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최근 10만원권과 5만원권에 새겨질 고액권 화폐 속 초상인물 후보로 김구, 신사임당, 유관순, 장영실, 장보고, 안창호, 한용운, 주시경, 김정희, 정약용 등 10명을 발표했다. 국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지금까지 가장 인기가 있는 후보는 김구 선생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네티즌들로부터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은 10명 속에 들어있지 않은 다른 위인이란 사실이다. 당초 한국은행은 초상인물 선정에 화폐도안 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1차 초상인물 후보 2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 및 전문가 의견조사를 해 2차 초상인물로 10명을 선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고액권 화폐에 들어갈 초상후보를 정하기 위해 수년전부터 여론탐색을 했다. 그런데 여론조사 때마다 항상 2위를 두 배 이상 제치고 1위를 차지한 인물은 지금의 10명 속에는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지금도 한국은행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그를 집어 넣어야한다는 여론이 빗발치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집안시(集安市.지안시)는 길림성(吉林省.지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도시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와 마주하고 있다. 집안시의 북쪽은 길림성에서 두 번째로 큰 통화시(通化市)고, 서쪽은 요녕성(遼寧省.랴오닝성) 환인(桓仁.환런)시다. 집안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는 곳이다. 이곳엔 국내성뿐만 아니라 광개토태왕릉과 비석, 장수태왕릉, 천추묘, 오대묘, 환도산성, 산성하고분군 등 고구려 초기 유적과 유물이 밀집해 있다. 집안은 고구려의 5부중 계루부의 본거지로, AD 3년부터 427년까지(유리태왕-장수태왕) 424년간 고구려의 수도였다. 집안의 연평균 기온은 섭씨 6.5도로 인근 도시보다 따뜻한 편인데 해발 1천500미터가 넘는 험준한 노령(老嶺.라오링)산맥이 북풍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집안은 또 압록강 중류지역 중 가장 큰 평야지대다. 압록강 중류 지대의 평야는 중국 땅인 압록강 북쪽으로 장백현(長白縣.창바이시엔), 임강시(臨江市.린장시), 집안 등이 있으며, 북한 땅인 남쪽으로 혜산, 중강, 만포, 초산 평야가 펼쳐진다. 집안평야는 동서 약 300리, 남북 약 30리쯤 되는 넓고, 긴 회랑지대로 압록강과 그 지류인 통구(通溝河.통거우허) 사이의 충적지대다. 집안은 졸본과 달리 압록강이란 큰 강과 접해있어 이 물길을 타고 바로 황해로 진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고구려가 수도를 졸본에서 집안으로, 다시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긴 이유는 따뜻하고, 넓은 평야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민족영토사적으로 볼 땐 남쪽으로의 천도는 우리의 역사를 반도에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집안시의 2006년 인구 통계는 약 24만6천명. 이 중 동포는 2만 여명이 살고 있다. 집안, 통화, 유하 지역은 옛 서간도의 중심지다. 특히 집안과 가까운 통화지역은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백서농장 등 서간도 항일운동의 중심지였다. 집안은 통화, 유하, 임강 등 인근의 다른 도시에 비해 동포거주 비율이 높은 편이다. 그 이유는 압록강만 건너면 북한 땅이란 이유도 있겠지만 이곳이 고구려의 옛 수도란 점도 한 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다. 2004년 중국은 집안의 고구려 유적지를 정비하면서 동포들의 반대 속에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동포학교를 하나로 통합시켰다. 통합 과정에서 광개토태왕릉 바로 뒤에 있던 태왕조선족소학교도 폐교되었다. 그러나 태왕조선족소학교 건물은 그대로 남아 창고로 이용하고 있다. 집안시에 있던 동포 학교는 한 때 소학교와 중학교를 합해 25개나 되었지만 지금은 ‘집안조선족학교’가 유일하다. 집안조선족학교는 2006년 통계로 유치원 4개반, 소학교 9개반, 중학교 6개반, 직업고중 3개반으로 모두 22개반이 있으며 학생수는 583명, 교원 수는 90여명이다. 집안의 고구려 유적은 2004년 8월 환인의 흘승골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해 2003년부터 약 1년 반 가까이 집안시에 들어오는 모든 내외국인을 통제한 채 수백호의 민가를 철거시키는 등 도시를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이 정비 과정에서 고구려사를 전공한 남한과 북한의 학자들은 배제됐다. 심지어 중국의 동포학자들마저 참여할 수 없었다. 집안 관광은 성곽과 무덤관광이다. 집안에만 1만2천기 정도의 무덤이 있고, 발견된 것만 7천기가 넘는다. 실제 집안시를 둘러보면 경주처럼 곳곳에 봉긋봉긋한 무덤들을 볼 수 있는데 마치 무덤전시장 같다. 그러나 경주의 무덤이 대부분 토총이라면 집안의 무덤들은 돌무덤이 많다. 북한에서 집안을 가려면 압록강만 건너면 된다. 하지만 남한 사람에겐 집안이 오지중의 오지다. 이곳을 가려면 심양이나 연길, 장춘에서 예닐곱 시간이나 밤기차를 타고 가거나 단동 등지에서 몇 시간씩이나 버스를 타고가야 한다. 길도 험하다. 통화는 집안을 가기 위한 길목인데 집안까지 굽이굽이 높은 산길을 돌아 3시간이상 가야 한다. 집안의 고구려 유적이 처음으로 외국인에게 개방된 해는 1988년이다. 기자가 처음 집안을 찾은 때는 2004년 4월말이다. 장춘(長春.창춘)에서 택시를 타고 6시간이나 걸려 집안에 도달했지만 광개토태왕비를 비롯한 유적 근처엔 인민해방군의 삼엄한 경계로 얼씬도 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망원렌즈로 도둑고양이마냥 유적들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고구려를 우리의 역사라고 배우고, 당연히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열조의 무덤과 비석도 맘대로 볼 수 없는 조국의 현실이 서글펐다. 답답하고 아쉬운 심정을 간직한 채 한국에 돌아온 뒤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구려와 관련되는 책이라면 소설, 비소설을 막론하고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반드시 집안에 다시 가보리라’는 비원이 통했을까? 2005년 5월 운명처럼 1년 만에 다시 집안 땅을 밟게 되었다. 2004년 8월 집안의 고구려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후 10개월만이다. 다시 찾은 집안은 사과꽃이 앞 다퉈 피는 봄이었다. 광개토태왕릉과 장수태왕릉 주변에는 토끼풀이 융단과 같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1년 사이 광개토태왕비를 보호하는 누각 사방에 유리벽이 새로 만들어진 것을 제외하곤 다른 유적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국내성 국내성은 2004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낡고, 허름한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해 4월엔 개나리꽃이 성곽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이듬해 5월엔 꽃은 다 지고, 푸른 잎사귀가 막 돋아나는 시기였다. 국내성은 총 길이 2천686m이다.이중 남쪽 성벽이 가장 길고(751m), 높이(3~4m)도 가장 높다. 서벽은 통구하와 접해 있으며, 치성과 옹성 등 고구려 성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국내성은 집안시의 서남단을 흐르는 통구하와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국내성은 통구하와 압록강이 자연 해자역할을 하고, 북쪽 1km지점에 우산(禹山), 동쪽 6km지점에 용산(龍山), 서쪽 1.5km 지점의 칠성산(七星山)등이 내성 역할을 한다. 또한 환도산을 비롯한 노령산맥의 가파른 봉우리들이 외성 역할을 해 마치 천연요새를 방불케 한다. 국(國)의 순 우리말이 '불'이기 때문이라국내성은 ‘불내성’ 또는 ‘불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최초의 수도였던 졸본의 하고성자성과 상고성자성이 산성이었던 흘승골성(오녀산성)을 끼고 있었던 것처럼 평지성이다. 고구려의 수도에는 궁궐이 있는 평지성과수도방위성인 산성이 따로 있는 2성(二城)체제다. 학자에 따라 이설은 있지만 일반적으로 국내외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국내성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5km 떨어진 위나암성 또는 환도산성을 국내성의 방위성으로 보고 있다. 국내성은 일제시기까지만 해도 옛 고구려 성벽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중국 내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문화혁명 등을 거치면서 심하게 파괴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국내성 주변엔 단층집들이 빼곡했다고 한다. 이후 공장, 상가,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성곽과 아파트가 무분별하게 한 데 섞여있어 지금은 궁전과 성곽의 원형을 자세히 구별하기 어렵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는 정원처럼 성곽이 튀어 올라 보기 싫다. 아파트를 허물면 유물들이 쏟아져 나올 게 틀림없다. 1964년 4월에 길림성이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는데 문물보호지역에 어떻게 아파트를 건립할 수 있단 말인가? 기존의 성곽 위에 새로 쌓은 성 돌의 표시도 뚜렷하다. 이건 복원이 아니다.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고구려 424년의 수도성이 낡은 아파트에 갇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환도산성과 산성하고분군 산성자산성이라고도 불리는 환도산성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성이다. 유리왕 21년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이전한 뒤 쌓은 환도산성은 정상(해발 676m)을 주성으로 삼고, 능선, 절벽을 이용해 쌓은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산성의 둘레는 7km에 이른다. 이 산성은 국내성의 수도방위성이었지만 동천왕 때 위나라 장수 관구검에게 빼앗기기도 했으며, 광개토태왕의 할아버지인 고국원왕 때는 연나라 모용씨가 쳐들어 와 선왕이었던 미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다. 국내성에서 서북쪽으로 통구하를 따라 약 2.5km 쯤 2차선도로를 달리다 보면 조그만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보면 꽤 넓은 개활지가 나오는데 이 개활지엔 장군총을 닮은 크고 작은 돌무지무덤이 수없이 널려 있다. 학자들은 이 무덤군을 귀족들의 무덤으로 비정하고 있다. 산성하(下)고분군으로 불리는 이 무덤군의 수는 약 4천700개. 시간이 많다면 하나하나씩 보고 갈 일이다. 소로를 따라 왼쪽으로 꺾어 곧장 가면 환도산성 남문의 표지석에 이른다. 환도산성의 성문은 모두 5개이지만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곳은 남문뿐이다. 북쪽과 동쪽에 설치된 문은 모두 절벽과 연결돼 있어 가기 힘들다. 남쪽 성곽은 뱀처럼 길게 능선을 따라 돌로 쌓았다. 그러나 성곽의 원형만 남아 있을 뿐 뚜렷하지 않다. 남문이 있었던 성곽 터를 지나 산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점장대가 나온다. 점장대는 2004년 새로 복원한 것으로, 이 위에 올라서면 집안시내와 국내성이 어렴풋이 보인다. 점장대 뒤쪽으로는 옛 왕궁 터가 있지만 지금은 잡초와 돌멩이만 무성하다. 기록에 따르면 성 안에는 건축 터 3개, 저수지 2개, 무덤 41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3개의 건축 터는 각각 망루, 궁전, 장대가 있었던 곳이다. 점장대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음마지(飮馬池)가 나온다. 그러나 지금 이 음마지에는 물이 없다. 중국이 산성을 복원하면서 물웅덩이를 메웠기 때문이다. 다만 땅이 축축한 걸로 봐 연못이 있었을 걸로 미루어 짐작이 간다. 환도산성 안에는 이곳 말고도 솟아나는 샘물을 비롯해 여러 개의 저수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군총 장군총은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 중 가장 크고,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 이 돌무덤의 재질은 화강석인데 방단(方壇)을 계단과 같이 쌓았다. 고분의 높이는 14.2m, 한 면의 길이는 31.58m로 면마다 거대한 받침돌로 무덤을 지지케 했다. 어른 키보다 큰 받침돌은 12개로 알려졌으나, 지금은 11개가 남아 있다. 밑에서 장군총을 올려다보면 정말 웅장하다. 돌에 붙어 있는 이끼가 오랜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장군총이 1500여년이 지나도록 무너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돌과 돌을 끼워 맞춰 서로 들여쌓기를 한 덕분이다. 그러나 현재 장수태왕릉의 보존 상태는 엉망이다. 관광객들이 나무 사다리를 타고 무덤 중간에 올라 묘실까지 들어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시신이 묻혀있는 무덤 위에 올라가는 것은 불경스런 일이다. 하물며 왕가의 무덤을 밟고 관광을 하는 것이 영 개운치가 않다. 이것만 봐도 고구려는 결코 중국인의 조상이 아니다. 과연 제 조상이라면 이렇게 허술하게 보존하겠나? 더욱이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무덤위에 올라가다보니 지속적인 하중에 못 이겨 무덤이 점점 아래로 꺼질까 우려된다. 중간 중간에 돌이 깨져 삐쳐 나온 것도 이 때문이리라. 공주의 무녕왕릉처럼 무덤 내부를 따로 만들어 관람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광개토태왕의 맏아들인 거련(巨連), 즉 20대 장수태왕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수태왕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긴 장본인으로, 아버지와 달리 남진정책을 폈다. 그는 38세에 죽은 아버지와 달리 20세에 왕위에 올라 98세까지 장수했다. 광개토태왕비에서 동북쪽으로 약 2km떨어진 곳에 있는 이 무덤은 장군총으로도 불린다. 장군총의 꼭대기에서는 기와 파편이 발견돼 건물이 있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장군총 주변엔 고인들을 닮은 딸린무덤이 있다. 모두 5개였으나 지금은 하나밖에 없다. 장군총 위에 올라서면 광개토태왕비와 릉이 일직선으로 눈에 들어온다. #광개토태왕릉 광개토태왕릉은 높이 30m, 한 면의 길이가 67m로 장군총보다 훨씬 크고 높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태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무덤의 주인공이 광개토태왕의 무덤이라고 알려지게 된 것은 무덤 주변에서 발견된 기와 파편에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태왕릉이 산처럼 견고하고 튼튼하기를 바란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태왕릉은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꼭대기 부분에 시신을 안치하는 묘실이 있다. 이곳까지는 현재 철제 사다리가 연결돼 있어 올라가 볼 수 있다. 역시 장군총처럼 무덤을 밟고 올라간다. 철제 사다리 양 편엔 무너져 내린 큰 돌과 자갈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도굴의 흔적도 눈에 띈다. 석실 앞에는 중국 공안이 지키고 있어 절대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석실 밖에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북한의 산이다. 태왕이 묻힐 당시에도 저 산은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허물어져버린 태왕릉과 헐벗은 북한의 산을 보노라면 마음이 편치 않다.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비는 집안시 중심으로부터 동북쪽 약 4.5km지점 태왕촌 대비가에 있으며, 광개토태왕릉으로부터 약 3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비는 고구려 19대왕 광개토태왕의 아들인 장수태왕 3년 때(414년) 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높이 6.39m, 너비 1.35m~2m, 무게 약 37톤이나 되는 거대한 입석이다. 비석의 재질은 안산암이 섞인 응회암이다.(사진) 이 비석은 고구려 멸망이후, 발해, 요, 금, 원, 명, 청을 이어오면서 금나라 왕실의 비석으로 인식되었으나, 관월산이란 석공에 의해 발견된 후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연구돼 광개토태왕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석은 삼국사기보다 무려 700년이나 앞서 기록된 우리나라 최고의 석문이자 동방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예서체로 된 1천775자가 정설이지만 학자에 따라 그 수가 들쭉날쭉 한다. 비석의 글자는 1500여년을 버티면서 심하게 마모된 데다 간체자와 이(異)체자가 많아 1590자만 판독이 가능하고, 나머지 석문은 완벽하게 해독하기 어렵다고 한다. 한 때 일제는 이 비문의 한자를 조작해 왜의 한반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려 했다. 비문의 내용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주몽)의 이야기와 광개토태왕의 즉위와 사망까지의 정복활동 및 영토관리, 태왕릉을 지키는 묘지기에 대한 제도 등 크게 3부분으로 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는 처음 들판에 버려진 채로 있다가 중국 정부가 지붕을 덮는 등 훼손을 막기 위한 관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2004년 훼손을 막기 위해 설치한 방탄유리가 오히려 비석의 부식을 앞당길 수도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왜냐하면 통풍이 제대로 안 돼 습기가 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빨리 비석에 습도조절장치를 해 보호함이 마땅하다. 비석을 떠받치는 화강석 위엔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던진 지폐가 깔려 있다. 태왕비 주변 매점과 노점에는 중국의 잡상인들이 관광객들에게 광개토태왕비 기념품을 팔기위해 혈안이 돼 있다. 매점 안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것이라는 책자도 버젓이 판다. 광개토태왕비를 축소해 만든 기념품은 돌의 크기와 세공 정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매점 안의 물건이 좋다고 덥석 사면 바가지를 쓰기 십상이다. 오히려 매점 밖 노점에서 파는 돌이 질도 좋고 가격도 싸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은 광개토태왕의 정식 명칭이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광개토대왕이라 하고, 그가 제정한 영락이라는 연호를 따 영락대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에선 보통 호태왕(好太王.하오타이왕)이라고 부른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총론에서 ‘집안현의 광개토태왕 비문을 한번 보는 것이 삼국사기를 백번 읽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나에게 북방에 가서 꼭 봐야하는 것을 하나만 추천하라면 백두산보다 광개토태왕비를 추천하고 싶다. 비석을 보노라면 대륙을 향해 달리던 태왕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앞에서면 역사와 민족을 굳이 가르치고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재인식하게 된다. 집안빈관에 머물면서 비석에서 새 나오는 기를 한 몸에 받고 싶은 마음에 야밤에 사진을 찍으러 다시 가 봤다. 스트로보를 터뜨리자마자 개 짓는 소리와 공안의 고함치는 소리때문에 실패했지만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영락대제는 역대 한민족 최고의 정복군주다. 만 12세의 나이로 태자가 된 뒤 17세의 나이로 제19대 고구려 황제에 올라 22년간 재위했다. 그는 39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다. 그는 종종 20세에 왕위에 올라 33세에 요절한 그리스의 정복황제 알렉산더대왕과 비교된다. 최인호의 소설 '왕도의 비밀'에서는 태왕이 말에서 우연히 떨어져 죽는 걸로 나와있다. 광개토태왕이 정복군주로 고구려의 전성기를 구가한 역사적 배경에는 군주로서 뛰어난 재질도 있었지만 그의 큰아버지였던 소수림왕의 문치와 개혁에 힘입은 바 크다. 소수림왕은 을파소의 제안에 따라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해 젊은이들을 교육시켰으며, 불교를 공인해 백성들을 도덕적으로 재무장시켰다. 태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다. 그는 남쪽으로는 고국원왕을 죽인 백제를 굴복시키고, 신라에 쳐들어 온 왜마저 가야에서 몰아내 최초로 한반도를 통일했다. 그는 백제와 신라를 직접 통치하지 않고, 군신 관계로 두 나라를 형식적으로나마 존속시켰다. 그는 서쪽으로 후연과 거란을 물리치고 유주(지금의 베이징) 턱밑까지 점령했으며, 북쪽으로는 부여와 말갈, 옥저를 복속시켜 시베리아와 연해주까지 지평을 확대하는 등 고조선의 강역을 거의 다 회복했다. ‘동방의 알렉산더’ 광개토태왕은 최근 한국에서 가장 뜨고 있는 인물 중 하나다. 올 2007년 9월 초 그를 주인공으로 한 태왕사신기라는 대작이 TV에 방영될 거라고 한다. 실제 그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은행 고액권화폐 속 초상인물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주인공이다. 얼마 전 한 정당의 대통령후보도 그를 고액권 화폐 속에 넣길 바란다고 밝혀 주목을 끈 적이 있다. 광개토태왕이 21세기초 분단의 시대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발전된 통일 국가를 이뤄 민족자긍심을 세우고 싶은 국민의 열망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석을 보노라면 주변 강국에 시달려왔던 약소국의 콤플렉스를 떨쳐내고, 우리도 한 때 여러 민족을 아울렀다는 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통합과 관용의 리더십으로 큰 땅과 여러 족속을 통치했던 광개토태왕의 진취적 기상은 치열한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은 그가 말을 타고 달렸던 북방을 말(馬) 대신 KTX로 유럽대륙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한 소식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고액권 화폐 인물 10명 후보로 광개토태왕을 뺀 것은 중국과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그랬다고 한다. 이게 만약 사실이라면 한국은행은 한국은행 간판 옆에 중국은행 부설이라는 간판을 하나 더 다는 게 어울릴 것같다.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까지 그를 고액권 화폐에 넣을까말까 주저한다는 것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의 주화인 드라크마 속에는 그리스출신인 알렉산더대왕이 새겨져 있다. 나는 그리스가 알렉산더를 자국의 화폐에 넣는 과정에서 주변국가인 시리아나 이집트의 눈치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후손의 불찰로 선산이 남의 땅이 될지라도 선산에 묻혀있는 조상의 시신이 남의 것이 될 수는 없다 |
영남일보 박진관기자
2007-0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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