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이 지향한 청빈의 삶, 안동 만휴정을 찾아서
장호철(q9447)기자
▲ 송암폭포. 내륙에서는 보기 드문 장관인데 위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라 다소 왜소해 보인다. 위쪽에 만휴정이 보인다. |
ⓒ 장호철 |
'가난하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긴다'는 이 명제는 다분히 관습화된 이데올로기의 냄새를 풍긴다. 유배지의 문신들이 눈물겹게 노래하는 '님'에 대한 '단심(丹心)'이 분홍빛 연정이 아니라 저를 버린 임금에게 보내는 정치적 구애인 것처럼, 그것은 향촌에서 보내는 만년의 삶에 대한 일종의 강박으로 느껴지는 까닭이다.
안빈낙도는 한편으로 안분지족(安分知足)의 처세관과 함께 이들 사대부들의 성리학적 세계관의 언어적 표현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문한 탓에 나는 그들의 삶이 그들의 노래처럼 가난했고, 단사표음(簞食瓢飮: 대광주리 밥과 한 바가지 물)의 소박과 청빈이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 만휴정으로 오르는 길섶의 소나무. 이 숲에 가려 폭포는 잘 보이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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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곡 건너편 산기슭에 차분하게 앉은 만휴정. 다섯 칸짜리 건물이지만 위압적이지 않고 주변의 경관 속에 살갑게 녹아 있다. 왼편에 낸 일각문도 정겹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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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만휴정(晩休亭)도 빼어난 풍경 속에 있다. 만휴정은 인근 묵계서원에 배향된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만년을 보내려고 지은 정자다. 조선조 선비들이 가장 바람직하게 여긴 삶이 계거(溪居), 즉 계곡에 정자를 짓고 사는 것이었다는데, 이 정자에서 누린 보백당의 만년은 바로 그런 조건에 가장 가까이 있었던가.
동남향의 정자 앞은 적지 않은 규모의 계곡이다. 정자로 이어진 10여 미터 길이의 좁은 다리 밑으로 흐르는 것은 이른바 곡간수(谷澗水)다. 정자 위쪽의 넓고 평평한 너럭바위를 지나쳐 다리 아래 여울에서 숨결을 가다듬은 물은 이내 20여 미터 높이의 벼랑에서 수직으로 뛰어내리니 이 물줄기가 송암폭포다.
▲ 만휴정 앞을 흐르는 묵계(默溪). 거대한 너럭바위 위로 흐르는 물은 차고 맑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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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암폭포. 높이를 24m라 하지만 과장인 듯하다. 갈수기엔 물이 흐르지 않으니 사람들은 이 폭포의 존재를 지나쳐 버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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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나 오른쪽으로 휘어진 길을 오르면 좁고 긴 다리 너머에 만휴정이 차분하게 나그네들을 반긴다. 등 뒤로 낮은 솔숲을 두르고 정자는 마치 조신한 여염집 처녀 같은 단아한 자태로 서 있는 것이다. 왼편 추녀 두어 뼘 아래에 문을 열고 있는 일각문(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대문)의 모습도 정겹기는 마찬가지다.
이 땅엔 정자가 앉을 만한 수려한 풍경자리마다 크고 작은 누정이 세워져 있다. 이는 빼어난 산기슭마다 이름난 절집이 들어앉은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자연 경관을 인위적으로 가두거나 소유하지 않으려 하며 스스로를 기꺼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들이는 선인들의 자연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십년을 경영(經營)하여 초려삼간(草廬三間) 지어 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淸風) 한 간 맡겨두고
강산(江山)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송순>
정복의 대상으로 자연을 타자화 했던 서구인들과 달리 우리 선인들은 자연을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거기 인격을 부여했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 면앙정 송순의 시조는 조화로운 공존과 동화의 대상으로 자연을 이해한 선인들의 철학을 뚜렷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 만휴정. 드물게 앞은 개방하여 툇마루로 구성했고 뒤에는 양쪽에 온돌방을 들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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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 김계행은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다. 마흔아홉, 뒤늦게 대과에 급제, 쉰이 넘어서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이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나 부조리한 정치현실을 비판하는 상소를 끊임없이 올려 출사와 퇴사를 거듭해야 했다.
무오사화(1498) 이후, 그는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하였다. 여든일곱에 운명하면서 자손들에게 보백당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조선 초기 청백리로 뽑힐 만한 기개의 언명(言明)이다.
오가무보물(吾家無寶物) 내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유청백(寶物惟淸白)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뿐이다.
▲ 만휴정 일각문으로 이어진 좁고 긴 다리. 긴 통나무를 걸치고 시멘트로 마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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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간 바위 아래 띠집을 짓노라 하니
그 모른 남들은 웃는다 한다마는
어리고 햐암(시골뜨기)의 뜻에는 내 분인가 하노라.
<윤선도, “만흥(漫興)” 제1수>
▲ 정자 누마루에 걸린 보백당의 유훈. ‘내 집에 보물은 없다. 있다면 오직 청백뿐이다.’ | |
ⓒ 장호철 |
풍경을 풍경으로 보지 않고 거기 서린 고단한 삶과 역사를 넌지시 건네다 보는 것은 만만찮은 악습이다. 굵은 통나무 위를 시멘트로 마감한 다리 이쪽에서 만휴정을 바라보면서 바위 계곡을 건너다니며 그 기슭에 다섯 칸 정자를 지어올린 오백 년 전의 일꾼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터를 고를 굴삭기도, 부재를 실어 나를 트럭도 없었으니, 이 외진 골짜기를 등짐을 지고 오르내린 건 노비들이나 상민들이었으리라. 그들이 지어 낸, 빼어난 풍치의 정자에서 어찌 고담준론만 무르익었겠는가. 숱한 시인 묵객들이 부른 삶과 자연의 노래도 그윽했을 터, 그들이 남긴 시가는 상기도 편액으로 정자에 걸려 있다. 그게 그 시절의 삶이고 체제였겠지만, 이러한 하층 계급의 무한 봉사 위에서 봉건사회의 문예는 꽃을 피웠던 것이다.
▲ 뒤 언덕배기서 내려다 본 만휴정. 지붕의 옆면과 뒷면에는 풀이 무성하다. |
ⓒ 장호철 |
"가난을 예사로 여기면서도 여전히 성인의 도 좇기를 즐겨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장한가."
안빈낙도는 공자가 제자 안연(안회)에 대한 평가에서 유래했다. 그것은 소극적으로는 '몸을 닦고 분수를 지키는' 경지지만, 적극적으로는 자기 긍지 가운데 '도를 즐기는' 경지를 이른다.
▲ 보백당을 배향한 묵계서원. 서원철폐령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 있다가 최근 복원한 건물로 만휴정 인근의 국도 곁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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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설핏 기울면서 정자 앞 냇물이 하얗게 빛났다. 정자 앞자락을 적시며 흐르는 물은 바위벼랑을 뛰어내려 마을을 휘돌아 길안천(吉安川)에 몸을 섞는다. 보백당은 만휴정 앞을 흐르는 물을 '묵계(默溪)'라 불렀다. 정자 누마루에서 그 '말없는 물'을 그윽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노 선비의 실루엣을 얼핏 떠올리며 우리는 만휴정, 그 내와 산기슭을 떠났다.
7월 14일과 25일, 두 차례 다녀왔습니다.
2007-08-03 오전 7:54:13
조선조 선비들이 이상적인 삶의 양식으로 노래한 '안빈낙도'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며 그로 인한 강박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시작한 기사다. 안빈낙도에서 말하는 화석화된 가난이 말하자면 '단사표음'인데, 정작 이 땅에 널린 온갖 양반문화의 흔적들은 그 가난을 전제로 해선 존재가 불가능한 것들이다.
만휴정을 돌아보면서 그 시절에 그런 자리에 그 정도 규모의 누정을 짓는 것은 일정한 재력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다. 그러나 뒤에 청백리로 뽑힌 보백당의 실천적 삶과 그의 유훈을 통해 안빈낙도를 단순한 단사표음의 형식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듯하다. 그들 왕조시대의 사대부들이 지향했던 안빈낙도의 삶이란 일종의 정신적 지향이며, 성리학적 세계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런 요지로 쓴 기사였는데, 그런 생각이 얼마나 제대로 글에 드러났는지는 모르겠다. 별로 개운한 기분이 아닌 걸 보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묵계서원과 부근의 풍경을 담은 사진 몇 장 덧붙인다. 폭포를 제대로 찍지 못한 것도 아쉽다. 길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내려가서 찍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역시 제대로 된 그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발품이다.
<2007.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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