불교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탄성스님 입적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 진공당 탄성(眞空堂 呑性) 대선사가 8일 오후 5시 주석처인 충북괴산 공림사 감인선원
선심당에서 입적했다. 세수 71세, 법납 47세.
탄성스님의 영결다비식은 12일 오전 11시 법주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봉행됐다.
탄성스님은 종단이 어려울 때마다 수습의 책임을 맡았으며, 소임을 마친 후에는 곧장 수행처인 공림사로 돌아가 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는 참수행자상을 보여줘 종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다.
80년 10.27 법난 후에는 수습대책위원장, 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총무원장, 98년 조계종사태 때는 당시 총무원측과
정화개혁회의측의 중재에 나섰으며, 중재가 결렬되자 승려대회장을 맡아 현 종단 출범에 기여했다.
97년 원로의원으로 추대됐으며, 지난해 4월부터는 원로회의 의장직을 맡아왔다.
탄성스님은 1930년 충남 보은에서 태어나 44년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해 이듬해 3월에 사미계를 받았다.
55년 고암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61년 수덕사에서 하안거 이후 17안거를 성만했다. 평소 “법문을 듣고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불교와의 인연이 될지언정 도를 깨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실천과 참선수행을 강조했다.
정성운 기자-현대불교 /불기 2544년 6월 14일 274호
http://www.buddhapia.com/mem/hyundae/auto/newspaper/274/f-4.htm
1998 - 독일의 수학자, 고고학자 라이헤(Reiche, Maria) 사망
라이헤 [Reiche, Maria, 1903.5.15~1998.6.8]
불순함을 옹호하다.- 마리아 라이헤를 추모함
마리아 라이헤
1903년 독일 출생
1998년 95세의 나이로 사망
세줄의 짧은 약력으로 그녀의 삶을 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제 저녁 처음으로 나는 그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무심코 서점에서 사 든 한 권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삶을 알게 되었고,
참으로 오랫만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아 라이헤는 95년 이라는 긴 삶 중 3분의 2 이상을 페루에 있는 나스카 대평원을 지키고 연구하는데 바쳤으며,
바로 그곳에서 삶을 마쳤다. 그녀는 1930년대 말부터 나스카 대평원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것이 그녀의 평생의 업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나스카에서 26년간 거의 극빈층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나스카 대평원의 그 거대한 문양과 상징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측량하고 도면에 옮기며 그러한 문양과 상징의 연구 작업을 했으며, 나스카 대평원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그리고 그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에 감동한 페루 정부는 1979년부터 나스카에 있는 국립 호텔을 평생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을 그녀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그녀는 수많은 훈장과 포상을 페루정부로부터 받게 된다.
내게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그녀가 1955년 페루 정부의 나스카 대평원 관개계획을 무산시킨 이야기였다.
당시 페루 정부는 안데스 산맥 동쪽의 아마존 강의 물을 끌어와 나스카 대평원에 관개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녀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 계획을 실행 직전에 무산시켰다. 만약, 그 당시에 그러한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인류의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중의 하나인 나스카 대평원은 저 역사 속으로 수장되고 말았을 것이다. 한 인간의 노력과
열정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마리아 라이헤가 확실히 나스카 대평원에 미쳤다고 볼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그녀는 나스카 대평원의 그 수많은 문양과 상징을 가장 잘 촬영하기 위해, 헬기 아랫 부분의 착륙대에 널판지를 놓고서 그 곳에 올라서서 몸을 헬기에 묶은 채 수직 방향으로 나스카 대평원을 촬영했다고 한다. 그러한 그녀를 찍은 사진을 보면서 참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즉, 그녀의 몸이 완전히 헬기 밖에 있었던 셈인데, 그 당시의 나이가 이미 50이 넘었을 때였다고 한다. 사실 사진측량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직방향에서 찍은 사진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잘 안다. 그녀는 정밀기기가 제공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러한 연직사진을 찍기 위해 그러한 모험을 했던 것이다.
현재 페루의 나스카 대평원은 차량은 물론 사람의 출입조차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지난 98년엔가 한국의 한 광고회사가 그곳에서 광고를 촬영하며 나스카 대평원을 손상시킨 일이 있었다. 나도 그 기사를 신문을 통해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가 라이헤여사가 살아 있을 당시였다면, 그녀의 반응은 어떠했을까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나스카 대평원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연구자들은 예민한 곳을 지날 때는 널빤지를 깔고서 움직일 정도라는데 말이다.
오랫만에 참 감동적으로 책을 읽었고, 그래서인지 창 밖의 푸른 하늘만큼이나 기분이 좋은 하루다.
1997 - 10th Conference of the Parties to CITES
UN, Zimbabwe, Harare, 8-20 Jun 1997
http://www.unpi.com/projects_un_conference_stamp_listing_1999.asp
1994 - 옛 조선총독부 건물 해체 결정
국립박물관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는 1993년 김영삼정부 출범과 함께 정해진 일로 그 이후 오랜 기간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다. 93년 당시 정부가 고려한 안은 ① 건물 자체를 완전해체하는 방안, ② 건물축소모형을 만들어 별도
장소에 보존하는 방안, ③ 별도 장소에 그대로 이전하는 방안이 있었다. 그 당시 처리반안에 대한 논란은 대통령이
건물 해체를 지시8)로 일단락이 지워지지만 성급한 결정이라서 2-3년후 이 문제가 다시 거론되게 된다.
총독부 철거문제가 본격 제기됐을 때만 해도 총독부 철거문제를 둘러싼 논쟁의 양상은 '이전-복원론'이 가장 많은 지지를 얻는 가운데 '완전철거론'과 '현상보존론'이 각각 역사학계와 고고-건축학계의 주장으로 제기됐었다.
그러나 '이전-복원론'은 제대로 검증도 되지 않은 채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뒤로 밀려나 버렸다.
그러나 총독부 건물을 독립기념관에 이전하여 독립기념관의 기능을 강화하고 연구 기능을 보강하자는 案이 제기 되었지만, 철거된 총독부 건물의 자재를 전시한 공원이 98년 8월 11일 개원하였다.
http://www.ahngb.com/korea/history.html
조선총독부건물 철거
경복궁으로 돌아온 지 14년이 지난 1986년 8월 21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 건물을 개ㆍ보수해 네 번째로 이전했다. 연건평 1만8천여 평, 22개 전시실에 전시유물만 6천여 점으로 규모도 크게 확장됐다.
또한 한국유물 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유물까지 전시돼 국제적 박물관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다.
1994년에는 한해에만 176만2천여 명의 관람객이 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제잔재’ 청산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중앙청 건물이 일본 제국주의 압제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는 지적도 거세졌다.
당시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함에 따라, 199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다시 서울 용산 가족공원으로 이전이 결정됐다.
그리고 마침내 1995년 8월 15일 광복 반세기를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이 10여 년 동안 둥지를 틀었던
옛 조선총독부 건물은 전격적으로 해체ㆍ철거되기에 이른다. - 연합뉴스
http://danmee.chosun.com/wdata/html/news/200510/20051028000047.html
1990 - 남아프리카공화국 비상사태 해제
4년 동안 실시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비상사태가 1990년 오늘 해제됐다.
흑인분파 사이의 정쟁으로 천여 명이 목숨을 잃은 나탈주의 크와줄루 홈랜드만 제외됐다.
드 클레르크(de Klerk, Frederik Willem, 1936~ )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이날 의회연설에서 ANC,
즉 아프리카민족회의와의 합의에 따라 48명의 정치범도 석방한다고 밝혔다.
석 달 전 27년 동안의 복역생활에서 풀려난 넬슨 만델라(Mandela, Nelson, 1918~ )는
비상사태의 해제가 '민중의 승리'라고 환영했다.
전임 남아공 대통령인 보타(Botha, Pieter Willem, 1916~ )는 4년 전인 1986년 6월 흑ㆍ백인간,
그리고 흑인 상호간의 정치적 분규를 빚은 반(反)아파르트헤이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비상사태를 선포했었다.
드 클레르크는 이번 비상사태 해제 결정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협상의 주요 걸림돌이 제거됐다고 자평했다.
1973 - 포항제철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9 일 용광로 쇳물 출선 시작)
포항종합제철의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이 8일 오전 10시 공장 현지에서
이낙선 상공부 장관을 비롯, 박태준 종합제철 사장 등 관계인사들의 참석 아래 열렸다.
포항제철(POSCO) 연혁
1968-11-12 박정희 대통령 포철현장 방문(13차례 방문 중 첫번째)
1969-01-15 제철연수원 현판식
1970-04-01 1기 설비 착공식
1970-06-23 중후판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0-09-19 열연공장 설비공급 계약체결
1972-10-03 첫 열연제춤 출하, 박태준 사장 첫 제품에 "피와 땀의 결정" 휘호
1972-11-19 제품 해외수출 시작, 후판제품 7,400톤을 미국과 대만에 수출
1973-06-08 제선공장 준공식 및 용광로(고로) 화입식
1973-06-09 용광로(1고로) 쇳물 출선 시작
1973-07-03 1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3-12-01 2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4-10-21 직업훈련원 개소 및 1기생 입소식
1975-11-29 1억불 수출의 탑 수상
1978-12-08 3기 설비 종합준공식
1979-02-01 4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9-09-27 4본주 입주식
1981-02-18 4기 설비 종합준공식(조강 연산 850만톤 규모)
1981-09-01 4기 2차 설비 착공식
1983-05-25 4기 2차 설비 종합준공식
1968 -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 암살범 체포
1968년 6월 8일 영국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서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2세(King Jr., Martin Luther, 1929~1968) 암살 용의자인 제임스 얼 레이(Ray, James Earl, 1928~1998)가 체포되었다. 레이는 주유소와 상점을 터는 좀도둑으로 일리노이에서 1번, 미주리에서 2번 복역했으며, 로스앤젤레스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67년 4월 23일 미주리 주립교도소를 탈옥한 뒤, 1968년 4월 4일 테네시 멤피스에서 킹이 묵고 있던 모텔 옆 민박집
창문을 통해 모텔 방에 있는 킹을 쏘았다. 체포된 뒤 자신의 유죄를 시인해 99년형을 선고받았던 레이는 1977년 테네시에 있는 브러시마운틴 교도소에서 탈옥해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레이는 복역 중 1998년 4월 23일 사망했다.
1921 -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수하르토(Suharto) 출생
1916 - 영국의 분자생물학자 크릭(Crick, Francis H. C.) 출생
1903 - 벨기에 태생 미국의 소설가 유르스나르(Yourcenar, Marguerite) 출생
1876 - 프랑스의 여류소설가 상드(Sand, George) 사망
1867 - 미국의 건축가 라이트(Wright, Frank Lloyd) 출생
1845 -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잭슨(Jackson, Andrew) 사망
1829 - 영국의 화가 밀레이(Millais, John Everett) 출생
1810 - 독일의 작곡가 슈만(Schumann, Robert) 출생
1809 - 미국의 혁명이론가 페인(Paine, Thomas) 사망
1625 - 이탈리아 태생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시니(Cassini, Jean Dominique) 출생
632 -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uhammad/Mahomet)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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