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 입력 2023-08-23 11:34
이미숙 논설위원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로 불리는 미국 핵무기의 아버지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45년 7월 16일 오전 5시 30분,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서 세계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나는 이제 죽음의 신, 세상의 파괴자가 됐다”고 말했다. 실험 예정일 태풍급 폭풍우가 몰아치자 맨해튼프로젝트 총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대령은 “실험을 더 이상 연기하면 절대 안 된다”며 초조해했다. 그러자 현지 풍토에 밝은 오펜하이머가 “새벽녘이면 폭우가 그칠 것”이라고 안심시켰고, 실험은 이튿날 비가 멎은 뒤 이뤄졌다.
미·영·소 3국의 마지막 전시 정상회담인 포츠담회담에 참석 중이던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실험 직후 “결과가 만족스럽다”는 보고를 받은 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게 알렸다.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겐 일주일 후 알렸는데, 원폭 개발 경쟁에서 뒤진 것에 충격을 받았는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미국이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며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원폭을 투하하자 스탈린은 대일 참전을 앞당기며 군부대를 급히 이동시켰다. 일본의 항복 이후엔 한반도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했다. 미국은 유럽을 장악한 나치 독일이 먼저 핵폭탄을 만들 것을 우려해 3년간 20억 달러를 투입하며 속도전을 벌였다. 그러나 핵무기 완성 전 아돌프 히틀러 체제는 패망했고, 미국은 이것을 일본 항복용으로 쓰기로 했다. 이오지마(硫黃島), 오키나와(沖繩) 점령 때 수천 명의 미군이 희생되자, 일본 본토 점령 작전 대신 원폭 투하로 선회한 것이다. 종전 후 트루먼이 오펜하이머에게 “원폭 덕분에 수많은 미군의 생명을 구했다”고 치하한 이유다.
원폭 실험이 몇 달 앞당겨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의 원로 정치학자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는 저서 ‘한반도 분단의 기원’에서 “원폭 완성이 수개월만 빨랐다면 소련은 대일 참전 기회를 잃었을 것이고 한반도 분할 점령도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핵실험이 7월을 넘겼다면,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했을 수도 있다. 그나마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은 핵실험 예정일 악천후에도 배수진을 친 채 실험을 압박한 그로브스 대령 덕분이라고 자위를 해야 할까. 요즘 대세 영화인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보며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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