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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진각 관광 안내
맑은 하늘아래 쏟다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동생과 함께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평화로운 파주 들판을 지나 전운이 거두어지고 이제 평화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려는 한강의 아름다움경관을 감상하며 자유로 따라 임진각에 나가보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임진강하구 3.2㎞의 강폭 건너편이 북한 땅 관산 반도이다. 동에서 서로 한반도의 허리를 훑으며 흘러온 한강이 오두산 앞에서 임진강과 만난다. 강은 관산반도와 김포시 사이를 지나 서해로 흘러들어간다. 남북의 두 강을 어루만지며 서해로 떨어지는 해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이곳은 일몰관경이 일품이다.
임진각은 임진강변에 위치한 임진강역에 있다. 자유로를 따라 북으로 가면 도라산역과 민통선 이남의 임진강역을 연결하기 전에는 임진강역이 경의선의 남측 최북단 역이었다. '달리고 싶다'던 철마가 예전 그 모습으로 서있다.
임진각 뒷 편에 임진강을 옆에 끼고 있다. 임진강 철교 앞에 있는 자유다리는 2000년 이후 민통선 철조망을 북쪽으로 20m 정도 옮기고 나무다리를 놓아 일반에 개방했다. 원래 한국전쟁 직후 남북 포로 교환을 위해 놓았던 임시 다리를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다리 끝 철조망 위에는 국토 종단을 끝낸 학생들이 남겨놓은 태극기가 무심한 바람에 휘날린다. 통일의 소망을 담은 노란 리본도 매달려 있다. '가족을 찾습니다'. 남측의 이산가족들이 전쟁 통에 헤어진 혈육을 찾기 위해 철조망에 달아놓은 플라스틱 안내판. 안내판 한편에 적혀 있는 e-메일 주소가 더욱 마음을 서글프게 한다.
임진각은 이제 동족상쟁이라는 남북 전쟁 후 이데올로기의 첨예한 대립과 적대감을 극복하기 위해 북에 대한 자세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을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호소하던 관광명소에서, 우리사회가 앞으로 남북 공동번영의 새 길로 나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세계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덕으로 변화 되었다.
건립의 역사적 배경에는 빼 놓을 수 없는 남북 적대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었으니, 그 유명한 야만적인 1.21 전쟁 도발 사태이다. 당시 생포자인 김신조 이하 일당 31명이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직접지령아래 1968년 1월 21일 밤에 침투하여 일어난 사건으로 북한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북한의 통치자 김일성은 무력도발은 한국의 통치자를 암살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약화시킨 다음 한반도를 폭력으로 공산 통일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때 북한의 124군 부대 소속 31명의 테러리스트들(전원 20대 청년들)이 청와대를 기습,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청와대 근처까지 진격했다가 한국 군경의 합동작전에 의해 중도 차단되었다. 당시 북한 테러리스트들의 국가원수 암살은 실패했지만 이들 테러활동으로 인해 많은 민간인들과 군경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들은 모두 68명이고 66명이 부상했다. 적 사살 생포 및 자수자들은 29명이고 행방불명자 2명이었다. 이들 테러리스트들 중 유일하게 한국경찰에 생포된 김신조는 "박정희의 목을 따러 왔다"고 청와대 기습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이사건 이후 1971년도 박정희 대통령은 1953년도 6.25 전쟁포로 12,773명이 북한으로부터 자유를 향해 귀환하였던 이곳을 평화를 기도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에서 상징적 의미로 명명된 자유의 다리를 중심으로 임진각이 건립하였다. 그리고 다음해는 중 ․ 미 냉정관계 종식과 해빙의 바람을 타고 당시 이후락 (李厚洛 1924∼ 군인·정치가. 울산(蔚山) 출신)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비밀 특사로 보내어 남북간대치상태를 상호 협조 관계로 유도하여 남북7.4 공동선언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나 이후락 평양 단여 왔습니다" 라는 발표로 국민들을 놀라게 했으며 극한상황에 자결하기위하여 독약을 후대했다는 일화도 있었지요.
이런 시대 상황에서 임진각은 우리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는 7천만 민족의 가슴속에 한 맺힌 관광 장소였다. 희망이 보이지 아니하고 울분하게 하는 그런 곳이었다. 아직도 임진각에는 슬픔이 있다. 임진각에는 눈물이 있다. 민족의 가슴을 서로 겨눈 6.25전쟁의 상처와 남북 분단이라는 뼈아픈 역사의 흔적들이 바로 눈앞에 오늘도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 위에 아직도 서려 있으며, 임진각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불과 7km 남쪽에 위치에 있기에 더욱 애잔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곳이다. 여기에서 14km 만 더 가면 고려수도 개성인데 왜 서로 신뢰하고 왕래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자유의 다리에 반대되는 또 다른 다리 하나가 있으니 미루나무 도끼 만행사건으로 잘 알려진 군사분계선북쪽에 쪽에「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있다. 경기 파주시 진서면(津西面) 판문점(板門店)에 있는 다리로 군사 경계선이 지나는 공동경비 구역의 서쪽을 흐르는 사천(砂川)에 놓여 있다.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 다리는 원래 널문다리라고 하였는데, 1953년 7월 휴전협정 조인 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포로 교환을 비롯하여 남북적십자회담 대표들의 왕래 등 많은 사건들이 이 다리를 통해 이루어졌던 곳이다.
임진각은 앞뜰과 넓은 주차장을 중심으로 하여 전쟁기념의 장, 평화의 장, 통일염원의 장, 장단 콩 전시장으로 대략 나누워 볼 수 있었다.
임진각이 서있는 본관 건물 앞에 마당에 해당되는 전쟁기념의 장은 대표적인 통일관광지로서 1950년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에 사용된 각종 유물과 전적기념물이 전시되어 하고 있다.
평화의 장에는 2만 명의 관람객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잔디언덕위에 평화누리공원과 다양한 조형물과 평화를 추구하는 각종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장소와 21세기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여 온 국민의 염원을 담아 세운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는 조형물을 비롯하여 생명촛불 파빌리온 ,통일기원 돌무지,글로벌카페 안녕,음악의 언덕이포함 하여 조금 떨어진 반대 언덕에 21톤의 육중한 무게로 평화의 염원을 담아낸 평화의 종(The peace Bell)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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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염원의장에 해당되는 곳인 망배단(望拜壇)은 지나가는 관광객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며 가슴 아프게 하는 곳이다. 두고 온 산하에 잠들어 있는 조상에 대한 사모 친 정과 북한에 살고 있는 친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뭉쳐 진 곳이기도 하다. 이념이란 것이 무엇이며, 정치권력이 무엇이건데 체제수호를 위하여 죽음보다 무서운 선을 그려두고 반세기가 넘도록 한 발자국 진전 없이 이런 슬픔 비극 속에 우리민족은 살아가야하는지 실향민의 입장의 마음이 되어보니 슬프기가 끝이 없었다.
장단 콩 전시장은 웰빙 명품 파주 장단 콩을 주재로 콩 역사, 문화, 재배. 가공식품 등을 전시하여 콩이 유익성과 우수성을 체험할 수 있는 테마전시관이며 앞으로 닥쳐올 세계자유무역협정체제아래 우리농업이 생산과 소비자가 서로 맞잡고 나가야할 농업의 미래를 지향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먼 훗날의 언젠가 통일은 우리 앞에 닿아오려니 그날을 위해 오늘의 역사 주인공들로서,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사랑스러운 가족들의 손잡고 열차로 또는 승용차로 한번쯤 임진각을 둘러보는 관광을 시도 해 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되지 나이할까 하는 그런 생각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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