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할아버지·할머니가 손자 교육한다 | ||||||||
2008 02/19 뉴스메이커 762호 | ||||||||
격대교육의 부활 삼보컴퓨터 이용태 창업자 매달 한번씩 10년째 실행
이기적 유전자, 이기적 직장인, 이기적 노후…. 올 초부터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이기적’이라는 수식어일 것이다. 사회가 점점 각박해지고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살아남기’가 횡행하면서 새로운 사회적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이전에 ‘이기적’이라는 말은 일종의 금기 단어였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자면 이기적 자아로는 자칫 따돌림을 당하기 쉽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이기적’ 키워드가 사회를 휩쓸면서 이른바 ‘이기적 신드롬’이 일고 있다. 수명 연장과 베이비부머들의 퇴직과 맞물려 ‘이기적 노후’가 여기에 가세했다. 한 신문은 외손자 양육에 사생활을 뺏긴 ‘장모들의 반란’이란 기사를 다루었는데 이게 바로 ‘이기적 노후’의 한 단면일 것이다. 이 신문은 손자를 맡지 않는 노하우를 담은 이른바 ‘장모 5계명’까지 소개했다. ‘키우더라도 확실하게 양육비를 받자’ ‘여유가 있다면 양육 도우미를 붙여주자’ 등과 같은 5계명을 보면 육아를 떠안은 장모들의 사정에 공감가면서도 왠지 씁쓸함을 지울 수 없다. 아버지 교육은 감정 치우치기 쉬워 ‘이기적 신드롬’은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전통적인 부모 윤리인 ‘헌신’이 사라지고 있다는 신호탄이 아닐까. 이는 ‘이기적인 자녀’들이 부모를 그런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우리나라의 부모 자녀 관계가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도구적’인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부모의 소득이 낮을수록 자녀들의 발길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기적 가족’의 시대, 나아가 가족해체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징후라는 생각마저 든다. 장모들의 반란에서 보듯이 이제 부모가 자녀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가족해체 시대일수록 역설적으로 ‘가족’의 울타리는 더없이 중요한 자산이다. 일부에서는 이기적 부모와 자녀들로 가족해체의 몸살을 앓고 있지만 가족공동체의 끈을 잘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이는 부모나 자녀가 이기적인 욕망을 한발씩 물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21세기에 조선시대와 같은 전통적인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기대한다는 게 애초 불가능하지만 다만 그 ‘잔영’만이라도 집안에 드리우면 행복한 웃음꽃이 피어나는 가족을 만들 수 있다. 삼보컴퓨터를 설립한 이용태 창업자(박약회 회장·퇴계학연구원 이사장)에게서 그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다.
이용태 회장은 벌써 10년째 매달 첫째 주 일요일에 손자 손녀들을 집으로 불러 직접 교육을 하고 있다. 손자 손녀가 모두 10명. 이 자리에서 자신이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았듯이 자신도 그 역할을 하는데 이른바 ‘격대교육(隔代敎育)’의 부활이다. 격대교육이란 할아버지가 손자, 할머니가 손녀를 맡아 잠자리를 함께하면서 교육한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교육하면 감정에 휩쓸리기 쉬워 오히려 자녀교육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부모는 자녀에 대한 기대가 높고 욕심이 앞서 자녀가 잘 따라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질책한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주눅이 든 채 마음속에는 저항심이 생겨 교육이 제대로 될 리 없다. 이런 때는 지혜와 경륜 등을 갖춘 할아버지가 감정을 통제하며 자녀들을 교육하기에 더 적격이다. 조부모는 세상사를 관조하는 나이가 되어 손자 손녀를 소중하게 여기고 아이의 생각과 요구를 귀담아들을 여유가 있으며, 감정을 절제한 상태에서 타이르므로 아이가 저항 없이 그 뜻을 따르기에 저절로 교육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격대교육은 우리 선조들이 예전부터 해오던 자녀 교육의 한 방식이었다. 이 회장이 매월 한 번씩 손자 손녀들을 교육하는 방식은 격대교육의 현재적 수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핵가족이 보편화한 시대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 손녀와 함께 사는 경우도 드물다. 또 손자 손녀들 역시 학교공부나 직장일로 바쁘다. 이 회장이 매달 한 번씩 손자 손녀를 집으로 불러 한두 시간씩 토론식 강의를 하는 것은 작금의 이기적인 세태를 반영한 합리적인 교육방식이다. 일종의 절충안인 셈이다. 손자 손녀들도 한 달에 한 시간씩이면 개인적 자유를 침해받지 않고 할아버지의 지혜를 배우는 데 시간을 할애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삶의 멘토 돼주셨다” 인터뷰하던 날 이 회장은 때마침 손자 손녀들과 격대교육 시간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의 생신날에 가족들이 모인 김에 며칠 앞당겼다고 한다. 교육방식은 이 회장이 직접 쓴 ‘이야기로 키우는 인성교육법’을 읽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순으로 진행한다. 10명의 손자 손녀 가운데 세 명은 유학 중인데, 이날은 큰딸의 장녀인 이소현씨(화가·북디자이너), 둘째딸의 장녀인 강수란씨(메트라이프 주임), 셋째딸의 차남인 인영빈씨(연세대 경영학과3)가 참가했다. 이 회장의 격대교육에는 친손, 외손을 가리지 않는다. 퇴계 이황은 친손과 외손을 구분하지 않고 가르쳤는데 무려 90여 명에 달했다. 이 회장은 이날 교육을 시작하면서 세 명이 각자 써온 편지를 먼저 읽게 했다. 할아버지에게 교육을 받으면서 느낀 점들을 편지에 담은 것이다. 강수란씨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멘토가 되었다면서 하나의 일화를 전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어려운 일은 남보다 5% 더 챙기고, 좋은 일은 남에게 5% 미루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실천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사무실을 청소하고 정리하며 어려운 일, 궂은일을 5% 더 했습니다. 반면에 칭찬받을 일이 있으면 남에게 미뤘습니다. 그랬더니 회사에서 더 인정받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그날 주제는 창의력으로, 먼저 맥도널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에 대한 책읽기로 시작했다. 책을 읽으면 그 내용을 정리해 자연스럽게 발표하도록 했다. 이어 그 내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활이나 자신의 직무에서 응용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말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이 회장이 그 내용의 핵심을 그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과 여기서 배운 지혜를 들려주면서 마무리했다. 이 회장은 인영빈씨에게 책을 읽게 했다. “레이 크로크 사장은 가장 좋은 햄버거를 만들었지만 햄버거에는 이윤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다만 햄버거와 함께 먹는 커피와 콜라 값은 남들처럼 제대로 받았다. 이것이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창의력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고 실천하는 데서 시작한다. 창의력이 최고를 만들어준다.” 이 회장은 “창의력은 ‘지금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생각해내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서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창의적인 생각의 출발”이라고 조언했다. 옛날에는 농사 짓는 일처럼 하는 일이 항상 같고 반복적이었기에 근면하고 성실하면 됐지만 지금은 경쟁사회이기에 매사에 열정을 갖고 혁신하지 않으면 도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도요타자동차가 자동차 왕국인 미국에서 자동차 황제로 군림한 GM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열중하라, 혁신하라’는 사훈에서 비롯했다고 한다. 모든 사원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고 이를 경영에 반영하면서 경쟁력을 높여나가 결국 자동차 황제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틈틈이 집안에 내려오는 가훈의 덕목과 자신이 겪은 경영 철칙들을 들려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강조하는 덕목은 “지고 밑져라”다. 남들에게 더 주고 자신이 손해 보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결국 승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이 회장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인데, 이제는 자신의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또 문제 해결 능력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능력에 대해서도 지혜를 들려준다. “우리가 접하는 정보가 진실인지, 날조된 것인지, 억측인지, 소문에 불과한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이를 구별하는 능력이 어쩌면 지식의 습득보다 더 중요하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아이들이 성장해서 중요한 위치에 있을 때 결코 소문만으로 결정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정보의 진위는 그가 기업 경영을 하면서 항상 겪는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결정할 경우 기업에 막대한 손해를 끼칠 수 있고, 심할 경우에는 기업의 존립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지고 밑져라’ 가훈 틈틈이 들려줘 이 회장은 한국의 ‘IT 전도사’로 통한다. 지금은 ‘자녀교육 전도사’로 통한다. 학원 강사와 대학교수를 지낸 경험을 밑천으로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단순히 옛날 방식이 아니다. 그가 기업현장에서 체득한 경험과 지혜를 들려주면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산 공부를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 회장은 삼보컴퓨터를 창업해 대기업으로 일궜지만 몇 년 전 자금난으로 경영에서 손을 떼야 했다. 그때부터 이 회장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게 인성교육이다. ‘이야기로 키우는 인성교육법’은 그가 회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집필했다. 이 회장은 “요즘 부모와 자녀 간,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 간의 대화는 길어봐야 5분을 넘지 못한다”면서 “이는 대화를 나눌 공통적인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가 이 책을 직접 쓴 이유는 바로 부모 자녀 간에 자연스럽게 대화하면서 인성교육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이가 엄마에게 교육받으려는 자세를 가졌다고 해도 아이를 붙들고 두세 시간 이야기할 거리가 없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했을 때 몇 분만 대화하고 나면 밑천이 떨어져서 더 이야기를 못 한다는 것. “모처럼 할아버지와 손자가 만나도 썰렁해요. 할아버지가 손자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5분이면 바닥이 나니까요. ‘공부 열심히 하느냐’ ‘어떤 대학에 가고 싶냐’ 등을 묻고 나면 대개 더는 화제가 없어요. 관심분야가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할 게 별로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말이 서로 물려들지 않으니까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죠. 아이들과 대화하려면 할아버지도 책을 읽든지 신문을 보든지 노력해야 합니다. 단순히 ‘옛날 할아비가 살았을 적에는…’ 식으로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명문가든 아니든 대부분 가정에서 손자들의 교육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맡았다. 할아버지는 손자와, 할머니는 손녀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 하면서 경험에서 얻은 지혜를 들려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부모가 직접 교육하는 경우보다 아이들 정서에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한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부모와 달리 한 세대를 건너뛰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혈연의 정을 나누면서 손자를 지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은 예의도 바르고 김치나 된장 등 음식도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다. 또 대인관계도 원만하다고 한다. 요즘에는 할머니가 기른 아이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젊은 부부가 홀로 키운 아이들은 밥이나 된장, 김치 등을 제대로 먹지 않고 패스트푸드를 선호한다. 반면 할머니가 키운 아이들은 군것질을 하지 않고 된장국과 김치 등 토종음식을 비롯해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 또 엄마가 키운 아이들은 낯가림이 심하지만 조부모가 기른 아이들은 누구에게나 잘 다가가는 등 대체로 사회성이 좋은 편이다. 한마디로 인성교육이 잘 돼 있는 것이다. 사윗감을 고를 때 학벌도 중요하지만 ‘사람 됨됨이’를 더 따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정 내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회장은 “사람들은 지금 세상이 도덕적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걸 개탄하면서 그 책임을 정부나 학교, 방송 탓으로 돌리고 있다”면서 “그러나 따지고 보면 젊은 세대나 어린 아이들이 문제가 있는 건 가정에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이야기로 키우는 인성교육법’ 집필
이 회장은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아이들에게 토론문화를 체득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격대교육 시간에도 손자 손녀들에게 자주 질문하고 토론한다. 복잡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해 당사자끼리 모여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는 대화와 토론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기업이나 사회, 국가가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21세기에 정작 절실히 요구되는 창의적인 인재는 “대화할 줄 아는 아이”라고 정의했다. 유대인들 사이에는 아버지가 매주 한 번씩 방문을 닫고 자녀와 마주앉아 인생의 상담자 역할을 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이에 못지않게 3대가 함께 하는 격대교육의 전통이 존재한다. 늦었지만 격대교육의 정신만이라도 되살려보는 것은 어떨까. 그 방편 중 하나가 이용태 회장이 손자 손녀들과 실천하고 있는 월 1회, 1시간씩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격대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손자 손녀에게 할아버지의 지혜와 경험을 들려주면서 그들에게 인생 멘토의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되겠다는 ‘목표 인간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이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좋은 습관과 태도를 갖도록 자극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설날에 3대가 모이는 집안의 경우 격대교육의 방안에 대해 의논해보는 게 어떨까. 기획·취재|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 ·사진|김석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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