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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태안 보물선 고려청자는 왕비의 혼수품?

  • 태안 보물선 고려청자는 왕비의 혼수품?
  • 연합뉴스
    조선일보 입력 : 2007.10.11 17:49 / 수정 : 2007.10.11 19:03
    • 목간(木簡)은 글자 그대로 나무에 쓴 글이다. 최근까지 학계에 보고된 400여 점의 국내 목간은 모두 통일신라 이전 것이었다. 종이가 보급된 고려 시대에는 굳이 나무에 글을 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최초로 고려시대 목간이 발견됐다. 주꾸미가 낚아 올린 보물선 태안선이 고려시대의 바코드격인 목간 십여 점을 선물한 것이다.

      국립해양유물전시관은 11일 고궁박물관에서 십여 점의 목간 가운데 판독 가능한 4점을 공개했다.

      각 목간에서는 ’탐진역재경대정인수(耽津亦在京隊正仁守)’, ’○○재선진(○○載船進)’, ’○안영호부사기일과(○安永戶付沙器一 衣+果 )’, ’최대경택상(崔大卿宅上)’ 등의 문구와 수결(사인)이 확인됐다.
    • ▲ 11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 2차 수중발굴 유물 중간결과 보고회에서 공개된 목간. 문화재청은 이번 목간을 통해 도자기 생산지뿐만 아니라 출항지, 거래관계, 운송책임자, 선박 적재 단위 등을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합
    • 각각 뜻을 풀어보면 탐진역재경대정인수(耽津亦在京隊正仁守)는 ’탐진(조선 태조17년 이전까지 쓰인 강진의 옛 지명)이 서울에 있는 대정(하급군관) 인수(인명)에게 보낸다’로, 최대경택상(崔大卿宅上)은 ’최대경 댁으로 보냄’으로 풀이된다.

      또 ○안영호부사기일과(○安永戶付沙器一 衣+果 )는 ’○안영 집으로 사기 일과를 보냄’으로 ○○재선진(○○載船進)은 ’○○이 배에 싣다’로 해석된다.

      목간에 등장하는 청자 인수자는 ’최대경’, ’대정 인수’, ’○안영(○은 성으로 추정)’ 등 3명이다. 이 가운데 ’대정 인수’와 ’○안영’ 앞에는 재경(在京)이라는 글자가 붙는다(○안영의 경우 공개되지 않은 목간에서 재경이라는 글자가 확인됐다).

      목간의 내용을 검토한 목포대 최연식 교수는 굳이 ’서울에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로 대정 인수와 안영이 최종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말단 군관에 불과한 대정 인수나 어떤 관직명도 붙지 않은 안영이 청자라는 상류층의 전유물을 사용했을 리 없으며 이들은 서울에 있는 중간인수자일 가능성이 높다.

      즉 고려시대 청자는 수요자의 주문에 따라 생산된 뒤 오늘날 농산물의 유통과 마찬가지로 여러 단계의 중간 상인을 거쳐 최종소비자에게 전달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최대경’은 누구일까? 고려의 대경(大卿)은 종3품 이상의 고위 관리를 일컫는다.

      제작기법과 도자기의 형태로 파악할 때 태안선에 실린 도자기의 제작연대는 12세기의 1.4 분기 이전이 확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11세기 후반-12세기 초.중반까지 재위한 고려 왕은 숙종(肅宗.재위기간 1095-1105), 예종(睿宗 1105-1122), 인종(仁宗, 1122-1146)이다.

      숙종-예종 재위 기간 고려사에는 단 한명의 대경(大卿)이 등장한다. 최씨 성을 가진 대경 최용(崔湧)이다.

      고려사 14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신축 16년(1121년) 춘 정월 정유 삭(朔)에 조하를 쉬었다.…기해(己亥)에 제(制)하기를 남녀의 제도는 가장 중대한 윤(倫)이니 제왕의 일어남에도 또한 그 내조에 힘입는 것이다. 가인의 위를 바르게 하려 할진대…좋은 배우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장차 진한공의 장녀와 대경 최용의 계녀로써 내직에 갖추고자 하노니 유사는 마땅히 예전(禮典)에 준거하여 이름(직명)을 정하여 아뢰라’

      예종은 재위 16년 째인 신축년에 진한공 왕유의 장녀와 대경 최용의 계녀를 귀비와 숙비로 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실제로 진한공 왕유의 장녀와 최용의 둘째 딸은 예종의 비로 입궁한 뒤 인종 7년에 각각 귀비와 숙비에 봉해진다.

      혹시 예종의 장인 최용이 목간에 쓰인 ’최대경’은 아니었을까. 최용은 왕실과의 혼사를 위해 강진산 청자를 대량 주문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청자를 싣고 개경을 향해 오던 배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듣고 최용은 하늘이 노래지지 않았을까. 왕과의 혼사를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 최씨 집안은 아마 온갖 부산을 다 떨어야 했을 테다.

      물론 추측에 불과하지만 ’최대경택상(崔大卿宅上)’이라는 다섯 글자는 900년 뒤 후손에게 드라마틱한 상상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