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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행

[숲과 사찰] 좁은 돌 틈 지나니 문득 화엄세계 현재위치

마운틴뉴스이재진

  • 입력 2022.10.13 09:39
 

영천 은해사 중앙암

영천 은해사 암자 중 한 곳인 중암암에는 일주문이 없다. 바위 군락들이 사천왕처럼 오가는 사람들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내려다보고 있다.
 

수많은 연봉을 거느린 영남의 명산 팔공산(1,193m)에는 300여 군데가 넘는 사찰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가람은 서남쪽 대구 동화사와 동북쪽 경북 영천 은해사라고 할 수 있다. 대도시 대구를 끼고 있는 동화사와 달리 은해사는 산문부터 울창한 소나무숲이 가득찬 고즈넉한 기품을 지닌 사찰이다. 은해사는 만만찮은 내력의 사찰로 신라 헌덕왕(809년) 때 지어졌다. 조카인 애장왕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헌덕왕. 왕위찬탈 과정에서 정쟁의 피바람이 불었다. 헌덕왕이 그때 숨진 원혼을 달래고 참회하기 위해 지은 절이 은해사다. 조선시대에는 중종 맏아들 인종의 태실을 팔공산에 묻으면서 은해사가 이 태실을 지키기도 했다.

은해사에는 부속 암자가 8곳 있다. 북쪽 계곡길을 따라 3㎞쯤 가면 만나는 운부암,  비구니 스님들이 수도하는 백흥암, 가파른 길을 올라가야 하는 묘봉암 등 저마다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은해사 산문을 나와 다른 쪽 산자락에 앉아 있는 거조암은 오백 나한으로 유명한 절집이다. 영천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거조암 영산전에는 저마다 다른 표정과 자세를 한 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은해사 입구 솔숲. 정갈하고 건강한 소나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 준다

은해사 암자 중 가장 독특한 곳

이 중에서 해발고도 780m로 은해사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중암암中巖庵은 특별한 정취를 지닌 곳이다. 은해사에서 중암암까지는 편도 4.8㎞로 짧지 않고 길도 제법 가파르다. 차로 들 수도 있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면 걸어갈 것을 권하고 싶다(차를 타고 백흥암까지 간 후 걸어간다면 중암암까지 2.3km). 기암괴석과 아름드리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청정 숲을 편리함 때문에 지나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등산 마니아들은 일반 트레킹 코스 대신 은해사 뒤편 태실봉에서 중암암으로 가는 등산로를 택하기도 한다. 작은 물길을 따라 암자로 이어지는 길은 솔숲과 활엽수 터널이 만들어내는 어둑한 산길. 가파른 길을 오르자면 제법 땀이 나지만 청아한 물소리와 소슬 바람이 식혀 준다. 절집을 지나 고즈넉한 산중 암자로 가는 길은 ‘마음을 닦는 길’이다.

 

팔공산의 가을 모습을 오롯이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중암암이다. 늦가을이 되면 불타는 듯 선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팔공산을 감상할 수 있다. 말 그대로 바위 위에 세워진 암자. 은해사의 여러 암자 중 자연미가 가장 살아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중암암 삼층석탑. 고려시대 초기 석탑으로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332호.
 

돌 틈이 일주문 역할

중암암은 작은 돌 틈을 통과해야 벼랑 위에 앉은 암자를 만날 수 있다. 바위로 이루어진 작은 돌 틈이 일주문인 셈이다. ‘가운데 중中’에 ‘바위 암巖’ 자를 쓰는데, 사람들은 한자이름보다는 흔히 ‘바위구멍 절’이라 부른다. 중암암은 이름 그대로 바위 사이로 난 산문으로 들고 나야 한다. 스님들 선방인 소운당을 지나면 바위 두 개가 서로 기댄 돌구멍이 나타나는데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크기의 석문이다.

돌구멍을 지나면 곧 법당 앞마당이다. 손바닥만 한 마당이지만 벼랑 위에서 바라본 풍광은 예사롭지 않다. 오히려 주변의 압도적인 풍광 속으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녹아든 모습에 절집의 물리적인 크기를 잊게 된다.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암자 마루는 더할 수 없이 여유로운 공간이다. 산바람에 울리는 풍경소리가 산새소리와 어우러져 고요한 산중의 적막을 가를 뿐, 산사의 고요한 정취를 느끼기에 이보다 나은 곳이 있을까 싶다. 

암자 주변은 온통 큰 바위 투성이다. 입구만 돌구멍이 아니라 곳곳에 돌구멍과 돌 틈이 있다. 심지어 해우소조차 돌구멍 위에 있다.

통도사와 해인사, 그리고 중암암에서 온 스님 셋이 절 자랑을 했다.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그 문지도리에서 쇳가루가 한 말 석 되나 떨어진다”며 통도사 스님이 절의 규모를 뽐냈다. 해인사 스님도 질 수 없다. “우리 해인사는 스님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워야만 저을 수 있다”고 했다. 두 스님의 자랑을 가만히 듣고 있던 중암암 스님은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옛날 중암암에서 함께 수행했다는 스님들 일화다.

바위 틈을 통과하면 중암암 대웅전이다. 암자 마당은 손바닥만 하지만 팔공산을 품에 안을 듯 절벽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다.

김유신과 원효가 수행한 공간

법당 뒤편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위쪽에 극락굴이 있다. 모로 돌린 몸을 한 뼘 남짓 갈라진 좁은 바위틈으로 밀어 넣는다. 바위틈의 끝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둠. 칠흑 같은 어둠도 두렵지만 잘못 들어갔다가는 바위틈에 몸이 꽉 끼어 오도 가도 못할 것만 같다. 이 틈을 통과하면 소원이 이뤄지고 극락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세속적인 욕망을 덜어내지 못하는 중생으로서는 통과한다는 게 언감생심이다. 

극락굴에서 바위를 더 타고 오르면 바위에 뿌리 박고 자라는 ‘만년송’이 있다. 만년까지야 어림도 없겠지만 척박한 곳에 뿌리 내리고 기운차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나이가 족히 수백 년은 넘어 보인다. 여기서 굽어보는 풍경 또한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이곳은 팔공산 조망 포인트. 그 앞으로는 삼인암 등 명물 바위가 있다.

은해사에서 일주문을 통과해 이정표 따라 중암암 가는 길은 찻길이 험하고 좁기 때문에 주말이나 휴일에는 차를 두고 걸어가는 편이 낫다. 

삼국통일 전후의 두 걸물 김유신과 원효도 중암암에서 수행하고 공부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의 인생에서 터닝포인트가 된 곳이 왜 하필 중암암이었는지 이곳을 와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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