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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유년시절에 내가본 창녕 낙동강 전투

 

 

 

 

 

유년시절에 내가본 창녕 낙동강 전투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및 미 제24사단의 참전과 작전활동

 

 

6·25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부대는 미 제24사단이었습니다. 전쟁 발발시 제24보병사단은 일본 규슈와 혼슈 남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6월 30일 밤(한국시간)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고, 이에 맥아더 장군은 제8군 사령관에게 주일미군 중 규슈에 주둔한 제24사단을 파견하도록 명령했습니다.

 

허겁지겁 사령부만 이끌고 한반도로 넘어온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병력이 부족한 현 상태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기는 구조적으로 힘들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국군은 상당수가 붕괴된 형국이었고, 미군도 증파되고는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병력이 부족하여 전선의 상당부분이 무주공산으로 넓게 벌어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적의 우회 돌파를 수시로 허용하여 포위당하기를 반복하였습니다.

 

당시 전쟁의 핵심은 부산이었습니다. 부산은 대한민국이 외부와 연결할 수 있던 유일 생명선이어서 반드시 이곳을 확보하여야 했고, 반대로 적들에게 점령당한다면 적화통일이라는 비극으로 전쟁은 막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당장 지금의 부족한 전력으로 북한군이 부산 점령을 저지하여야 했는데, 그러기위해서 워커는 적이 우회 돌파할 수 없도록 방어선을 촘촘히 연결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우리의 군사력은 약했던 관계로 우리국군과 미군 부대는 밀리고 밀려 남으로 내려와 마지막 국가운명을 보전 할 수 있는 전선이 낙동강 전투이다. 6ㆍ25전쟁 당시 낙동강지구 전투라고 하면 1950년 8월부터 9월 중순까지 마산ㆍ왜관ㆍ포항 일대에서 참전용사, 학생, 유엔군이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낸 낙동강방어선 개념의 전투를 말한다.

 

아군 지휘관은 미 제24사단(준장 John. H. Church) : 미 제19연대(대령 Ned d.Moore), 미 제21연대(대령 Stephens), 미 제34연대(대령 Charles Beauchamp), 한국군 제17연대(중령 김희준), 미 제9연대 (미상), 미 제27연대(대령 Michaelis), 미 제5해병연대(중령 Raymond L.Marray), 미 제23연대 제1대대 , 낙동강일대 방어는 주로 미군이 하고, 동북부 산악지대는 국군이 맡았습니다.

 

 

유명한 낙동강 방어선 창녕전투 [昌寧戰鬪]

6·25전쟁 당시 낙동강 돌출부인 창녕∼영산 지역에서 미 제2사단이 북한군 제1군단 예하의 제4사단과 결전을 벌인 전투이다.

낙동강을 사수한 방어전투이다. 전투기간은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17일까지이다. 미 제2사단은 8월 하순 제24사단에게서 작전지역을 인수받아 제9연대를 영산 정면의 부곡리에서 남지까지, 제23연대를 창녕 정면, 그리고 제38연대를 현풍 정면의 강안고지에 각각 배치하여 진지 편성에 주력하고 있었다.

 

반면 북한군 제1군단 예하 제2공격집단은 제9사단이 8월 말경부터 제9연대 영산 정면에, 김천에서 재편성을 완료한 적 제2사단이 창녕 정면에, 적 제10사단이 현풍 정면 낙동강 대안에 집결하여, 8월 31일 오후 10시를 기해 최후 공세를 준비하였다.

8월 31일 적 3개 사단의 기습으로 9월 1일 미 제2사단의 작전지역이 돌파당하여 낙동강 동쪽의 오봉리(吾鳳里)∼주매리·본초리(本招里) 선에서 저지하였다. 이후 미 제2사단 작전지역은 창녕과 영산의 2개 지구로 양단되었고, 적 제2·제9의 2개 사단과 대치한 상태에서 반격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창녕 일대에서 9월 15일 미 제2사단장 케이저(Lawrence B. Keiser)는 먼저 낙동강 동쪽지역, 곧 오봉리∼본초리 선에서 저항하는 적을 낙동강 서쪽 대안 너머로 쫓아버린 다음, 낙동강의 도하지점에 교두보를 확보하여 다음 작전을 준비하려 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의령군 방면 북한군은 영산, 남지방면으로 적들이 강을 건너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고령군 쪽 적 부대는 이방면을 거쳐서 대합면 신당과 주매 내울 사이에 있는 구룡산으로 침투 했다. 북한군 4군단은 고령군에서 도하 작전을 전개 하여 낙동강을 건너 창녕 5km가지 접근 했었다. 구릉지대 만 아니면 쉽게 창녕을 점령 할 수 도 있었다. 화왕산 줄기 따라 밀양까지 연결되며 다음은 부산이 이었다.

 

 

북한군 적군 제2사단의 공격이 아무런 엄호가 없는 천혜의 자연 조건인 사지포늪과 야산 구릉지대로 진격하여 오므로 적의 행동이 미 정찰기에 노출되어 비행기 공습으로 막아 낼 수 있었고   영산 방면 의 제 4사단(소장 이권무)16연대(대좌 최인덕), 17연대(대좌 김관대), 18연대(미상)치명상을 입었던것도 구릉지대에 화왕산으로 건너 갈수 없도록 국도 5호선이 막고 있었으며  화왕산이 적에게 넘어 갔다면 밀량은 시간문제이며 전쟁 상황은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내가 살던 마을인 대합면 등지리 신안동은 구마선 국도5호선 서쪽지역으로 1950년 7월말에서 8월까지 미군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우리나라 최후의 보루로 진지를 구축하여 싸웠던 곳이며 이곳 대합면 등지리 신안동 부근에는 미 24사단 산하 대대 본부가 주둔 하여 있었다.

 

 

 김천을거쳐 고령에서 낙동강을 건너서  현풍방면으로 온 북한군 38연대 중 대대 병력이 창녕 대합면 150고지인 태백산을 점령하고 능선 따라 내려와 미군 대대본부를 점령하려는 것을 먼저 미군이 감지하고 멀리서 대포로 산 정상을 공격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이산 정상과 미군주둔지와 불과 직선거리 300m이였다. 대합면 전투에서 적군이 전멸한 현장을 이모 집이 있었던 내울리 구룡산 정상과 고모가 살던 신당 옆 사지포에서 창녕을 향하던 인민군과 현풍에서 태백산을 공격해온 인민군들이 죽어있던 모습을 전쟁 후 어린이 놀이던 구슬대신 탈피 따 먹이하기위해 탄피 주어려 다니다가 비참한 모습들로 죽어간 인민군 시체를 목격했다. 구룡산 정상에서 일렬 횡대로 참호속에서 총을 잡고 죽어간 어린 인민군 모습과 태백산 정상에서 대포공격을 받고 목과 팔다리 잘려나간 시신을 보고 소름 이 기치도록 무서웠다.

 

 

이 전투의 내용과 전과에 대하여 포로가 된 적 제2사단 제17연대 군의관의 진술에 의하면 적 제2사단은 그 동안 전사 1,300여 명, 부상 2,500여 명의 손실을 당하였다는 6.25전사 기록물 인 『낙동강돌출부작전 개관』에 기록되어 있다. 반면 미 제2사단도 제1해병임시여단을 포함하여 많은 손실을 입었으며 가장 손실이 큰 미 제23연대의 전투력은 38%로 감소되었다고 한다.

 

 

우리주민들은 마을을 미군에 비워주고 국도 5호선 건너편 동쪽마을인 등지리 무솔 마을로 피난하였기때문에 국도 건너편 지역의 미군 전투 행위를 목격할 수 있었다.

 

워커장군은 낙동강 방어성공요인은 그 후 제5공군이 제공한 항공 지원 외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고  기록 했다. 낙동강 전투가 초기에는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어 강 건너 편 북한군주력 부대의 도하 작전이 완료되었을 즈음에 격렬한 미군기의 포격은 계속되었다,

 

 

지형적 조건상 피란하지 아니하고 잘 버티어온 마을이 한 사람의 무모한 오인 행동으로  온 동내가  순간 불바다로 변하여 주민 7명이 전사했으며,미군의 군사 작전상 소개 명령으로 결국은 8월초 대합면과 이방면 주민들은 고암면을 감골 고개(화왕산)를 넘어서 밀양군으로 피난을 갔다. 마지막 고향을 등지는 고개 위에선 사람들의 슬픈 모습은 비참하기가 말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10월에 맥아더 장군에 의한 50. 9.28 인천상륙 작전으로 인민군들은 작전상 황급하게 후퇴 하였다. 우리는 피난지에서 돌아 왔으나 남아있는 것은 북괴군들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다발총 등 무기류와 고장 난 미군의 탱크와 폐허가 된 마을뿐이었다.

 대대로 무려 받은 귀중품이며 생활에 도움되는 살림살이 모두 불타 없어지고 격전 현장에는 피아 구별 없이 전사한 군인들의 시신이 격전지 현장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민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위하여 임시 거처로 움막을 짓고 살면서 때늦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그해 겨울부터 집을 다시 지어 살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 전쟁의 상흔은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오래도록 남아서 가난의 굴레로 우리를 괴롭히는 작용하였다.

 

 

일생을 살아가다보면 불우한 세대와 축복받은 세대가 분명히 있어 보인다. 지금 자라나는 이세들은 얼마나 축복 받은 세대인가 축복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 후 주민들은 몇 년에 걸쳐 마을을 재건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무모한 악의 노름이며 김일성의 개인적 정치야욕에 의하여 귀한집 자식들이 아무런 보상없이 전쟁의 소모품으로  죽어갔으며 지도상에 이름만있었던 대한민국에 자유 민주주의를 지켜주기위하여 수만리 이국  땅에서 세계 일등국가의 귀한집 자식들이  비참하게 죽어간 광경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 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시 전쟁만 일어나지 아니하였드라도 오늘날 남과북이 이렇게 긴 세월 대치 하지 아니하였을것이며 적대감도 없을것이라는 생각을 가질때 마다 향후 통일이되고  세월이 지나면 김일성은 영원히 우리 후손들로부터 용서 받지 못할 정치인으로 지워지지 아니하고 기억 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이 정한 이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