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3.01.08 09:00
업데이트 2023.01.08 10:16
경찰서도 부침을 겪는다. 사건을 해결하고 범인을 쫓는 건 어디나 다를 바 없지만, 시대나 지역의 변화에 따라 다른 경찰서보다 더 조명받거나 여론의 관심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가세(家勢)가 기울거나 흥하듯 경찰서에도 '서세(署勢)'가 있는 것이다. 특히 시험 성적만으론 오르기 힘든 고위직의 경우 어디 근무하느냐가 승진에 영향을 미치므로, 서세의 중요성도 커진다. 경찰의 꽃과 별로 불리는 총경·경무관 승진의 요람이 있는 반면 승진을 노리는 간부들이 꺼리는 곳도 있다. 실제 2016년 이후 경찰 승진 인사를 분석한 결과 서울의 31개 경찰서 중 9곳은 총경 승진자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청와대를 품고 있던 종로경찰서는 같은 기간 8명이 총경 승진을 이뤄냈다. 주목도 높은 사건이나 업무가 많아 서세가 센 곳에선 수사 경험을 쌓고 승진할 기회도 더 많은 것이다.
'대통령 따라' 종로서에서 용산서로
시대에 따라 서서히 서세가 변할 때도 있지만, 때론 정치적 결정으로 한순간 좌우된다. '정치 1번지'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처럼 종로서도 긴 세월 상징성과 영향력 모두 첫손에 꼽혔다. 정부서울청사·헌법재판소·광화문광장 등 핵심 시설이 몰려 있고 집회가 많아 경비·정보·교통과의 승진 확률이 월등한 '승진 1번지'이기도 했다. “종로서장이나 종로서 경비과로 가면 전보인데도 마치 승진한 것처럼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A 경정)고 할 정도다.
서울 용산경찰서의 모습. 대통령실이 용산서 관내로 옮겨가며, 용산서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커지고 있다.중앙포토
하지만 이제 종로서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청와대 시대가 지고 대통령실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대신 용산경찰서가 주목 받는다. 2016년 이후 용산서의 총경 승진자는 단 한 명. 서울 한 지구대의 B 경감은 “한때 용산서는 이태원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 탓에 빛은 덜 나는데 고생만 한다고 유배지로도 불렸던 곳인데, 위상이 달라질 계기가 생겼다”고 했다.
다만 아직 지원이 몰릴 정도는 아니다. 이태원 참사로 서장 등 간부가 옷을 벗는 악재가 터져 분위기는 흉흉하고, 전입을 노리던 일부 경찰들도 관망세로 돌아섰다. 서울의 한 경찰서 과장인 C 경정은 “지금의 용산서는 지휘 체계가 어수선하다는 평이 많다. 이럴 때 가면 위험하다”며 “시간이 지나 참사 상처도 아물고 체계도 잡히면 지원자가 늘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의사당이 있는 영등포경찰서, 서울중앙지검·지법을 관할로 둔 서초경찰서 등도 중요 서로 꼽힌다. 영등포서는 각종 금융사와 기관이 몰린 여의도, 유흥가가 많은 영등포, 차이나타운이 있는 대림동 등 사건·사고 많은 지역을 관내에 두고 있다. 또 송파·강서경찰서는 50만 명이 넘는 인구만큼 사건도 몰려 총경보다 높은 경무관이 서장을 맡는 '중심경찰서'다. 그만큼 '서세'도 강하다.
'버닝썬'에 서세 기운 강남서
2019년 5월 14일 오전 클럽 버닝썬 자금을 횡령한 혐의를 받는 빅뱅 전 멤버 승리(본명 이승현)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가는 모습. 버닝썬 사건 이후 강남서는 대규모 인사 개편을 맞았고, '서세'도 전에 비해 약해졌다. 연합뉴스
한순간 세가 기운 곳도 있다. 종로서와 견줄 만큼 서세가 강했던 강남경찰서다. 영화나 드라마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경찰서이기도 하다. 강남의 상징성, 관내 수많은 기업과 연예 기획사, 유명 번화가 등의 영향으로 뉴스에도 자주 나온다. 물론 승진도 잘됐다.
그러나 2018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버닝썬 게이트'로 위상이 크게 하락했고 “경찰서가 산산조각이 났다”(전 강남서 형사)고 할 만큼 대규모 인사 개편이 이뤄졌다. 강남은 여전히 중요한 지역이지만, 강남서의 세는 기운 것이다. 강남서의 총경 승진자 배출 역시 2018년이 마지막이었다.
MZ 경찰 "서세 보단 자기시간 많은 곳"
인사 지망에 있어 과거에 비해 서세의 영향이 현저히 줄었다는 의견도 있다. 일명 'MZ세대 경찰'이 늘어난 것이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고된 수사나 고위직 승진보단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경찰이 과거보다 늘었다는 것. 50대 D 경감은 “요새 신임 경찰들은 사건 적은 경찰서를 찾는다. 일보다는 여가가 더 중요하다는 친구들에게 우리 때 덕담이던 '일 많은 경찰서에 지원하라'는 말을 어떻게 하겠나”고 했다.
승진에 대한 접근법 자체도 다르다. 30대 초반인 한 경찰관은 “예전에야 몸이 고생해도 폼 나고 승진하기 좋은 주요 보직을 추구했지만, 이젠 아니다. 올라가 봤자 사건 하나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경찰인데 무리할 필요 없다는 분위기도 있다”고 했다. 오히려 승진을 위해 일이 적고 자기 시간이 많은, 예전 기준으로 서세가 약한 경찰서를 노리기도 한다. 수사로 여론의 조명을 받기 보단 승진 시험을 잘 준비하는 게 오히려 빠르다는 거다. 50대 김모 경감은 “큰 사건 많은 곳은 선호하는 게 당연한 줄 알았는데, 별로 신경 안 쓴다는 후배들을 보면 좀 생소하다”고 말했다.
황예린 기자 hwang.yeal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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