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3)
1) 1877 - 영국의 물리학자 바클라(Barkla, Charles) 출생
바클라 [Barkla, Charles Glover, 1877.6.7~1944.10.23]
랭커셔의 위드네스 출생. 리버풀대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의 캐번디시연구소에서 J.J.톰슨의 지도를 받았다. 1909년 런던대학교 교수가 되고, 1913년부터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에든버러대학교 교수로 있었다.
초기에는 도선(導線) 안에 전파(傳播)되는 전파(電波)의 속도를 연구했으나, 후에 X선의 연구로 방향을 바꾸어 이 분야에서 여러 가지 실험적 업적을 남겼다. 즉, 특성(特性) X선에 관한 발견과 연구, 2차 X선이 산란선(散亂線)과 형광선(螢光線)으로 이루어진다는 지적, X선의 편광현상(偏光現象)의 발견, 흡수(吸收) 및 사진작용, X선산란에 의한 원자(原子)
내 전자수(電子數)의 추정, X선에 대한 양자론(量子論)의 적용 가능성과 한계 등이며,
이러한 연구 업적으로 191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2) 1415 - 콘스탄츠공의회, 위클리프ㆍ후스 이단으로 규정
콘스탄츠공의회(Council of Konstanz)는 독일 콘스탄츠에서 열린 중세 그리스도교회 최대의 공의회(제16회).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기스문트가 제안하여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였는데 300명 이상의 주교, 100명 이상의 대수도원장,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 신학자, 교회법학자, 통치자들이 참석하여, 유럽에서의 대분열(동 ·서 교회의 분열:1378~1417)을
종식시키고 이단을 추방함으로써, 교회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교회는 로마계 그레고리우스 12세, 아비뇽계 베네딕투스 13세와 공의회파 요한 23세의 3파로 나뉘어, 각기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이른바 교황 정립(鼎立)시대를 맞아 교회
사상 최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이에 교회의 일치를 최대의 목표로 삼은 공의회는 우여곡절 끝에 “공의회가 분열된
전 교회를 대표하며, 그 권능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온 것”임을 선언하고 베네딕투스 13세를 폐위시키고,
그레고리우스 12세를 설득하여 자진 퇴위케 했다. 그리고 후임으로 마르티누스 5세를 선출함으로써 유럽 교회의
대분열(대이교:大離敎)을 종식시키고 난국을 수습했다.
신앙문제는 위클리프의 명제 ‘200개안’을 이단으로 선언하고, 후스를 소환하여 명제 30개를 축조심사한 끝에 1415년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이 공의회는 또한 회의 자체가 공의회 지상주의를 채택한 점에 특색이 있었다. 중세 말기에 성해진
이 주의는 시스마(분열) 등에 의한 교황 권위의 실추로 더욱 강화되었으나, 다시 이 공의회가 현안의 시스마 문제를
수습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결정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의회는 교령(敎令)을 공포하여 공의회는 교회의 최고권위
이며, 교황권의 상위에 있는 교회의 지상적(至上的) 존재임을 선언하였다.
3) 1860 - 일본의 법학자 우메 겐지로[梅謙次郞] 출생
우메 겐지로[梅謙次郞, 1860.6.7~1910.8.25]
일본의 법학자. 일본의 현행 민법전과 상법전을 기초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84년 사법성 법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 도쿄[東京] 법학교 교원이 되었다. 그뒤 프랑스 리옹대학에 유학하여 1889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890년 귀국하여 도쿄대학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교육자로서 특히 와후쓰법률학교[和佛法律學校 : 뒤에 法政大學]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귀국직후 이 학교의 학감·교장을 거쳐 1903년부터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총리(總理)가 되어
평생 동안 후학양성과 학교경영에 힘썼다. 1904년에는 청나라 유학생의 법학교육을 실시하여 후일 중국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후한민[胡漢民]·왕자오밍[汪兆銘] 등을 배출했다.
한편 프랑스의 법학자 귀스타브 에밀부아 등이 기초한 구민법의 시행과 연기문제를 둘러싸고 소위 민법전 논쟁(→ 일본 민법전)이 일어났을 때에는 입법시행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결국 구법전 시행이 연기되자, 법전조사회의 기초위원으로서 호즈미 노부시게[穗積陳重], 도미이 마사아키[富井政章]와 함께 민법을, 다베 요시[田部芳], 오카노 게이지로[岡野敬次郞]와 함께 상법을 입안·기초하는 등 입법사업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했다. 1906년 이후에는 한일합병 이전의 한국의
입법사업에도 관여했다. 주요저서인 〈민법요의 民法要義〉(5권, 1869~1900)는 민법에 관한 개설서로서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브리태니커
일본의 법학자. 1884년 사법성 법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 리옹대학에 유학하여 89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90년 귀국하여 도쿄대학〔東京大學〕 법과대학 교수가 되었으며, 1903년부터 호세이대학〔法政大學〕 총리(總理)가 되어 평생 교육에 힘썼다. 프랑스의 법학자 G. 에밀부아 등이 기초한 구민법의 시행과 연기문제를 둘러싸고
이른바 민법전논쟁이 일어났을 때는 입법시행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러나 결국 구법전 시행이 연기되자, 민법과 상법을 입안· 기초하는 등 입법의 중심인물로서 활약하였다. 1906년 이후에는 한일합병 이전의 우리나라 입법사업에도 관여하였다. 주요 저서로 《민법요의(民法要義)》가 있다. - 오픈토리
http://www.opentory.com/index.php/%EC%9A%B0%EB%A9%94_%EA%B2%90%EC%A7%80%EB%A1%9C
(우메 겐지로가 서울에서 살고 있었는지는 모르나 브리태니커 자료에 서울에서 사망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
1) 2)
1) 1897 - 미국의 지휘자, 작곡가, 피아니스트 셀(Szell, George) 출생
셀 [Szell, George, 1897.6.7~1970.7.29]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 처음 피아니스트·작곡가로 출발하였으나 뒤에 지휘자로 전향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피아노와 작곡에
재능을 보였으나 R.슈트라우스의 권유로 지휘자가 되었다.
1917년 슈트라스부르크 오페라극장의 지휘자를 시작으로, 프라하·다름슈타트 등의 오페라극장 지휘자로 활약한 후, 1924∼1929년에는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제1지휘자, 1926년에는 베를린음악대학 교수가 되었다. 1933년 영국으로 가서 런던필하모니관현악단을 지휘하고, 1937년 스코틀랜드관현악단 상임지휘자, 1946년 이래 미국 클리블랜드관현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이 악단을 세계 최정상급의 악단으로 끌어올렸다.
2) 1896 - 헝가리의 정치가 너지(Nagy Imre) 출생
너지 [Nagy Imre, 1896.6.7~1958.6.16]
코포슈바르 출생.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전선에서 포로가 되어 적군(赤軍)에 참가했다. 귀국해서 비합법 농민운동을
지도했다. 1929년 소련에 망명하여 농업연구소에 소속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조국을 향해’라는 모스크바 방송을 담당하였다. 1944년에 귀국하여 1945년 내무장관, 1952년 부수상, 1953년 수상이 되었으나 소비물자 생산정책에 대한 비난을 받고 1955년에 해임되었다. 1956년 스탈린 비판 후, 민중의 요망에 의해 수상에 복귀되었지만 소련군의 개입에 의해
데모가 극렬화되어 수습불능상태가 되었다. 그후 헝가리에서 추방되어 유고슬라비아대사관에 피신하였다가
신병의 자유를 보장받고 대사관 밖으로 나온 직후 소련 당국에 연행되어 1958년에 처형되었다.
그를 처형한 소련은 여러 나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1942 -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카다피(Qaddafi, Muammar al-) 출생
카다피 [Qaddafi, Muammar al-, 1942.6.7~]
리비아의 군인, 정치가.
수르트 출생.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대학을 마쳤다. 1965년 리비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집트의 나세르를 본받아 자유장교단을 결성하였다. 1969년 9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여행을 하는 틈을 타서 쿠데타를 결행하고, 혁명평의회 의장에 취임, 대령으로 승진되어 군 사령관을 겸임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군사기지를 철폐하고, 이탈리아인과 유대인을 추방하였다. 또한 석유가격을 일방적으로 공시(公示)하여 주요 석유생산국들의 시장독점 폐단을 타파하였고, 전체 석유회사를 국유화(國有化)하였다. 한편, 1970년부터 총리 ·국방장관을 겸임하다가, 1972년 총리직을 소령 자르드에게 물려주고, 그 자신은 사회체제의 이슬람화(化)를 꾀하는 문화혁명을 지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중동지역에 단일 아랍국가를 건설하여 이 지역에 대한 강대국의 영향력을 배제하려고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972년8월 이집트의 사다트와 아랍연합의 결성에 대한 합의를 보았으나, 10월 제4차 중동전쟁 후의 사다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여 양국관계는 긴장상태에 들어갔으며, 사다트가 암살된 후에도 긴장관계는 계속되었다. 한편 1980년 9월 시리아와의 합의로 양국의 합방을 발표하였으나, 뒤이어 발발한 이란이라크전쟁으로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그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입각하여 음주와 도박을 금지시켰으며, 이슬람공동체에 의거한 독자적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저서 《녹색서 The Green Book》(1976, 1980)에 밝혀져 있다.
- 청산리전투(1920.10.21~26)
1920 - 독립군,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대파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에서 홍범도·최진동이 이끄는 연합독립군단이 일본군을 대파했다. 당시 대한독립군과 국민회의
국민군 및 군무도독부는 대한군북로독군부로 연합하고 만주 봉오동에 집결해 강력한 국내 진입전을 수행했다. 6월 4일 삼둔자전투에서 국내군이 후쿠에[福江]가 인솔하는 일제 헌병순찰 소대를 격파하자, 일본군의 야스카와[安川二郞] 소좌가 군대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에 진입해 독립군을 공격했다. 대한군북로독군부는 봉오골 주민을 대피시키고 마을을 소개한 다음
요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일본군 추격대대가 봉오골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자, 독립군은 일본군을 포위망으로 유인해 3면에서
집중사격을 퍼부어 일본군을 대파했다. 봉오동전투의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다.
1895 - 마르코니, 무선 전파 라디오 발명
1895년 6월 7일. 이탈리아 볼로냐 지방의 한 언덕에서 마르코니(Marconi, Guglielmo, 1874~1937)라는 젊은 과학자가 금속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금속판은 유도코일을 통해 공중선과 연결돼 있었다. 맞은편 언덕에서 열심히 검파기를 들여다보고 있던 그의 조수가 순간 벌떡 일어서더니 공중에 총을 쏘았다. 마르코니가 보낸 전파신호가 검파기에 포착됐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시공을 초월해 전파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과학자의 집념이 확실히 증명되는 동시에 라디오가 지구상에 태어나는 순간이기도 했다.
무선통신의 가능성을 입증해 보인 마르코니의 발견에 대해 이탈리아 정부는 무관심했다. 대신 영국 우전성이 마르코니를
전면 지원, 이듬해 브리스톨해협 횡단 무선전신 실험에 이어 1902년에는 2천5백㎞ 떨어진 선박과 육지와의 교신에도
성공했다. 5년 뒤 마르코니와 영국이 합작한 마르코니 무선전신회사는 대서양 횡단 무선전신 서비스를 상업적으로 시작했다. 1920년쯤에는 선진국 대부분이 무선전신 서비스를 도입했다. 이후 주파수 변조장치가 개발되면서 음성과 음악을 멀리까지 보내 들을 수도 있게 됐다.
1922년에는 미국에만도 6백여개의 라디오 방송국이 생겨 1백만명 이상이 라디오를 청취하게 됐고, 영국에는 BBC방송이
설립됐다. 선박과 항공기에 라디오장치를 설치하는 것은 거의 필수가 되다시피 해졌다.
마르코니의 라디오는 인류 역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1879 - 덴마크의 탐험가, 민족학자, 인류학자 라스무센(Rasmussen, Knud) 출생
라스무센 [Rasmussen, Knud (Johan Victor), 1879.6.7~1933.12.21]
그린란드 출생. 개썰매로 아메리카 북극권 횡단여행을 하여 당시로서는 가장 긴 횡단기록을 세웠다. 이 횡단여행을 통하여 그는 광대한 북극 지역에 사는 거의 모든 에스키모 부족들을 연구했다. 어머니가 에스키모 혈통이었기 때문에 그는 에스키모인들에게 더욱 애착을 가졌다. 실제로 약 4∼5년간 최북단인 그린란드 북서부의 극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과 함께 살면서 순록 사육의 가능성을 연구했고, 1910년에는 그린란드 툴레에 연구소를 세우기도 했다.
연구소는 그 지방 주민들에게 교역 중심지를 제공하는 한편 탐험 기지로 삼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이즈음 그는 툴레에서 북동부 해안까지 그린란드의 내륙 빙상을 횡단했고, 그린란드 북부 해안지역을 탐험했다. 또 그린란드 동부의 아마살리크에서 에스키모 전설을 수집하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에스키모들의 이주 경로를 따라 탐험여행을 했다.
우선 그린란드와 베링 해협 부근에 사는 모든 에스키모 부족들을 조사·연구했고, 캐나다 북동부 지역을 조사한 다음 대륙을 가로질러 알래스카의 배로 곶까지 갔다. 이 탐험에서 에스키모 문화의 동질성을 확인한 그는 에스키모인들이 북아메리카 인디언과 같은 계통의 민족이며 아시아에서 옮겨 갔다는 가설을 세웠다.
이런 가설을 바탕으로 하여 《아메리카 북극권을 넘어서 Across Arctic America》(1927)라는 저서를 남겼다. 이 밖에도 지도 제작, 고고학과 민족학적 연구를 통하여 과학 서적을 비롯하여 신화·전설·민요를 수집했으며, 저서로 《아메리카 북극권을 넘어서》 외에도 《북극해에 접한 그린란드 Granland, Langes Polhavet》(1919)가 있다.
1863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작곡자 그루버(Gruber, Franz) 사망
그루버 [Gruber, Franz (Xaver), 1787.11.25~1863.6.7]
오스트리아의 오르가니스트.
1816년 오베른도르프의 교회 오르가니스트로 취임. 1818년 크리스마스이브에 같은 교회 부목사 J. 모르의 시에 기초하여 《거룩한 밤 고요한 밤(Stille Nacht Heilige Nacht)》을 작곡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yahoo
작곡가, 성가대지휘자, 오르간주자, 음악교사, 화가 등으로 다재다능했던 그루버(Franz Xaver Gruber)는 1787년 오스트리아북부 호흐부르크의 가난한 직조공 집의 아들로 출생했다. 역시 어릴적부터 음악을 좋아한 그는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후 교사 안드레아스 페테르레크너 등 몇 후원자를 만나 가업을 대물림하기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
음악공부를 한다.
18살때 교회반주자 게오르그 할트도블러에게 3개월 오르간을 배우면서 이미 예배반주를 시작했다. 1807년 안스도르프의 음악교사로 부임, 교장과 관리인, 교구 오르간이스트를 겸직했고 1816년엔 니콜라스교회 음악책임자까지 겸임하다가 29년 베른도르프 교사로 승진한다. 1835년에는 할라인교회 성가대지휘자로 부임, 63년 숨질 때까지 사역했다.
김삼 -한국 교회의 나침반 뉴스파워 2003/12/15 [15:24]
1862 - 독일의 물리학자 레나르트(Lenard, Philipp) 출생
레나르트 [Lenard, Philipp (Eduard Anton von), 1862.6.7~1947.5.20]
체코슬로바키아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 출생. 빈·베를린·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였다.
브레슬라우·아헨·하이델베르크·킬 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1907∼1931년 재차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1888년경부터 음극선 연구를 시작, 특히 음극선의 석영창(石英窓) 통과 가능성을 연구하였다. 이 결과는 부정적이었으나, 그 후 헤르츠의 힌트를 받아 1894년 알루미늄박(箔)의 창(窓)을 이용하여 음극선을 관외(管外)로 끌어내는 ‘레나르트의 창’의 제작(레나르트관)에 성공하여, 음극선 연구에 신기원을 열었다. 이 업적으로 1905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그 후 광전효과(光電效果)의 연구에 착수하여 입사광(入射光)의 에너지를 증가시키면 방출전자(放出電子)의 수는 늘지만, 에너지는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이것을 1905년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光量子說)로까지는 설명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인정하지 않고 ‘레나르트의 법칙’을 계속 주장하였다. 이 연구과정에서
광전관(光電管) 연구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고, 이온화를 일으키는 전자의 최저에너지를 정하였다.
또한 원자의 디나미덴 모형(模型)을 제안, 로렌츠전자론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원자스펙트럼도 연구하였다.
열렬한 나치스 지지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포함한 유대인의 과학을 비난하였다.
- 'The Lovers + Paul Gauguin(self-portrait)'
1848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고갱(Gauguin, Paul) 출생
고갱 [Gauguin, (Eugène Henri) Paul, 1848.6.7~1903.5.8]
고갱은 후기인상파 시대를 이끈 프랑스의 화가이다.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다가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마네·세잔·피사로·모네·용킨트 등 인상파 화풍의 그림을 수집했고, 35세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886년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체류하면서 색채연구에 전념했고, 이듬해 4월에는 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에 건너가 잠시 머무른 뒤 12월까지 다시 퐁타방에 체류했다. 마르티니크 여행에서 열대 지방의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원시 공동체의 매력을 경험했다. 1888년 10~1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공동 생활을 시작했지만 성격 차이로 인한 잦은 충돌과 고흐의 정신병 발작 현상 때문에 결국 결별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1891년 마침내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 형태의 윤곽선을 단순화하고 넓은 화폭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하며 토착민들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화폭에 담아냈다. -브리태니커
"예술은 표절이거나 혁명이다."
- 폴 고갱
1502 - 교황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출생
그레고리오 13세 [Gregorius XIII, 1502.6.7~1585.4.10]
본명 우고 부옹콤파니. 북이탈리아의 볼로냐 출생. 볼로냐대학교에서 법학교수를 역임하고, 1565년에 추기경이 되어, 1572년 교황에 선출되었다. 트리엔트공의회의 법령에 따라 가톨릭교회의 내부개혁과 반종교개혁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교회법전의 출판을 추진하였고, 성(聖) 바르톨로메오의 학살,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항한 아일랜드의 반란 지원 등을 벌였다. 성직자 양성을 위하여 각지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특히 로마에 많은 신학교를 세워,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가 창건한 게르마니쿰 학료(學寮)와 그레고리우스대학교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동양 선교에도 노력하였으며,
1582년에는 율리우스력을 수정하여 그레고리력(曆)을 제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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