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2.09.18 05:00
업데이트 2022.09.18 09:11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물…탄산 섞인 ‘달기약수’
무더위가 절정을 이뤘던 지난달 17일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에서도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푸른색 육각 지붕 밑에 ‘원탕약수’라고 적힌 현판이 내걸려 있고, 그 아래로 사람들이 둘러앉아 가운데 뚫린 샘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북이 모양 석상 앞에 뻥 뚫려 있는 샘이었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샘에서는 계속해서 물이 솟아나고 있었다. 바가지로 물을 몇 번이고 퍼내도 다시 솟아올라 일정한 수위를 채웠다. 물이 솟을 때 ‘뽀글뽀글’ 소리와 함께 기포도 생겼다.
이곳은 경북 청송군이 자랑하는 ‘달기약수’가 나오는 약수탕이다. 약수가 샘솟는 여러 지점 중에서도 가장 물맛이 좋다는 ‘원탕’이다. 샘물을 그 자리에서 바가지로 떠 마셔볼 수도 있고, 따로 통을 들고 와 약수를 채워갈 수도 있다. 평일 낮 시간에도 약수를 맛보려는 사람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주말이면 하루에 300명 이상이 이곳을 찾는다. 약수물은 청송군과 달기약수탕 번영회가 관리한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에 위치한 달기약수 원탕에서 한 방문객이 약수를 옮겨담고 있다. 김정석 기자
양가 부모님과 함께 달기약수탕을 찾은 박형섭(48·서울 은평구)씨는 “장인·장모님이 달기약수를 먹고 몸도 좋아진 경험이 있고 다른 지역 약수와 달리 맛도 뛰어나 온 가족이 함께 여름휴가를 맞아 찾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약수 맛보러” 경북 대표 오지로 몰려드는 사람들
인구 2만4000여 명인 청송은 봉화·영양과 함께 경북 3대 오지로 묶여 이른바 ‘B·Y·C’로 불린다. 경북의 큰 도시들과 비교해 찾는 이가 적은 청송이지만, 이 약수 하나 덕분에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달기약수탕 근처에는 약수를 이용한 백숙을 전문으로 하는 식당도 20여곳이나 된다. 식당을 운영하는 이가 아니더라도 주민 누구나 언제든 약수를 떠다 마신다. 청송 사람 모두가 약수에 빚지고 산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청송 소나무식당에서 달기약수로 만든 한방능이백숙 한상차림을 받았다. 각종 산나물과 궁채장아찌·오이지·깍두기·도라지·초석잠장아찌 등 10여 가지 반찬이 먼저 깔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능이버섯이 우러나 짙게 변한 국물이 눈에 띄는 닭백숙이 등장했다. 각종 한약재가 들어가 구수하고 깊은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 달기약수를 이용해 만든 한방능이백숙 한상차림. 김정석 기자
한방능이백숙 육수에는 엄나무와 황기·더덕·마늘·대추 등 몸에 좋은 한약재가 들어가고 닭 한 마리, 능이버섯과 함께 달기약수 약 4L를 부어 40~50분 동안 푹 삶는다. 달기약수에 함유된 탄산 영향으로 육질이 부드러워진다.
윤미옥 소나무식당 대표는 “닭백숙을 만들 때 약수를 쓰게 되면 닭 특유의 누린내가 사라지고 탄산이 들어 있어 고기가 부드러워지고 국물도 개운해진다”고 설명했다.
철·마그네슘 녹아든 탄산수가 달기약수의 비결
달기약수에 들어있는 탄산은 청송읍 부곡리 지역 아래 숨겨진 화강암이 빗물과 만나면서 만들어진다. 빗물이 토양 표면의 퇴적암 틈을 파고 들어가 지하에 스며들고, 화강암 내 이산화탄소가 지하수와 만나 탄산수가 된다. 탄산수가 퇴적암에 있는 철과 마그네슘 등을 융해시키고 이 성분을 함유한 지하수가 다시 지표로 상승한 것이 달기약수의 정체다. 약수에 섞인 철 성분이 물에서 쇠맛이 나게 한다.
달기약수탕 인근에는 달기약수 기원이 적힌 안내판도 설치돼 있다. 안내판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이곳에서 수로공사를 하던 중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약수를 발견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고 적혀 있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에 위치한 달기약수 원탕에 사람들이 약수를 퍼가고 있다. 김정석 기자
조선 철종 재위 당시 금부도사(禁府都事·의금부에서 중죄인을 신문하던 종5품의 벼슬)를 지낸 권성하(1852~1914)가 수로 공사를 하다가 바위틈에서 자란 나무를 뽑자 그 자리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른 것이 달기약수의 시초다.
난데없이 솟아난 물에서는 마치 닭이 우는 것처럼 ‘꼬록꼬록’ 소리가 났는데, 권성하가 물을 마셔보니 물에 바늘이라도 달린 것처럼 혀를 쏘고 물에서 피 같은 맛이 났다. 그 뒤 권성하는 평소 더부룩하던 속이 개운해져 이 물이 약수라는 것을 깨닫고 하인을 시켜 매일 물을 떠다 마셨다고 한다. 이 약수탕은 닭 우는 소리가 났다 해서 ‘달계약수’로 불리다가, 점차 이 지역 골짜기 ‘달기골’ 이름을 따라 ‘달기약수’가 됐다고 전해진다.
위장병·신경통에 효험…학술적으로도 증명
달기약수에는 철분과 탄산이 다량 함유돼 위장병과 신경통·빈혈 등에 효험이 있다. 권성하를 따라 약수를 마신 사람들도 그 효과를 보면서 청송 달기약수는 점차 전국에 입소문을 타게 됐다. 1926년 개봉한 영화 ‘아리랑’의 여주인공으로 명성을 떨쳤던 신일선(1912~1990) 여사가 지병인 신경통과 두통을 고치기 위해 1968년 4월 약수탕에 왔다가 9년간 지냈다는 일화도 있다.
학술적으로도 약수의 효능은 증명됐다. 2000년 대한화학회지에 실린 이성호 계명대 식품영양학과 교수의 학술논문에 따르면 1999년 5월부터 2000년 2월까지 약 1년 동안 계절별로 청송 달기약수에서 총 28개 항목의 함유성분을 분석한 결과 달기약수가 다른 곳보다 철분·칼슘·마그네슘 등 각종 미네랄이 더 많이 함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경북 청송군 청송읍 부곡리 달기약수를 이용해 한방능이백숙을 만드는 모습. 김정석 기자
어느 날 갑자기 땅에서 솟아나 사람들에게 건강을 되찾아주고, 전국 관광객이 청송으로 몰려들 수 있게 해준 약수. 청송 사람들은 약수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매년 특별한 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1962년부터 매년 봄마다 청송 주민들과 권성하의 후손들이 지내는 달기약수 영천제(靈泉祭)다. 달기약수가 끊임없이 솟구치게 해주는 신에게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 솟아날 수 있게 해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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