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개미연구소]
요즘 카카오톡 단톡방 유행어 중에 ‘100세 시대엔 9988231’이란 게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앓고 다시 벌떡 1어나서’ 100세까지 살자는 의미다. 어느새 우리 곁에 성큼 다가온 ‘100세 시대’는 축복이니까 충분히 누려보자는 소망이 담겨 있다.
1일 본지가 SM C&C 설문조사 플랫폼인 ‘틸리언 프로’에 의뢰해 성인 남녀 50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이런 기대감이 뚜렷했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39%로 주요국 중 최악 수준이지만, 성인 두 명 중 한 명은 ‘100살까지 살고 싶다’고 희망하고 있었다. ‘100살까지 살고 싶다’는 응답 비율이 전체 응답자의 22%에 불과한 일본의 조사 결과와는 사뭇 결이 달랐다. 한일(韓日) 양국의 ‘100세 시대’ 인생관은 어떻게 다를까. 본지 설문 조사와 일본 호스피스재단이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해 지난 3월 발표한 조사를 토대로 비교해 봤다.
✅한국은 2명 중 1명 “백살까지 살고 싶다”
어느 누구도 이렇게 오래 사는 시대가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한국이 얼마나 늙었는지 나타내는 고령화율(총인구 중 65세 이상 인구 비율)은 작년 말 17.5%로, 일본(29.9%)보다는 아직 낮다. 하지만 2045년엔 일본을 추월해 전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된다.
이런 정해진 미래를 앞두고, 한국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본지 설문 조사에선 응답자의 50.1%가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응답했다. 구체적인 이유로는 ‘조금이라도 더 인생을 즐기고 싶어서’가 31.9%로 가장 많았고, 후손이 크는 걸 보고 싶어서(24.3%), 세상이 발전하는 걸 보려고(22.1%) 등이 뒤를 이었다. ‘100세까지 살기 싫다’는 응답자들은 ‘주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49.8%), 몸이 약해질까봐(47.9%), 경제적 불안감(36.1%)’ 등을 이유로 꼽았다.
반면 일본은 응답자의 22%만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78%는 ‘100세까지 살기 싫다’고 답했다. 주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59%), 몸이 약해질까봐(48.2%), 경제적 불안감(36.7%) 등이 이유였다.
연령별 데이터도 의미있다. 한국에서 ‘100세까지 살고 싶다’는 응답한 비율이 75%로 가장 높은 연령대는 20대였다. 반면 ‘100세까지 살기 싫다’는 응답 비율이 66%로 가장 높은 세대는 50대였다. 이런 결과는 일본도 유사하다. 일본의 50~60대도 19%만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답했는데, 이는 20~30대의 응답 비율(25%)보다 낮다.
한국과 일본의 생각차가 큰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한다.
사토신이치(佐藤眞一) 오사카대 명예교수는 “일본은 오래 살게 되면 결국 남에게 돌봄을 받게 되고, 이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이 있다”면서 “100세 장수에 대해 양국의 생각이 지금은 많이 다르지만,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한국도 일본처럼 바뀌게 될 것”이라고 했다. 작년 기준 일본의 100세 이상 인구는 약 9만명으로, 우리나라보다 10배쯤 많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일본은 100세의 삶이 어떤 것인지 주변에서 접할 기회가 많아서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는 걸 직·간접적으로 경험했다”면서 “무전·무위·무연의 삶을 리얼하게 지켜봤던 일본에선 100세 삶을 마냥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 리스크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 이를 실감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는 것이다.
✅“노후 대비 탄탄할수록 장수 희망”
“경제력과 활동 능력이 없는 노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살지도 죽지도 못하는 고통의 세월이 길어진다면, 그게 바로 생지옥 아닌가요.”(50대 회사원 이모씨)
노년을 고통이 아니라 행복으로 채우려면, 돈과 건강이 필요하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도 노후 준비 정도에 따라 장수 기대감에 차이가 났다. ‘노후 준비가 보통 이상 되어 있다’는 사람들은 10명 중 6명 꼴로 ‘100세까지 살고 싶다’고 답했다. 반면 ‘노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사람들은 ‘100세까지 살기 싫다’는 응답 비율이 75%로 높았다.
김진웅 NH WM마스터즈 수석전문위원은 “재무 상태와 건강은 통상 오래 살고 싶은 욕구와 양(+)의 상관 관계가 있다”면서 “노후에 자신을 돌봐줄 가족이 없어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필요한 부분은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본은 10명 중 7명 “자다가 죽고 싶다”
일본 고령자들 사이에선 ‘PPK’라는 단어가 자주 언급된다. 일본어 ‘핀핀코로리(ピンピンコロリ)’의 영어 표기 앞 글자에서 따왔는데, 팔팔하게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고생 없이 죽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이렇게 마지막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뜻대로 죽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쌩쌩→비실비실→보살핌’의 사이클을 피할 수 없다. 몸이 점점 쇠약해져 결국 움직일 수 없게 되고, 결국엔 다른 사람(배우자 혹은 자녀)에게 돌봄을 받아야 한다.
이번 설문 조사에서도 이런 냉혹한 현실이 반영됐다. 한일 양국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심장병 등으로 죽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이 각각 59%, 70.6%로, ‘병들어 침대에 누운 채라도 좋으니 서서히 죽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보다 더 높았다. 특히 일본은 한국보다 ‘갑자기 죽고 싶다’고 답한 비율이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한국보다 고령화를 훨씬 앞서 경험한 일본인들은 부모나 조부모가 나이 들면서 간병 등 주변 도움이 많이 필요해지고 삶의 질이 훼손당하는 모습을 봤죠. 그래서 반사적으로 오래 살고 싶지 않다거나 돌연사를 원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높았다고 보여집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게 익숙한 일본의 민족성도 조사 결과에 일부 반영된 것 같고요.”(이천 <내 은퇴통장 사용설명서> 저자)
사토신이치 오사카대 명예교수는 “노후엔 부부 둘만 남게 되는데,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나홀로 노년’이 되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면서 “일본에는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할 때도 보호자가 없어 고생하는 독거노인도 많은데, 이들을 사회가 어떻게 지원해야 할지 큰 과제”라고 말했다.
“부부 중 어느 쪽이 먼저 떠나길 바라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한일 양국은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배우자보다 먼저 세상을 뜨고 싶다’고 응답한 비율은 한국과 일본이 각각 58.3%, 68.5%였다. ‘배우자보다 늦게 죽고 싶다’는 응답한 비율은 41.7%, 31.5%였다.
김동엽 미래에셋 투자와연금센터 상무는 “일반인들이 장수를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간병치레 때문”이라며 “본인 병치레만큼 힘든 게 배우자 병치레여서 배우자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길 바라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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