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한국의 굴지은행인 여의도 본점 국민은행 강정원 (59세) 행장은 “녹색금융경영”을 새 경영화두로 내세워 직접 자전거로 여의도에 흩어져있는 4개 지점을 순회 방문할 것이라고 하며 자전거타기를 권장하는 가벼운 친환경활동부터 친환경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아이디어라고 한다.
그동안 우리기억 속에서 잊어가기만 하던 자전거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는 것 같아서 참 듣기 좋은 의식의 발상 같은 생각이 든다.
자전거는 바퀴 수에 따라서 외발자전거. 두발 자전거, 세발자전거 가 있고 대종울 이루는 두발 자전거로는 폴딩자전거, 일반자전거(짐자전거등도 있죠), 사이클, 산악자전거(MTB), 리컴번트, 등이 있다. 또한 사람이 타는 수에 따라서 1인용, 2인용, 4인용등도 있습니다.
용도에 따라 로드용 자전거(포장된 도로용) : 싸이클, 리컴번트, 미니벨로, 로드런너 등이며, 트라이얼 자전거(일명 묘기용) 로는 BMX 있고 크로스컨트리용(XC) 자전거 (일반적인 산악지형) : MTB , 프리라이딩용 자전거 (조금은 산이 험한 지형) : MTB, 다운힐자전거 (거의 모든산을 질주하여 내려오는데 주로 사용) : MTB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분류해두고 보면 자전거라는 이름을 두고 꼭 정해서 한 곳에서만 탈 수 있는 그런 것은 기구는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취양에 따라 자기가 선호하는 자전거를 구입하여 타는 것이다. 그리고 좀 여유가 있고 즐기기를 좋아하여 이 모두를 소유하고 게신 분들도 있고 소수이긴 하지만 상당수의 자전거 메니아들은 보통 2~ 3대를 가지고 게신 분들이 많습니다.
자전거에 관련한 이야기는 60-70년대 산업사회를 지나온 40대-50에 연령층 사람들한테 제일 먼저 접했던 문명의 이기이기도 했다. 어쩌면 어린이시절 타보던 세발자전거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온 힘을 다하여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비틀거리며 달리던 일이며, 좀 성장하여서는 지러렁 지러렁 거리며 울텅 불텅 한 학교 길을 달리며 등하교한 추억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시골이나 도시에서도 조금 여유 있는 집에서 자란사람들은 짐 운반수단인 일반자전거를 접 할 수 있었고, 도시에서 자란 청소년에게는 로드형 (포장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싸이클이 인기가 있었으나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은 못되었다. 당시에는 청바지에 입고 싸이클을 끌고 길거리를 지나가기만 해도 그것 자체만으로도 특권층 자제로 대접되며 부와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요사이 청소년이 외제 수입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것 보다 더한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런 부러움의 대상이던 자전거에 대하여 나는 남다른 추억이 있다. 학창시절 내가 살았던 부산 서대신2가동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살다가 간 당시구획 정리가 된 규격 마을 로 일본인들이 물러간 자리에 그 후 부산 시 거주하던 사람들 중 당시 최고 부자들과 권력층에 속한 사람들인 부산시장. 지방법원장. 지청검사장, 은행지점장, 대학교 총장, 각 기업체사장, 병원장 등 모여 살았던 저택들로 채워져 있었던 곳이다.
어쩌면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특권층으로 인식되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동내는 가난한 한국인들이 대대로 터 잡아 살아온 계획도시바깥 마을 이였다. 그러나 한 구역 권 안에서 도로 하나 사이를 두고 그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삶의 모습이 다르고 현실에 대한 의식도 같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 우리 집에서 내가 나가던 교회에 가려면 매일 이 집들을 지나쳐야 했다. 그러다보니 길 건너 동내이지만 나한테는 마을이 이웃처럼 여기어졌고 거대한 저택이지만 대충 누가 살고 있는지 조금만 관심 있으면 누구내 집인지 금방 알 수 있을 정도이었다.
당시 나는 소년이었지만 교회 열심히 다녔다. 인류의 조상이 하나님의 말씀과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여 인간에게 죽음이 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으면 죽어서는 구원을 받으며 살아서는 영생한다고 하는 친구의 권유를 받아드려서 어린나이의 동생과 사별한 죽음에 대한 상처를 누구보다 먼저 받은 가슴속에는 이 세상에 인연의 이별과 죽음만큼 싫었던 것은 없었다. 죽음을 벗어나보겠다고 나는 교회 반사 선생님 설교말씀을 들은 후부터는 시간 나는 데로 새벽 기도를 열심히 다니었다.
새벽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오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하얀 장미꽃과 붉은 장미꽃들이 이슬 먹은 체 환하게 곱게 피어 긴 담벽과 울타리와 대문을 장식하고 있던 골목의 어느 한 대문 앞에서 나는 하얀 잠옷을 곱게 차려 입은 소녀 천사를 난생 처음 보았다.
맑고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장미꽃 넝쿨타고 들여오던 그 아침은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공간의 조화 속에 티 없이 순수한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매력적인 무언의 표현 이었다. 더욱 가슴 설레게 한것은 소녀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백옥처럼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미소를 머금은 매력이 나를 강하게 압박하며 닦아와 주었다. 그 해맑게 비처지는 속에서 지어진 아름다운 미소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고 생각 됩니다.
이 이후에도 내가 고교 시절을 끝마치기까지 청초한 난향기가 창을 타고 퍼져오듯 끊임없어 부드럽고 맑은 향기로 변하여 가끔 바람 타고 하늘을 채워 주었습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흘러가던 시간 속에 어느 날 나의천사는 깊은 병마에 사로잡혀 신음하고 있었나봅니다. 꽹과리 치며 굿을 하는 소리가 대문으로 흘러 나왔으며 여자친구가 아프다고 문병 온 두 남학생이 경주용 사이클을 가지고 온 것을 대문 앞에서 나는 볼 수 있었다. 소녀의 어머님이 하시는 말이 너무 아프기 때문에 문병을 뒤로 미루시고 받아주시지 아니했다.
그 때 내가 자전거에 대하여 새로운 정을 마음속에 가지게 되었으며 나의 바람은 나의 천사가가 다시 몸이 회복하여져 저 사이클로 친구들과 신나게 경주할 수 있기 만을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도 했는지 모른다. 그 후 병을 회복하여지었고 자전거에 대한 생각도 멀어지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으며 이제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아름다운 자전거에 대한 남모를 추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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