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적십자사는 북송동포들의 운명을 망친 단체”
글 : 장원재 배나TV 대표
⊙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사회주의 혁명하겠다’며 혼자 北送船 타
⊙ 열탄·오징어 장사로 시작, 연탄 제조·밀무역·쌀장사로 성공
⊙ 일본에 도착한 후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해 법학 공부
⊙ 日법원, 북송동포들의 손해배상 소송 기각하면서도 북한·조총련의 거짓선전에 대한 위법성 인정
⊙ 열탄·오징어 장사로 시작, 연탄 제조·밀무역·쌀장사로 성공
⊙ 일본에 도착한 후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해 법학 공부
⊙ 日법원, 북송동포들의 손해배상 소송 기각하면서도 북한·조총련의 거짓선전에 대한 위법성 인정
사진=장원재
김정은을 상대로 전면전(全面戰)을 벌이는 인권운동가가 있다. 어머니는 북송동포(北送同胞), 본인은 탈북자(脫北者)다. 아이 둘을 데리고 사선(死線)을 넘었다. 남편은 북한에 있다. 생사(生死)는 모른다. 오빠 등 직계 가족도 아직 북한에 있다. 역시 생사는 모른다. 인권운동을 계속하면 가족의 안전은 위협받을 것이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 정의(正義)를 외면하고 불의(不義)에 굴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리소라. 1970년 함경남도 금야(金野) 출생. 금야군은 동으로 동해를 접한다. 서쪽은 악명 높은 수용소가 위치한 요덕군(耀德郡), 남쪽은 고원군(高原郡)과 강원도 천내군(川內郡)이며 북쪽은 정평군(定平郡)이다. 고원에서 남행하면 원산(元山)에 이르고, 정평군에서 조금 더 가면 함흥(咸興)이다. 예부터 ‘검은 금’이라고 불리던 석탄이 많이 나고, 기름진 너른 평야가 있어 금야군(金野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만 남아 있지 살기에는 척박한 땅입니다. 특산물로 홍시와 고구마가 유명하고 그다음에는 특별히 유명한 게 없어요.”
5남매 중 넷째. 언니 둘과 오빠 하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집안에서는 제일 어리바리하다고 했다. 나중에 탈북해서 어머니를 찾아가니 “어떻게 형제 중에 네가 왔느냐?”고 놀랄 정도였다. 리소라는 어머니를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섯 살까지는 엄마라고 불렀지만, 후에는 엄마라고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간염으로 병원에 들어가서 10년 정도 지냈어요. 육종(sarcoma)으로 번져서, 어머니가 낮에는 직장 다니시고 밤에는 간병했죠. 그래서 어머니 얼굴을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북한에는 ‘70일 전투’ 하는 식으로 초과 근무가 많거든요. 새벽 세 시에 퇴근해서 밥 한술 들고 아버지한테 가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약품을 자체 조달해야 했어요. 다른 병원 제조실에 가서 맡겨놓은 포도당을 찾고, 겨울에는 외투 안에다가 얼지 않게 싸매고…. 간염 병원이 굉장히 멀어요. 집에서 눈길을 헤치면서 병원에 갔다가 새벽에 귀가해서 밥을 해놓고, 또 직장에 가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이어지니까 어머니 얼굴을 볼 새가 없었고, 그다음엔 학교에서 제가 어머니 때문에 차별을 받았으니까….”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는 이유
차별? 북송동포 자녀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실을 다 알았는데 리소라 본인만 몰랐다. 유치원 시절, 밤늦게 아이를 찾으러 온 한 어머니가 리소라를 밀쳤다. 넘어진 리소라를 넘어 자기 아이를 안으면서 “왜 저따위하고 노는가”라고 아이에게 말했다. 갑자기 밀치니까 많이 놀랐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일이 없는데 왜 그러나?’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간염 환자의 자식이고 본인도 간염을 앓았기에 ‘전염병자라 그러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우리 어머니가 너하고 놀지 말래”라고 했다. “음악반에서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니 소년단 지도원이 욕설과 더불어 “네가 딱히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며 주먹을 들었다. ‘성분이 불량하니 괜히 다른 사람 앞길 막지 말라’는 소리였다.
“북한 신분사회에서 가장 토대가 나쁜 적대계층(敵對階層)은 다 감옥에 보냈고, 그다음이 동요계층(動搖階層)인데, 북송동포는 동요계층 가운데서도 가장 아래였어요. 자본주의 물을 먹어본 사람이라며 드러내 놓고 멸시했습니다.”
북송동포 중 일본 친척들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차별받지 않았다. 하지만 리소라의 집은 가난했다.
“저희 어머니는 부모님 승낙 없이 고등학교 때 혼자서 북송선을 탔거든요. 조선 반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시겠다고. 그러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송금(送金)해달라, 도와달라고 손을 안 내미셨죠. 저는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습니다. 늘 작은 신발밖에 못 신어서 새끼발톱이 나오지 못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제 발톱이 귀엽다고 하는데, 제 어린 시절은 이럴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 앓아
열 살 때 비로소 엄마가 일본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집에서 일본 얘기나 일본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어머니 동무들이 모이면, 커튼을 친 후 새카만 모포를 이중삼중으로 덧씌우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들끼리 조용조용 부르던 노래를 기억한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배운 곡들이었다.
“본인들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을 그리며 북한에 왔는데, 현실은 자기랑 가족들이 다 천대받고, 개선 방법도 없고…. 그 속이 얼마나 복잡했을까요? 이분들은 모일 때마다 눈물을 흘렸어요. ‘모임에 못 나온 누구누구가 붙잡혀 갔다’는 얘기도 은밀하게 했습니다.”
어려서 받은 차별이 어머니 탓이었다는 걸 알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일본에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입을 딱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몸에 탈이 왔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이었다. 계속 열이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며칠을 앓았다. 16세 무렵엔 증상이 심해져 7개월 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춘기를 보내며 어머니하고는 점점 소통을 안 했고 ‘아버지 딸’로 살았던 이유다.
대학 진학도 사연이 많다. 북한은 9월 학기제. 김정일 생일(2월 16일) 행사가 끝나면 시험을 보고, 구역별로 개인 등수를 매긴다. 14등까지는 김일성대·김책공대 등 중앙대학 진학, 그 뒤로는 석차에 따라 일반 대학, 지방대학, 전문학교 등으로 배정하는 식이다. 물론 석차대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당 간부, 돈주 등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사업’을 해서 등위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제가 중앙대학에 갈 수 있는 등수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제가 중3 때 청진에 물리 전문학교가 생겼습니다. 원자력발전소 요원 양성 학교였죠. 졸업하면 거의 다 소련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 교원들이 와서 학교 성적을 보고 예비 입학생을 뽑아 시험을 치거든요. 청진에 가서 두 번 시험을 쳤는데 제 가족 상황을 안 다음부터는 찾지 않더라고요.”
동요계층 귀국자를 공부하라고 외국으로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깨달음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무렵, 하느님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7세 나던 해 5월 5일이었다. 1차 대학, 2차 대학 합격통지서도 오지 않았다. 성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전까지는 제 눈앞의 개별적인 사람들을 미워했었죠. 사로청(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현재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지도원도 밉고 교사도 밉고…. 그러다가 ‘어쩌면 북한이라는 곳의 정책이 이럴 수 있겠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다 이해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증오하던 마음이 다 없어졌어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산다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입니다. 특히 어린 마음엔 더하죠. 한국에서는 누가 미우면 전학이나 이사를 가면 되는데, 북한은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한순간에 제 내면(內面)의 어딘가가 뻥 뚫리면서 ‘이 사람들에겐 죄가 없구나, 이 나라의 어딘가가 잘못됐지 이 사람들 잘못은 아니구나’라고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대학을 안 가고 집단 배치받아 노동자로 나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입학통지서를 가지고 왔다. “대학에 가서 네가 찾지 못한 답을 찾아보라”는 말씀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과는 불합격.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당시 몸무게가 37kg으로, 합격 체중 38kg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에는 붙었지만, ‘튼튼한 몸으로 나라에 이바지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했다. 간염으로 1500m 오래 달리기도 완주하지 못했고 수류탄 던지기도 못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대학에 자리가 났다. 기술대학이라 여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힘든 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기기계공학과라고 했다. 전기도, 기계공학도 다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21명 중 여학생은 리소라 혼자였다.
“교단에서 거짓말하기는 싫었다”
9월에 대학에 입학하니 11월에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공부가 아니라 건설 사업장 동원이었다. 평창구역 광복거리 쑥섬 제방 건설에 모든 학생이 참여했다. 1980년대는 문수거리, 통일거리 등 각종 건설 사업에 김정일이 북한 전역의 대학생들을 대거 동원하던 시절이다. 북한은 대학생들을 혁명을 위한 미래의 간부로 양성한다. 그래서 건설 현장에서 단련시키는 것이다. 건설 동원이 전부가 아니다. ‘교도대(敎導隊)’라는 준(準)군사조직의 훈련에도 참가해야 한다. 교도대는 겨울기(期)가 있고 여름기(期)가 있다. 훈련기간은 6개월이다. 모든 대학생의 의무다.
“2학년 때도 평양 건설 현장에 나갔다가 집에 와서 3일 지내고 바로 평양교도대로 나갔습니다. 제 보직은 85mm 고사포 3번수였어요. 적 비행기가 날아오면 그걸 보고 조준수한테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훈련을 겨울에 했는데, 지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목욕탕이 없으니까 이랑 벌레가 나왔어요. 한 달 후부터는 쌀도 안 줬습니다. 아침에 강냉이 20알 주면서 이게 한 끼 식량이고 반찬은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래요. 실전(實戰) 훈련이라는 겁니다.”
대학 성적은 좋았다. ‘도면(圖面) 그리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1992년 졸업 후, 교원이 되고 싶었지만 현장으로 갔다.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남으라고 했지만, 교단에서 거짓말하기는 싫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전문직 수업, 그러니까 전자기 이론을 가르칠 때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서 지도하시기를’이라고 시작해야 하거든요.”
자살은 ‘공화국 낙원을 배신’하는 중대범죄
대학 수업과정을 마치면 3대 혁명소조에 나가 3년 동안 현장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야 졸업을 할 수 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죽었다는 소식도 3대 혁명소조 파견 중 접했다. 아침에 운동회를 하고 점심밥을 먹으려는데 특별방송이 나왔다. 상복(喪服) 대용으로 두꺼운 겨울옷을 한여름에 꺼내 입고 추모장을 만들고 경비를 서다 여러 사람이 까무러쳤다. 3대 혁명소조 파견을 마치면 직장 배치다.
중앙당에서 온 사람이 문건을 살펴봤다. 삼촌 이내 친척 중에 노동당원이 없으니 이 대학에 들어올 성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전기기계 공장이 아니라 조그만 부품 공장 설계원으로 배치받은 까닭이다. 설계실장이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한번 배치받으면 여간해서는 직장을 옮길 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해고’라는 건 이례적인 조치였다. 공장이 군수품(軍需品) 공장으로 전환, 김정일의 현지 지도를 받은 것이 배경이었다. 핵심 설계부서에 위험인물이 근무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 충동이 일었다. 북한에선 자살을 ‘공화국 낙원을 배신’한 중대범죄로 다스린다. 본인이 아니라 자살자의 가족 전체가 처벌받는다.
“내가 ‘너희 같은 인간들 손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거든요. 대학 때도 두어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다 넘겼어요. 그런데 그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리에 조금씩 시체가 나오기 시작하는 등, 고난의 행군 도중이라 제가 자살한다고 해도 가족들이 당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죠.”
富者 시아버지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죽을까, 자동차 사고나 기차 사고를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지금의 시아버지가 갑자기 ‘며느리 삼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귀중품인 ‘초콜릿 한 판’을 들고서였다. 시댁은 소문난 부잣집으로, 롱밴 자동차와 선전대 차 두 대를 보유한 북송동포였다. 그는 “내가 왜 우리 아버지나 형제가 일본에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간부들에게 뇌물을 고이며 비굴하게 살아야 하나. 가난하게 살더라도, 차라리 너처럼 당당하게 사는 것이 부럽다”고 했다. ‘천대받지 않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한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 고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안에 응했다. 시아버지는 부자인 친구들이 “왜 그런 며느리를 얻느냐”며 핀잔을 주자 “내 며느리 욕하지 말라”며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리소라를 아꼈다.
결혼 몇 년 후, 시댁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시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일본에 계시는 시할아버지도 암으로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송금이 끊긴 것이다. 살림 규모를 줄이지 못하는 가족들은 빚을 내서 살았다. 가구를 내다 파는 등 뒷수습을 하다가 다시 병이 찾아왔다. 그래서 분가(分家)를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나진 선봉에서 담배를 가져다 팔았는데 안전원들이 자꾸 물건을 압수하고…. 다른 사람은 뒤로 다 물건을 찾아오는데, 저는 아무리 뇌물을 써도 귀국자(북송동포)라고 물건을 안 돌려주는 겁니다. 그러다가 2003년 겨울에 우리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게 됐어요. 물을 한 모금 먹이니까 5분 안에 항문으로 다 나오더군요. 설사도 하고요. 내장이 완전히 기능을 멈춘 거죠.”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땅이 나를 이렇게까지 핍박하는가.’ 자신이 당하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식이 죽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날 저녁 독하게 결심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이리라.’
장사로 성공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다 거두지 못해 들개가 시신을 뜯어 먹던 시절이다. 동창들에게 연락하니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많았다. ‘유일한 여학생’이라 자기가 누구라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탄광 수출 당비서에게는 열탄(熱炭), 수산사업소 고위직으로부터는 낙지(오징어)를 받아다 팔았다. 처음엔 도매상에게 넘겼고, 장사가 손에 익은 뒤엔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해 연탄을 직접 찍어 팔기도 했다. 나중에는 밀무역까지 하며 규모를 키웠다. 막판엔 평양 수매양정국까지 선이 닿았다. 개선문 앞에 청사가 있는 힘센 기관이다. ‘기회만 차려주면 하겠다’ 대답하고 유엔이 지원한 쌀을 취급했다. 현품이 아니고 ‘증서’를 팔았다. 증서 보유자가 쌀 창고 앞에 가서 현품으로 교환해가는 거래였다. 석탄은 가끔 다 팔리지 않았지만, 쌀은 늘 완판이었다. 언제 다음 지원이 나올지 모르니, 물건이 나오는 족족 무조건 다 팔렸다.
“그때 북한에서는 1만 엔이면 네 식구 1년 쌀값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 달에 300달러를 생활비로 썼습니다. 세대주(남편)한테 아사히 맥주, 기린 맥주 사드리고 출근할 때 아침마다 고양이 담배 넣어주고 일본 원단으로 옷도 해 입혔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가족 네 명이 평생 살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계산이 나오더군요. 목표가 생기니까 막 달렸습니다. 평양에 직접 가서 전표를 받아오고, 밥가마(밥솥) 뇌물로 돌리면서 간부 사모님들 공략하고…. 거래량을 확 늘렸습니다. 탈북 직전에는 저랑 일하는 분들이 전국 쌀 가격을 낮췄다 올렸다 할 정도였어요.”
중앙당 중앙행정국, 정무원에 손을 써서 남편 직장도 바꿨다. 평양 모 기관에 간부로 갔다. 아이들에게는 예술을 시켰다. 평양 만경대에서 TV 출연도 시켰다. 지방과 평양에서 큰 집도 샀다. 그동안 괴롭혔던 자들에게 복수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살아서 너희를 내 발밑에 앉힐 것이다’라는 심정이었다.
“또 하나, 북한이 어디로 가는지를 꼭 보고 싶었어요.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얼마나 더 죽이며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회
탈북 결심은 우연한 기회에 했다. 옆집 아들이 마약에 중독됐다. 부모를 피투성이가 되도록 폭행하는 일이 이어졌다. 어른들이 약을 쓰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까지 빙두(氷豆)를 한다는 건 충격이었다.
“고등중학교 5학년생이니까 16세? 또래 친구 중에 한 집 부모가 그런 약을 쓰면 같이 다니는 아이들이 다 중독이 된다고 하더군요. 호기심에도 하고, 여자아이들도 다이어트한다고 피부 새하얘진다고 마약을 쓰고, 시험 기간에 빙두를 하면 잠도 안 오고 공부가 잘된다고 먹고….”
생각보다 마약이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평양은 마약이 범람하는 도시였다. 특권층만 다닌다는 만경대 학생궁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집 아이들은 거의 100% 마약에 절어 있었다. 아이들이 마약을 공급해 교사 중에도 중독자가 많았다. 리소라의 자녀들이 중독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마약 청정 구역을 찾아 이사하려고 했는데, 그런 곳은 없었다. 사리원도, 해주도, 개성도, 북쪽 청진, 김책도, 주변 시골 마을에도 마약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마약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가정상비약처럼, 마치 한국에서 커피를 마시듯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마약을 피하는 길은 탈북밖에는 없었다.
“남편한테 이야기했죠. ‘이 나라에 우리가 살 곳이 없다. 아이들 때문에 내가 사는데, 우리 아이들이 마약 중독되는 건 못 보겠다. 마약 하나만 보더라도 북한에는 미래가 없다. 가야 되겠다.’”
남편은 못 간다, 가지 말자고 했다. 석 달 뒤면 간부로 발령 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했지만, 리소라는 그 전까지는 중국 쪽으로 넘어간 적이 없었다. 토대가 나빠 시범 케이스로 걸릴 수도 있고, 처벌도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2007년 2월에 강을 건넜습니다. 2월 16일 김정일 생일 전후가 특별경비 주간이거든요. 기다렸다가 월말에 중국으로 갔어요.”
뒤늦게 들은 어머니 탈북 소식
중국 측 사업파트너가 아지트를 마련해줬다. 시내에 나가서 도서관에 들러 한국 신문, 잡지를 다 거둬 왔다. 기사를 읽는데 많이 낯설었다. ‘일본으로 가야 하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2004년에 탈북했고, 리소라는 어머니의 일본행 소식을 2006년에야 처음 들었다.
“어머니가 말도 없이 2004년에 없어졌는데, 저는 몰랐죠. 제 생활도 바빴으니까. 그래서 오빠네 집에 같이 있겠지 했는데, 남편 간부 사업 당시 알았어요, 어머니가 탈북했다고. 그래서 처음엔 ‘어머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마구 성을 냈는데, 오빠가 저를 말리더라고요. 자기가 가라고 했다고. ‘그러다가 오빠가 단련대 잡혀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우리가 받을 피해는 생각 안 해봤냐?’고 하니까 ‘야, 어머니가 17세에 부모 형제하고 갈라져서 죽을 때까지 서로 못 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방법만 있으면 가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엔 스위스로 가려고 했다. 함남도·평북도·자강도 사이 방목지에서 염소를 키우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인민에게 우유를 먹이려는 당의 배려라고 했다. 물론 실패했다. 방목지를 조성하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리소라도 죽을 뻔했다. 직장에서 노동 파견을 나갔던 길이었다. 산이 험한 곳이라 도로 사정이 열악해 차가 전복(顚覆) 됐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절친한 동무 둘이 사망했고, 리소라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고는 수시로 일어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민들이 이렇게 희생하는데, 관리인들은 염소를 빼돌려 고기로 팔기도 했다. 스위스가 선진국이라는 걸 알았지만, 왜 북한과 이런 식으로 참담한 일을 추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을 알리고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탈북 후 행선지를 스위스로 정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죠.”
남편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2월에 탈북을 결행한 이유다. 12월은 사실 탈북 적기가 아니다. 국경연선에서 동계 훈련에 들어가 경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10월에 남편이 ‘가자’고 해서 일단 저 혼자 국경연선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그쪽에서 태어났다는 가짜 출생증을 만들었어요. 그게 없으면 북중 접경지대로 이동이 불가능하니까요.”
돈을 써서 사람을 시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한테는 “중국에 있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들 학교에는 “식구들 전부 평양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갑자기 없어지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준비였다. 그다음에 남편이 와야 하는데, 기업소 행사가 겹쳐 출발을 못 했다.
남편과의 이별
2007년엔 동계 훈련 시작 지시가 일찍 떨어졌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일단 아이들과 먼저 강을 건너고, 남편은 나중에 오기로 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2007년 12월 13일. 아이들은 12세, 9세였다. 중국 사업 파트너들이 고무보트를 가지고 나와 줄을 당겨 탈북을 도와줬다.
“다음 날 아침 혜산(惠山) 쪽을 보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저 땅이 나를 핍박했구나. 원망스러웠죠.”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뭔가 제도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지만, 원망은 없었다. ‘위에서도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이겠지. 나도 이 나라의 한 성원으로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살면서 기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살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강물에 신분증을 던졌다. ‘북에서 받은 이름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결의였다. 남편을 기다리면서 일본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스위스대사관은 번호를 몰랐고, 한국과 일본의 영사관 번호는 중국 사람이 알려줬다. 일본에 연고자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모처로 오라기에 “제가 남편을 기다려야 되니까 남편이 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사고가 났다. 아지트가 발각된 것이다. 리소라에게 현금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들이 벌인 소동이 문제였다.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준 북한 군인 사이에 싸움이 나서 서로 총질할 정도였다. 20일쯤 다른 곳에서 숨어 지내는데,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을 맡겨두고 북으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국경연선의 브로커가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랬다가는 남편도, 아이들도, 리소라도 다 죽는다는 얘기였다. 그때 이후로 오늘까지 남편을 본 일이 없다. 아이들이냐 남편이냐 사이에서 아이들을 택해 남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무언가가 없어지지 않는다.
탈출극
“중국으로 북한 보위부가 들어왔어요, 저희를 잡으려고. 저한테 연락해준 분은 어디 대사관에 가든 다른 데 가든 빨리 중국을 뜨라고 했습니다.”
심야에 쳐들어온 체포조를 피해 옆집을 거쳐 잠옷 바람으로 도망쳤다. 택시를 잡아 타고 “사람이 많은 데로 갑시다”라고 했다. 백화점에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는데 보위부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여행용 트렁크를 파는 매장에 몸이 건장한 중국 남자 여럿이 보였다. 그 사람들한테 100위안짜리 중국 돈 한 장씩을 주고 ‘경호’를 부탁했다. 15명의 중국 남자가 리소라의 가족을 에워쌌다. 더 많은 숫자의 보위부원이 성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탈북할 때 극한 상황에 대비해서 극약을 챙겨 갔었어요. 아이들 먼저 먹이고 나도 먹자라고 결심하고 약을 꺼냈는데, 아이들도 지금 상황이 급박한 걸 아는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보더군요.”
막 약을 먹이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베이징에 있는 일본대사관으로 가면 받아줄 거다”는 전갈이었다. 리소라는 중국에 숨어 있는 동안 위급 상황에 따른 대책을 세워놨다. ‘돈의 힘’으로 만든 비상연락망이었다. 택시기사가 백화점 밖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백화점 정문까지 어떻게 가나. 보위부 사람들이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포위망을 좁혀왔다. 중국 ‘경호원’들의 활약으로 몸싸움 끝에 택시에 탑승. 택시 뒤로 차 두 대가 따라왔다. 택시기사가 ‘이대로 가면 잡힌다’며 자기 집 근처 복잡한 골목 안으로 차를 몰았다. 동료 기사들에게 연락해 미행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차를 바꿔 타며 겨우 위험지역에서 벗어났다. 리소라와 아이들은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미리 대기시켜둔 장거리 이동차에 탑승, 베이징까지 갈 수 있었다.
‘괴물의 나라’로
“베이징의 일본대사관에 들어서자마자 온몸의 힘이 다 풀렸어요. 탈출 과정도 긴박했고, 남편이랑 아이들 때문에 거의 잠을 못 잤으니까요. 열흘 남짓 밥도 안 먹고 계속 자기만 했습니다.”
일본대사관에서 의사를 불러줬다. 그곳에서 10월 말까지 지냈다. 일본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엄격했다. 북송선을 탔다는 증거가 있거나 일본에 확실한 연고가 있는 사람만 입국을 허락했다. 리소라 가족은 운이 좋았다.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일본에서 지원을 많이 했다. 덕분에 문제를 풀기가 수월했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라는 사정까지 겹쳐 인도주의적으로도 지원을 받았다. 조기(早期) 일본행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일본대사관에서 아이들이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에 간다니까 난리가 났죠. 아이들한테는 일본은 ‘괴물의 나라’였으니까요. 무서웠던 겁니다. 북한에서 받았던 반일(反日) 교육의 결과인데, 이걸 12세짜리한테 어떻게 설명합니까. 마지막에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제가 딸을 때렸어요. 대사관 분들이 아동 학대라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어리니까 제 말을 잘 듣는데, 딸은 사정도 모르면서 ‘일본에 가지 않을 테니 도로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외할머니가 보내준 디즈니 DVD가 해결했다. ‘만화 속의 일본어 더빙’을 따라 하며 아이들의 일본어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대사관 직원들의 친절도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데 일조했다.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 나오고, 문명 생활도 아이들이 좋아한 부분이다. 일본 교과서를 달라고 해서 45분 수업, 10분 휴식 시간표를 만들어 아이들과 일본어를 공부하고,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대사관 안을 청소했다.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
도쿄에 도착하니 공항에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의 이웃들은 탈북민의 공중도덕 수준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첫 숙소는 노숙자 쉼터, 가정폭력 피난처였다. 보증금이 없으니 집을 빌릴 수도 없었고, 돈이 있다 해도 탈북자들의 경우 부동산들이 중개를 꺼려 했다. 법을 아는 이에게 도움을 구하니 ‘생활보호신청을 하라’고 했다. 이에 10평 남짓한 집이 배정돼 세 식구의 보금자리가 됐다. 첫 직업은 호텔 방 청소였다.
“제가 일본으로 간 목적은 ‘북송사업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나를 이렇게 괴롭혔나?’ 그걸 알아보자는 것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신문이고 뉴스고 다 거짓말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일본어도 공부하고, 돈도 벌고 일본 사회에 대해 빨리 알고 싶었습니다.”
8개월을 열심히 일했는데 근무 중에 정신을 잃었다. 북한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직장을 옮기고, 더 늦으면 곤란할 것 같아 야간 중고등학교를 거쳐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일본에선 북한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학비는 자체 부담이었다. 사이버대학 야간학부에 등록하면 학비를 3분의 1로 깎아줬다. 등록금은 일 년에 60만 엔 정도. 중간에 돈이 없어 휴학하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버느라 졸업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아이들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지금은 국숫집을 운영하며 ‘모두 모이자’라는 북한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법을 전공한 건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였다.
“일본에 오니까 법치국가(法治國家)라는 말이 자꾸 들렸습니다. 법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법률 문건 자체가 기밀문서죠. 일반 사람이 접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은 법 지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북송사업의 부당성을 알리려면, 법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것도 이유입니다.”
日 법원, ‘거짓 선전은 위법’
대학에 다니는 도중, 국회도서관에 가서 재일동포 북송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북송사업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에서도 일했는데, 국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면 영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다.
최근 활동은 북송사업의 죗값을 묻는 소송. 일본으로 돌아온 북송동포 5명을 원고(原告)로, 일본 정부와 김정은을 피고(被告)로 했다. 한 사람당 1억 엔의 보상을 요구했다.
― 금년 3월 23일 판결이 났죠? 국내 언론에서는 기각(棄却)되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아시는데 판결문을 보면 의미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던 중요한 부분을 판결문에서 거의 다 인정했어요. 핵심은 북송사업이 북한과 조총련 등 단체에 의해 거짓 선전으로 진행된 일이라는 거죠. 피해보상에 관한 부분은 시효(時效)가 지나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북송사업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겁니다.”
그동안 한일 양국 국민 가운데는 ‘북송동포들이 자발적으로 배에 오른 것 아니냐, 북한 도착 후의 인권 유린은 심각했지만, 선택 자체는 자발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판결문은 ‘거짓 선전이 있었고 그 부분은 확실히 법률 위반’이라고 확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230만~240만 정도의 재일동포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귀국선을 타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1959년 12월 북송사업을 시작할 무렵엔 60만 정도만 남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범죄율이 높고, 사회보장으로 살아가는 비율도 많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일본 정부가 볼 때,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잠재적인 위험군(危險群)이었다. 생활보호 대상자 비율도 일본인의 약 8배였고 사회주의 성향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중 6분의 1 정도를 일본 밖으로 내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지점이다. 정식 국교가 없으니 일본 적십자와 북한 적십자가 연대해 일을 진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북송사업(北送事業)의 전말(顚末)이다.
일본 법원은 이번 판결문을 통해 ‘북송사업 과정에서 고의(故意)로, 거짓 선전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북송동포들은 자기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과 북한 당국에 의해 속아서 북으로 건너간 것이 된다.
일본 적십자사의 무신경
―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계획입니까.
“고등법원 항소(抗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월 23일에 판결이 나고 4월 3일에 변호인단과 원고들이 기자회견을 했죠. 지금 당장은 북한 인권 시민운동에 큰 성과가 없지만, 한 걸음이라도 계속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재판을 통해 세계 어딘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 사례를 환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시간이 흘러도 잘못된 일을 한 가해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싶습니다.”
일본 적십자사 역사관에 북송선 사진이 아직까지 걸려 있는 일도 가슴 아프다. 일본 적십자사는 9만3000여 명을 북송하고 수십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주체다. 이산가족을 만든 일 자체가 적십자 정신 위반이다. 그런데 기념관에 커다란 북송선 사진이라니! 이것은 아직도 일본 적십자사가 재일동포 북송이 ‘기념할 만한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아예 무신경한 것이든가.
“일본 적십자사는 북송동포들의 운명을 망친 단체입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그렇게 고생하고, 인권침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호소하는데도 북송선 사진을 방치하고 있다니요?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제 부모님은 북송사업으로 청춘과 인생을 다 빼앗겼습니다. 젊음과 인생이 되돌아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빼앗긴 삶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 일의 전후좌우(前後左右)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죄가 있는 사람은 처벌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이들 모습 보여주고 싶어”
북송동포 9만3340명의 이름을 모두 새긴 비석 건립도 추진 중이다. 명단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일본 출입국관리소가 명단을 가지고 있고, 일본 적십자사도 북송 신청서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 적십자사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명단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살아 있는 고령자들을 구출하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려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절박한 문제다. 그래서 일본 적십자사에 다시 요청했다. 당신들이 확보한 명단을 가지고 북한 적십자사에 이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일본 적십자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리소라 씨는 재일동포 북송연구회라는 단체를 새로 만들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그분들이 어디에서 고문당했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걸 다 밝혀내서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소라 씨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일이 있다. 생사를 모르는 남편과 북한에 남아 있는 형제의 일이다.
“남편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딸이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는데, 장차 결혼식장에 제가 혼자 앉아 있을 걸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꼭 살아서 남편에게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정의(正義) 실현을 갈망하는 모든 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북송동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리소라. 1970년 함경남도 금야(金野) 출생. 금야군은 동으로 동해를 접한다. 서쪽은 악명 높은 수용소가 위치한 요덕군(耀德郡), 남쪽은 고원군(高原郡)과 강원도 천내군(川內郡)이며 북쪽은 정평군(定平郡)이다. 고원에서 남행하면 원산(元山)에 이르고, 정평군에서 조금 더 가면 함흥(咸興)이다. 예부터 ‘검은 금’이라고 불리던 석탄이 많이 나고, 기름진 너른 평야가 있어 금야군(金野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만 남아 있지 살기에는 척박한 땅입니다. 특산물로 홍시와 고구마가 유명하고 그다음에는 특별히 유명한 게 없어요.”
5남매 중 넷째. 언니 둘과 오빠 하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집안에서는 제일 어리바리하다고 했다. 나중에 탈북해서 어머니를 찾아가니 “어떻게 형제 중에 네가 왔느냐?”고 놀랄 정도였다. 리소라는 어머니를 지금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여섯 살까지는 엄마라고 불렀지만, 후에는 엄마라고 부른 기억이 없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가 간염으로 병원에 들어가서 10년 정도 지냈어요. 육종(sarcoma)으로 번져서, 어머니가 낮에는 직장 다니시고 밤에는 간병했죠. 그래서 어머니 얼굴을 본 적이 드물었습니다. 북한에는 ‘70일 전투’ 하는 식으로 초과 근무가 많거든요. 새벽 세 시에 퇴근해서 밥 한술 들고 아버지한테 가는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약품을 자체 조달해야 했어요. 다른 병원 제조실에 가서 맡겨놓은 포도당을 찾고, 겨울에는 외투 안에다가 얼지 않게 싸매고…. 간염 병원이 굉장히 멀어요. 집에서 눈길을 헤치면서 병원에 갔다가 새벽에 귀가해서 밥을 해놓고, 또 직장에 가는 거예요. 그런 생활이 이어지니까 어머니 얼굴을 볼 새가 없었고, 그다음엔 학교에서 제가 어머니 때문에 차별을 받았으니까….”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는 이유
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을 떠나는 북송선. 리소라 씨의 어머니도 1960년 북송선을 탔다. 사진=마이니치신문 |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그런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간염 환자의 자식이고 본인도 간염을 앓았기에 ‘전염병자라 그러는가’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친구들이 “우리 어머니가 너하고 놀지 말래”라고 했다. “음악반에서도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니 소년단 지도원이 욕설과 더불어 “네가 딱히 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며 주먹을 들었다. ‘성분이 불량하니 괜히 다른 사람 앞길 막지 말라’는 소리였다.
“북한 신분사회에서 가장 토대가 나쁜 적대계층(敵對階層)은 다 감옥에 보냈고, 그다음이 동요계층(動搖階層)인데, 북송동포는 동요계층 가운데서도 가장 아래였어요. 자본주의 물을 먹어본 사람이라며 드러내 놓고 멸시했습니다.”
북송동포 중 일본 친척들이 경제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차별받지 않았다. 하지만 리소라의 집은 가난했다.
“저희 어머니는 부모님 승낙 없이 고등학교 때 혼자서 북송선을 탔거든요. 조선 반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시겠다고. 그러니까 자존심 때문에라도 송금(送金)해달라, 도와달라고 손을 안 내미셨죠. 저는 새끼발가락 발톱이 없습니다. 늘 작은 신발밖에 못 신어서 새끼발톱이 나오지 못한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지금 제 발톱이 귀엽다고 하는데, 제 어린 시절은 이럴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 앓아
열 살 때 비로소 엄마가 일본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는 집에서 일본 얘기나 일본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다 어머니 동무들이 모이면, 커튼을 친 후 새카만 모포를 이중삼중으로 덧씌우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 자기들끼리 조용조용 부르던 노래를 기억한다. 알고 보니 일본에서 배운 곡들이었다.
“본인들은 ‘따뜻하고 자애로운 어버이의 품’을 그리며 북한에 왔는데, 현실은 자기랑 가족들이 다 천대받고, 개선 방법도 없고…. 그 속이 얼마나 복잡했을까요? 이분들은 모일 때마다 눈물을 흘렸어요. ‘모임에 못 나온 누구누구가 붙잡혀 갔다’는 얘기도 은밀하게 했습니다.”
어려서 받은 차별이 어머니 탓이었다는 걸 알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다. “일본에서 어떻게 왔느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입을 딱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쌓이니 몸에 탈이 왔다. 유아 류머티즘 관절염이었다. 계속 열이 나면 이불을 뒤집어쓰고 말없이 며칠을 앓았다. 16세 무렵엔 증상이 심해져 7개월 동안 걷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춘기를 보내며 어머니하고는 점점 소통을 안 했고 ‘아버지 딸’로 살았던 이유다.
대학 진학도 사연이 많다. 북한은 9월 학기제. 김정일 생일(2월 16일) 행사가 끝나면 시험을 보고, 구역별로 개인 등수를 매긴다. 14등까지는 김일성대·김책공대 등 중앙대학 진학, 그 뒤로는 석차에 따라 일반 대학, 지방대학, 전문학교 등으로 배정하는 식이다. 물론 석차대로 이뤄지는 법은 없다. 당 간부, 돈주 등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사업’을 해서 등위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제가 중앙대학에 갈 수 있는 등수에 들어간 거예요. 그런데 갈 수 없다는 걸 알았죠. 제가 중3 때 청진에 물리 전문학교가 생겼습니다. 원자력발전소 요원 양성 학교였죠. 졸업하면 거의 다 소련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 교원들이 와서 학교 성적을 보고 예비 입학생을 뽑아 시험을 치거든요. 청진에 가서 두 번 시험을 쳤는데 제 가족 상황을 안 다음부터는 찾지 않더라고요.”
동요계층 귀국자를 공부하라고 외국으로 보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깨달음
대학 진학을 준비하던 무렵, 하느님 같은 존재였던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7세 나던 해 5월 5일이었다. 1차 대학, 2차 대학 합격통지서도 오지 않았다. 성적으로 보자면 당연히 와야 하는데 오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전까지는 제 눈앞의 개별적인 사람들을 미워했었죠. 사로청(사회주의로동청년동맹·현재는 김일성김정일주의청년동맹) 지도원도 밉고 교사도 밉고…. 그러다가 ‘어쩌면 북한이라는 곳의 정책이 이럴 수 있겠다, 이건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돌아가는 상황을 다 이해하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을 증오하던 마음이 다 없어졌어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증오하고 미워하며 산다는 건 굉장한 스트레스입니다. 특히 어린 마음엔 더하죠. 한국에서는 누가 미우면 전학이나 이사를 가면 되는데, 북한은 그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스트레스가 극심했는데, 한순간에 제 내면(內面)의 어딘가가 뻥 뚫리면서 ‘이 사람들에겐 죄가 없구나, 이 나라의 어딘가가 잘못됐지 이 사람들 잘못은 아니구나’라고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대학을 안 가고 집단 배치받아 노동자로 나가겠다고 생각했는데, 담임 선생님이 입학통지서를 가지고 왔다. “대학에 가서 네가 찾지 못한 답을 찾아보라”는 말씀에 마음이 흔들렸다. 결과는 불합격.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당시 몸무게가 37kg으로, 합격 체중 38kg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필기시험에는 붙었지만, ‘튼튼한 몸으로 나라에 이바지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했다. 간염으로 1500m 오래 달리기도 완주하지 못했고 수류탄 던지기도 못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대학에 자리가 났다. 기술대학이라 여학생들이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일 힘든 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전기기계공학과라고 했다. 전기도, 기계공학도 다 공부해야 한다고 했다. 21명 중 여학생은 리소라 혼자였다.
9월에 대학에 입학하니 11월에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공부가 아니라 건설 사업장 동원이었다. 평창구역 광복거리 쑥섬 제방 건설에 모든 학생이 참여했다. 1980년대는 문수거리, 통일거리 등 각종 건설 사업에 김정일이 북한 전역의 대학생들을 대거 동원하던 시절이다. 북한은 대학생들을 혁명을 위한 미래의 간부로 양성한다. 그래서 건설 현장에서 단련시키는 것이다. 건설 동원이 전부가 아니다. ‘교도대(敎導隊)’라는 준(準)군사조직의 훈련에도 참가해야 한다. 교도대는 겨울기(期)가 있고 여름기(期)가 있다. 훈련기간은 6개월이다. 모든 대학생의 의무다.
“2학년 때도 평양 건설 현장에 나갔다가 집에 와서 3일 지내고 바로 평양교도대로 나갔습니다. 제 보직은 85mm 고사포 3번수였어요. 적 비행기가 날아오면 그걸 보고 조준수한테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훈련을 겨울에 했는데, 지내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목욕탕이 없으니까 이랑 벌레가 나왔어요. 한 달 후부터는 쌀도 안 줬습니다. 아침에 강냉이 20알 주면서 이게 한 끼 식량이고 반찬은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래요. 실전(實戰) 훈련이라는 겁니다.”
대학 성적은 좋았다. ‘도면(圖面) 그리기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1992년 졸업 후, 교원이 되고 싶었지만 현장으로 갔다.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남으라고 했지만, 교단에서 거짓말하기는 싫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전문직 수업, 그러니까 전자기 이론을 가르칠 때도 ‘위대한 수령 김일성 원수님께서 지도하시기를’이라고 시작해야 하거든요.”
자살은 ‘공화국 낙원을 배신’하는 중대범죄
북송선을 탄 재일동포들이 일본 니가타항의 길에 평양을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심어 버드나무길을 조성했다는 일본 신문 기사(왼쪽). 이때 심은 236그루 가운데 83그루가 살아남았다. 일본으로 돌아온 북송동포들은 북송동포들이 무사 귀환할 때까지 그들을 잊지 말자며 ‘버드나무길 재건’을 추진하고 있다(오른쪽). 사진=리소라 |
중앙당에서 온 사람이 문건을 살펴봤다. 삼촌 이내 친척 중에 노동당원이 없으니 이 대학에 들어올 성분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이 전기기계 공장이 아니라 조그만 부품 공장 설계원으로 배치받은 까닭이다. 설계실장이 갑자기 ‘내일부터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 한번 배치받으면 여간해서는 직장을 옮길 수 없는 곳이 북한이다. ‘해고’라는 건 이례적인 조치였다. 공장이 군수품(軍需品) 공장으로 전환, 김정일의 현지 지도를 받은 것이 배경이었다. 핵심 설계부서에 위험인물이 근무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살 충동이 일었다. 북한에선 자살을 ‘공화국 낙원을 배신’한 중대범죄로 다스린다. 본인이 아니라 자살자의 가족 전체가 처벌받는다.
“내가 ‘너희 같은 인간들 손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거든요. 대학 때도 두어 번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다 넘겼어요. 그런데 그때는 정말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거리에 조금씩 시체가 나오기 시작하는 등, 고난의 행군 도중이라 제가 자살한다고 해도 가족들이 당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죠.”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죽을까, 자동차 사고나 기차 사고를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지금의 시아버지가 갑자기 ‘며느리 삼겠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귀중품인 ‘초콜릿 한 판’을 들고서였다. 시댁은 소문난 부잣집으로, 롱밴 자동차와 선전대 차 두 대를 보유한 북송동포였다. 그는 “내가 왜 우리 아버지나 형제가 일본에서 피땀 흘려 번 돈으로 간부들에게 뇌물을 고이며 비굴하게 살아야 하나. 가난하게 살더라도, 차라리 너처럼 당당하게 사는 것이 부럽다”고 했다. ‘천대받지 않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한테도 내가 알지 못하는 삶의 고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제안에 응했다. 시아버지는 부자인 친구들이 “왜 그런 며느리를 얻느냐”며 핀잔을 주자 “내 며느리 욕하지 말라”며 싸움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리소라를 아꼈다.
결혼 몇 년 후, 시댁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시아버지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고 일본에 계시는 시할아버지도 암으로 사망했다. 하루아침에 송금이 끊긴 것이다. 살림 규모를 줄이지 못하는 가족들은 빚을 내서 살았다. 가구를 내다 파는 등 뒷수습을 하다가 다시 병이 찾아왔다. 그래서 분가(分家)를 하고 장사를 시작했다.
“나진 선봉에서 담배를 가져다 팔았는데 안전원들이 자꾸 물건을 압수하고…. 다른 사람은 뒤로 다 물건을 찾아오는데, 저는 아무리 뇌물을 써도 귀국자(북송동포)라고 물건을 안 돌려주는 겁니다. 그러다가 2003년 겨울에 우리 아들이 영양실조로 죽게 됐어요. 물을 한 모금 먹이니까 5분 안에 항문으로 다 나오더군요. 설사도 하고요. 내장이 완전히 기능을 멈춘 거죠.”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어서 이 땅이 나를 이렇게까지 핍박하는가.’ 자신이 당하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자식이 죽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그날 저녁 독하게 결심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죽이리라.’
장사로 성공하다
사람이 죽어 나가도 다 거두지 못해 들개가 시신을 뜯어 먹던 시절이다. 동창들에게 연락하니 요직에 있는 사람이 많았다. ‘유일한 여학생’이라 자기가 누구라는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탄광 수출 당비서에게는 열탄(熱炭), 수산사업소 고위직으로부터는 낙지(오징어)를 받아다 팔았다. 처음엔 도매상에게 넘겼고, 장사가 손에 익은 뒤엔 이문을 더 남기기 위해 연탄을 직접 찍어 팔기도 했다. 나중에는 밀무역까지 하며 규모를 키웠다. 막판엔 평양 수매양정국까지 선이 닿았다. 개선문 앞에 청사가 있는 힘센 기관이다. ‘기회만 차려주면 하겠다’ 대답하고 유엔이 지원한 쌀을 취급했다. 현품이 아니고 ‘증서’를 팔았다. 증서 보유자가 쌀 창고 앞에 가서 현품으로 교환해가는 거래였다. 석탄은 가끔 다 팔리지 않았지만, 쌀은 늘 완판이었다. 언제 다음 지원이 나올지 모르니, 물건이 나오는 족족 무조건 다 팔렸다.
“그때 북한에서는 1만 엔이면 네 식구 1년 쌀값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한 달에 300달러를 생활비로 썼습니다. 세대주(남편)한테 아사히 맥주, 기린 맥주 사드리고 출근할 때 아침마다 고양이 담배 넣어주고 일본 원단으로 옷도 해 입혔죠. 그러다 보니까 우리 가족 네 명이 평생 살려면 얼마가 필요할까, 계산이 나오더군요. 목표가 생기니까 막 달렸습니다. 평양에 직접 가서 전표를 받아오고, 밥가마(밥솥) 뇌물로 돌리면서 간부 사모님들 공략하고…. 거래량을 확 늘렸습니다. 탈북 직전에는 저랑 일하는 분들이 전국 쌀 가격을 낮췄다 올렸다 할 정도였어요.”
중앙당 중앙행정국, 정무원에 손을 써서 남편 직장도 바꿨다. 평양 모 기관에 간부로 갔다. 아이들에게는 예술을 시켰다. 평양 만경대에서 TV 출연도 시켰다. 지방과 평양에서 큰 집도 샀다. 그동안 괴롭혔던 자들에게 복수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잘살아서 너희를 내 발밑에 앉힐 것이다’라는 심정이었다.
“또 하나, 북한이 어디로 가는지를 꼭 보고 싶었어요. 어디까지 거짓말을 하고, 사람을 얼마나 더 죽이며 유지할 수 있는지, 그 끝을 보고 싶었습니다.”
마약에 중독된 사회
2021년 12월 14일 북송 사업 개시 62주년을 맞아 니가타항에서는 조총련을 규탄하고 희생된 북송동포들의 넋을 달래는 행사가 열렸다. 사진=리소라 |
“고등중학교 5학년생이니까 16세? 또래 친구 중에 한 집 부모가 그런 약을 쓰면 같이 다니는 아이들이 다 중독이 된다고 하더군요. 호기심에도 하고, 여자아이들도 다이어트한다고 피부 새하얘진다고 마약을 쓰고, 시험 기간에 빙두를 하면 잠도 안 오고 공부가 잘된다고 먹고….”
생각보다 마약이 아주 가까이 와 있었다. 평양은 마약이 범람하는 도시였다. 특권층만 다닌다는 만경대 학생궁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집 아이들은 거의 100% 마약에 절어 있었다. 아이들이 마약을 공급해 교사 중에도 중독자가 많았다. 리소라의 자녀들이 중독자가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마약 청정 구역을 찾아 이사하려고 했는데, 그런 곳은 없었다. 사리원도, 해주도, 개성도, 북쪽 청진, 김책도, 주변 시골 마을에도 마약이 넘쳐흘렀다. 사람들은 마약을 에너지 드링크처럼, 가정상비약처럼, 마치 한국에서 커피를 마시듯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마약을 피하는 길은 탈북밖에는 없었다.
“남편한테 이야기했죠. ‘이 나라에 우리가 살 곳이 없다. 아이들 때문에 내가 사는데, 우리 아이들이 마약 중독되는 건 못 보겠다. 마약 하나만 보더라도 북한에는 미래가 없다. 가야 되겠다.’”
남편은 못 간다, 가지 말자고 했다. 석 달 뒤면 간부로 발령 날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다른 사람은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했지만, 리소라는 그 전까지는 중국 쪽으로 넘어간 적이 없었다. 토대가 나빠 시범 케이스로 걸릴 수도 있고, 처벌도 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2007년 2월에 강을 건넜습니다. 2월 16일 김정일 생일 전후가 특별경비 주간이거든요. 기다렸다가 월말에 중국으로 갔어요.”
뒤늦게 들은 어머니 탈북 소식
중국 측 사업파트너가 아지트를 마련해줬다. 시내에 나가서 도서관에 들러 한국 신문, 잡지를 다 거둬 왔다. 기사를 읽는데 많이 낯설었다. ‘일본으로 가야 하나?’는 생각을 했다. 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2004년에 탈북했고, 리소라는 어머니의 일본행 소식을 2006년에야 처음 들었다.
“어머니가 말도 없이 2004년에 없어졌는데, 저는 몰랐죠. 제 생활도 바빴으니까. 그래서 오빠네 집에 같이 있겠지 했는데, 남편 간부 사업 당시 알았어요, 어머니가 탈북했다고. 그래서 처음엔 ‘어머니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마구 성을 냈는데, 오빠가 저를 말리더라고요. 자기가 가라고 했다고. ‘그러다가 오빠가 단련대 잡혀가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우리가 받을 피해는 생각 안 해봤냐?’고 하니까 ‘야, 어머니가 17세에 부모 형제하고 갈라져서 죽을 때까지 서로 못 본다는 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방법만 있으면 가라고 했다’고 하더군요. 집에 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해가 갔습니다.”
처음엔 스위스로 가려고 했다. 함남도·평북도·자강도 사이 방목지에서 염소를 키우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인민에게 우유를 먹이려는 당의 배려라고 했다. 물론 실패했다. 방목지를 조성하다 사람도 많이 죽었다. 리소라도 죽을 뻔했다. 직장에서 노동 파견을 나갔던 길이었다. 산이 험한 곳이라 도로 사정이 열악해 차가 전복(顚覆) 됐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절친한 동무 둘이 사망했고, 리소라는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고는 수시로 일어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인민들이 이렇게 희생하는데, 관리인들은 염소를 빼돌려 고기로 팔기도 했다. 스위스가 선진국이라는 걸 알았지만, 왜 북한과 이런 식으로 참담한 일을 추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일을 알리고 막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탈북 후 행선지를 스위스로 정하고 아이들을 데리러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죠.”
남편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12월에 탈북을 결행한 이유다. 12월은 사실 탈북 적기가 아니다. 국경연선에서 동계 훈련에 들어가 경비가 심해지기 때문이다.
“10월에 남편이 ‘가자’고 해서 일단 저 혼자 국경연선으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그쪽에서 태어났다는 가짜 출생증을 만들었어요. 그게 없으면 북중 접경지대로 이동이 불가능하니까요.”
돈을 써서 사람을 시켜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한테는 “중국에 있는 외할머니를 만나러 간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아이들 학교에는 “식구들 전부 평양으로 이사 간다”고 했다. 갑자기 없어지더라도 의심을 사지 않으려는 준비였다. 그다음에 남편이 와야 하는데, 기업소 행사가 겹쳐 출발을 못 했다.
남편과의 이별
2007년엔 동계 훈련 시작 지시가 일찍 떨어졌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일단 아이들과 먼저 강을 건너고, 남편은 나중에 오기로 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2007년 12월 13일. 아이들은 12세, 9세였다. 중국 사업 파트너들이 고무보트를 가지고 나와 줄을 당겨 탈북을 도와줬다.
“다음 날 아침 혜산(惠山) 쪽을 보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저 땅이 나를 핍박했구나. 원망스러웠죠.”
대학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뭔가 제도가 이상하다는 건 느꼈지만, 원망은 없었다. ‘위에서도 노력하는데, 잘 안 되는 것이겠지. 나도 이 나라의 한 성원으로 사회를 위해서 열심히 살면서 기여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살아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강물에 신분증을 던졌다. ‘북에서 받은 이름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결의였다. 남편을 기다리면서 일본영사관에 전화를 했다. 스위스대사관은 번호를 몰랐고, 한국과 일본의 영사관 번호는 중국 사람이 알려줬다. 일본에 연고자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다. 모처로 오라기에 “제가 남편을 기다려야 되니까 남편이 오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사고가 났다. 아지트가 발각된 것이다. 리소라에게 현금이 많을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들이 벌인 소동이 문제였다. 돈을 받고 강을 건너게 해준 북한 군인 사이에 싸움이 나서 서로 총질할 정도였다. 20일쯤 다른 곳에서 숨어 지내는데,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이들을 맡겨두고 북으로 다시 가려고 했는데 국경연선의 브로커가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고 말렸다. 그랬다가는 남편도, 아이들도, 리소라도 다 죽는다는 얘기였다. 그때 이후로 오늘까지 남편을 본 일이 없다. 아이들이냐 남편이냐 사이에서 아이들을 택해 남편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남아 있다. 납덩어리처럼 무거운 무언가가 없어지지 않는다.
탈출극
“중국으로 북한 보위부가 들어왔어요, 저희를 잡으려고. 저한테 연락해준 분은 어디 대사관에 가든 다른 데 가든 빨리 중국을 뜨라고 했습니다.”
심야에 쳐들어온 체포조를 피해 옆집을 거쳐 잠옷 바람으로 도망쳤다. 택시를 잡아 타고 “사람이 많은 데로 갑시다”라고 했다. 백화점에 들어가 사람들 사이에 섞였는데 보위부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여행용 트렁크를 파는 매장에 몸이 건장한 중국 남자 여럿이 보였다. 그 사람들한테 100위안짜리 중국 돈 한 장씩을 주고 ‘경호’를 부탁했다. 15명의 중국 남자가 리소라의 가족을 에워쌌다. 더 많은 숫자의 보위부원이 성난 얼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탈북할 때 극한 상황에 대비해서 극약을 챙겨 갔었어요. 아이들 먼저 먹이고 나도 먹자라고 결심하고 약을 꺼냈는데, 아이들도 지금 상황이 급박한 걸 아는지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보더군요.”
막 약을 먹이려는데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어머니였다. “베이징에 있는 일본대사관으로 가면 받아줄 거다”는 전갈이었다. 리소라는 중국에 숨어 있는 동안 위급 상황에 따른 대책을 세워놨다. ‘돈의 힘’으로 만든 비상연락망이었다. 택시기사가 백화점 밖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런데 백화점 정문까지 어떻게 가나. 보위부 사람들이 얼굴이 다 보일 정도로 포위망을 좁혀왔다. 중국 ‘경호원’들의 활약으로 몸싸움 끝에 택시에 탑승. 택시 뒤로 차 두 대가 따라왔다. 택시기사가 ‘이대로 가면 잡힌다’며 자기 집 근처 복잡한 골목 안으로 차를 몰았다. 동료 기사들에게 연락해 미행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차를 바꿔 타며 겨우 위험지역에서 벗어났다. 리소라와 아이들은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미리 대기시켜둔 장거리 이동차에 탑승, 베이징까지 갈 수 있었다.
‘괴물의 나라’로
2021년 12월 14일 니가타항에서 열린 북송동포 위령행사에서 발언하는 리소라 씨. 사진=리소라 |
일본대사관에서 의사를 불러줬다. 그곳에서 10월 말까지 지냈다. 일본 정부는 탈북자들에게 엄격했다. 북송선을 탔다는 증거가 있거나 일본에 확실한 연고가 있는 사람만 입국을 허락했다. 리소라 가족은 운이 좋았다. 2008년 쓰촨 대지진 때 일본에서 지원을 많이 했다. 덕분에 문제를 풀기가 수월했다. 아이들이 영양실조라는 사정까지 겹쳐 인도주의적으로도 지원을 받았다. 조기(早期) 일본행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일본대사관에서 아이들이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일본에 간다니까 난리가 났죠. 아이들한테는 일본은 ‘괴물의 나라’였으니까요. 무서웠던 겁니다. 북한에서 받았던 반일(反日) 교육의 결과인데, 이걸 12세짜리한테 어떻게 설명합니까. 마지막에 너무 말을 안 들어서 제가 딸을 때렸어요. 대사관 분들이 아동 학대라면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아들은 어리니까 제 말을 잘 듣는데, 딸은 사정도 모르면서 ‘일본에 가지 않을 테니 도로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외할머니가 보내준 디즈니 DVD가 해결했다. ‘만화 속의 일본어 더빙’을 따라 하며 아이들의 일본어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했다. 대사관 직원들의 친절도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데 일조했다. 24시간 전기가 들어오고 물이 나오고, 문명 생활도 아이들이 좋아한 부분이다. 일본 교과서를 달라고 해서 45분 수업, 10분 휴식 시간표를 만들어 아이들과 일본어를 공부하고, 은혜를 갚는다는 심정으로 대사관 안을 청소했다.
청소부 등으로 일하다가 대학 진학
도쿄에 도착하니 공항에 어머니가 나와 있었다. 어머니의 이웃들은 탈북민의 공중도덕 수준을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첫 숙소는 노숙자 쉼터, 가정폭력 피난처였다. 보증금이 없으니 집을 빌릴 수도 없었고, 돈이 있다 해도 탈북자들의 경우 부동산들이 중개를 꺼려 했다. 법을 아는 이에게 도움을 구하니 ‘생활보호신청을 하라’고 했다. 이에 10평 남짓한 집이 배정돼 세 식구의 보금자리가 됐다. 첫 직업은 호텔 방 청소였다.
“제가 일본으로 간 목적은 ‘북송사업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나를 이렇게 괴롭혔나?’ 그걸 알아보자는 것이었어요. 북한에서는 신문이고 뉴스고 다 거짓말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일본어도 공부하고, 돈도 벌고 일본 사회에 대해 빨리 알고 싶었습니다.”
8개월을 열심히 일했는데 근무 중에 정신을 잃었다. 북한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이었다. 직장을 옮기고, 더 늦으면 곤란할 것 같아 야간 중고등학교를 거쳐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일본에선 북한 학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학비는 자체 부담이었다. 사이버대학 야간학부에 등록하면 학비를 3분의 1로 깎아줬다. 등록금은 일 년에 60만 엔 정도. 중간에 돈이 없어 휴학하고 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버느라 졸업하기까지는 6년이 걸렸다. 그 와중에 아이들도 모두 대학에 보냈다. 지금은 국숫집을 운영하며 ‘모두 모이자’라는 북한 인권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법을 전공한 건 원대한 목표가 있어서였다.
“일본에 오니까 법치국가(法治國家)라는 말이 자꾸 들렸습니다. 법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고 해요. 북한에서는 법률 문건 자체가 기밀문서죠. 일반 사람이 접하면 안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사람은 법 지식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법을 공부했습니다. 북송사업의 부당성을 알리려면, 법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꼭 필요하겠다고 판단한 것도 이유입니다.”
日 법원, ‘거짓 선전은 위법’
대학에 다니는 도중, 국회도서관에 가서 재일동포 북송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북송사업 인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에서도 일했는데, 국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려면 영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을 미국으로 유학 보낸 이유다.
최근 활동은 북송사업의 죗값을 묻는 소송. 일본으로 돌아온 북송동포 5명을 원고(原告)로, 일본 정부와 김정은을 피고(被告)로 했다. 한 사람당 1억 엔의 보상을 요구했다.
― 금년 3월 23일 판결이 났죠? 국내 언론에서는 기각(棄却)되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대체로 그렇게 아시는데 판결문을 보면 의미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저희가 바라던 중요한 부분을 판결문에서 거의 다 인정했어요. 핵심은 북송사업이 북한과 조총련 등 단체에 의해 거짓 선전으로 진행된 일이라는 거죠. 피해보상에 관한 부분은 시효(時效)가 지나 인정할 수 없다고 했지만, 북송사업 자체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법적으로 확인한 겁니다.”
그동안 한일 양국 국민 가운데는 ‘북송동포들이 자발적으로 배에 오른 것 아니냐, 북한 도착 후의 인권 유린은 심각했지만, 선택 자체는 자발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번 판결문은 ‘거짓 선전이 있었고 그 부분은 확실히 법률 위반’이라고 확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당시, 230만~240만 정도의 재일동포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귀국선을 타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왔고, 1959년 12월 북송사업을 시작할 무렵엔 60만 정도만 남아 있었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들의 범죄율이 높고, 사회보장으로 살아가는 비율도 많은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겼다. 일본 정부가 볼 때, 재일동포들은 일본 사회의 잠재적인 위험군(危險群)이었다. 생활보호 대상자 비율도 일본인의 약 8배였고 사회주의 성향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중 6분의 1 정도를 일본 밖으로 내보내려는 계획을 세웠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일본과 북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지점이다. 정식 국교가 없으니 일본 적십자와 북한 적십자가 연대해 일을 진행했다. 이것이 이른바 북송사업(北送事業)의 전말(顚末)이다.
일본 법원은 이번 판결문을 통해 ‘북송사업 과정에서 고의(故意)로, 거짓 선전한 증거가 있으며 이것은 죄’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판결문에 따르면, 북송동포들은 자기가 좋아서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아니라 일본과 북한 당국에 의해 속아서 북으로 건너간 것이 된다.
일본 적십자사의 무신경
리소라 씨는 북송동포 관련 NGO 모두모이자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도쿄에 있는 조총련 본부 앞에서 조총련 규탄 행사를 하는 모두모이자 회원들. 사진=리소라 |
“고등법원 항소(抗訴)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3월 23일에 판결이 나고 4월 3일에 변호인단과 원고들이 기자회견을 했죠. 지금 당장은 북한 인권 시민운동에 큰 성과가 없지만, 한 걸음이라도 계속 전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저희 재판을 통해 세계 어딘가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인권 침해 사례를 환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고요. 시간이 흘러도 잘못된 일을 한 가해자는 언젠가는 반드시 처벌을 받고, 피해자는 보상을 받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싶습니다.”
일본 적십자사 역사관에 북송선 사진이 아직까지 걸려 있는 일도 가슴 아프다. 일본 적십자사는 9만3000여 명을 북송하고 수십만의 이산가족을 만든 주체다. 이산가족을 만든 일 자체가 적십자 정신 위반이다. 그런데 기념관에 커다란 북송선 사진이라니! 이것은 아직도 일본 적십자사가 재일동포 북송이 ‘기념할 만한 잘한 일’이라고 평가한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아니면 아예 무신경한 것이든가.
“일본 적십자사는 북송동포들의 운명을 망친 단체입니다. 그 사람들이 북한에 가서 그렇게 고생하고, 인권침해 사례를 지속적으로 호소하는데도 북송선 사진을 방치하고 있다니요? 언어도단(言語道斷)입니다. 제 부모님은 북송사업으로 청춘과 인생을 다 빼앗겼습니다. 젊음과 인생이 되돌아오는 건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그분들의 빼앗긴 삶을 조금이라도 보상받을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이 일의 전후좌우(前後左右)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고, 죄가 있는 사람은 처벌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이들 모습 보여주고 싶어”
북송동포 9만3340명의 이름을 모두 새긴 비석 건립도 추진 중이다. 명단은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 일본 출입국관리소가 명단을 가지고 있고, 일본 적십자사도 북송 신청서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일본 적십자사는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명단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살아 있는 고령자들을 구출하고, 이산가족을 만나게 하려면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절박한 문제다. 그래서 일본 적십자사에 다시 요청했다. 당신들이 확보한 명단을 가지고 북한 적십자사에 이 사람들의 생사를 확인해달라고. 일본 적십자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리소라 씨는 재일동포 북송연구회라는 단체를 새로 만들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그분들이 어디에서 고문당했고 어떻게 죽었는지, 그걸 다 밝혀내서 자료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리소라 씨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슴 아픈 일이 있다. 생사를 모르는 남편과 북한에 남아 있는 형제의 일이다.
“남편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딸이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하는데, 장차 결혼식장에 제가 혼자 앉아 있을 걸 상상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꼭 살아서 남편에게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정의(正義) 실현을 갈망하는 모든 분에게 부탁드립니다. 부디 북송동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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