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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한·일관계 닦는 길, 우리 주변의 소중한 이야기들

 

중앙일보

입력 2023.04.14 00:50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박대인(朴大仁) 미국 선교사가 한국에서 30여 년을 보내고 귀국한 일이 있다. 그는 내 집 바로 옆에 살았고, 해서 매우 가까이 지냈다. 박 선교사가 교회에서 전해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가 동남아시아에 와 있는 외국 선교사 모임에 참석했을 때였다. 일본에서 온 한 선교사를 만났다. 일본 선교사는 박 선교사가 한국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이야기는 나누게 되었다. 그 일본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다.

태평양 전쟁이 종반기에 이르면서 일본 도쿄 시민들이 미국의 공습을 피해 피난을 서둘렀다. 그 선교사는 갈 곳을 찾다가 어떤 시골로 갔다. 아는 사람도 없지만 모두가 전쟁에 시달려 자신들을 위한 걱정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마을에 사는 한 가정 내외가 찾아와 인사를 하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드리겠다”며 친절을 베풀었다.

태평양 전쟁 때 피난 간 일본인
한국인 도움 받고 선교사 선택

학도병으로 끌려간 중학 친구
뛰어난 음악으로 일본인 감동

도쿄 전철서 산화한 이수현군
일본인 구하며 양국 미래 다져

“어려운 일은 서로 도와야”

일러스트 =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이후 두 가정은 서로 친해졌고, 그 선교사는 마음으로부터 감사했다. 피난 온 객지에서 따뜻한 위로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전쟁은 끝나고 선교사 가족은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자기를 도와 준 가정이 한국인으로 일본에 귀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말은 안 했으나 크리스천 가족이었다. 선교사 가정을 떠나보내면서도 “편안히 가시고 행복하시기를 계속 기도드리겠다며”는 송별 인사를 하였다. 자기는 도움을 받았으나 떠나면 그뿐이라는 생각이었는데 “기도해 드리겠다”는 사랑의 음성이 감동으로 남았다.

몇 해의 세월이 지난 뒤였다. 그때까지는 종교에 관심이 없었는데 한 교회당 앞을 지나다가, 피난지에서 만났던 가정이 생각나 교회당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경험이었으나 두세 차례 교회 집회에 참석하면서 담임목사와 말문을 트고, 친교도 깊어졌다.

그런 일이 계기가 되어, 신앙을 얻은 그는 늦게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일본보다는 불교사회로 볼 수 있는 지역에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름 없는 한 한국 교인의 기도로 자신이 선교사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일본 선교사의 체험담을 소개하면서 박 선교사는 그 한국인은 일본인의 모범이 되었고, 선교사를 보내는 숨은 공로자가 되었다면서 일본인의 존경을 받는 한국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또 하나 오래 전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다닌 숭실중학교에서는 매일 채플 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피아노 반주를 하는 이현웅이라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웠던 것 같다. 3학년 때 내가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를 떠나면서 헤어지고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간 들려오는 이야기들로 친구의 행적을 짐작해 보았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일본으로 간 친구는 음악 공부를 하던 중 학도병으로 끌려가 남태평양 전선까지 갔다가 종전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런 처지에 놓인 한국인들이 귀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다가 사랑하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이제는 떳떳한 한국인으로 국제 결혼을 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의 음악 실력과 작곡이 인정과 평가를 받아 일본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름을 바꾸고 국적을 옮겼다. 나중에는 저명한 작곡가와 연주가로 교수가 되었다. 우리는 그의 일본 이름을 몰랐기 때문에 누구인지 모르고 지냈다. 중학교 선배인 그의 친형을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형도 특이한 생애를 살았다. 숭실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일찍 미국 유학을 했다.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었으나 미국 교회나 한인 교회를 떠나 미국 원주민을 위한 선교사가 되었다. 원주민은 물론 미국 기독교계에서도 관심과 존경을 받는 목사가 된 것이다. 그리고 두세 차례 한국을 다녀갔다.

그 형 목사의 얘기다. “내 동생은 지금도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기억하는 한국인들로부터 오해를 받는다. 그러나 나는 동생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다. 일본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한국 사람이 많아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두 나라 젊은이들이 협력해야”

2001년 1월 26일에는 일본 도쿄를 여행하던 이수현군이 전철 선로에 떨어진 일본인을 구출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있었다. 27세의 젊은 대학생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도 일제강점기에 탄광에 징용되어 갔던 과거가 있었다. 73세가 된 이군의 어머니는 “역사의 과거를 잊기는 힘들어도 두 나라의 젊은이들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심정을 고백했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는 일본과 동등한 위상의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서로가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가야 되지 않겠느냐는 뜻을 전해 주었다.

역사의 과거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미래 창출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그 의무를 방해하거나 포기하는 국가에게는 영광스러운 희망이 찾아오지 않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