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X를 타고 진부역이나 강릉역에서 내리면 당일코스로도 충분한 멋진 길이 있다. 자연이 주는 초록 풍경 속으로 들어서 숲 냄새를 맡으며 계곡 사이로 졸졸 흐르는 냇물 소리에 귀 기울이며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를 느끼기엔 더 없이 좋은 코스이다. 숨과 쉼이 있는 100년 소나무가 가득한 대관령숲길이다. 특히 무더운 여름철엔 하늘, 산, 바다를 아우르는 대관령숲은 우리에겐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대관령 소나무숲에 들어서면 숲길 곳곳에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를 만난다. 국제 규격의 축구장 571개 규모(400ha)에 솔방울에서 채취한 종자를 땅에 심는 ‘직파방식’으로 만들어진 100년이 넘는 수령을 가진 금강소나무 숲이다. 일제의 목재수탈로 민둥산이 된 이곳에 조성한 인공조림지이다.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붉은빛을 띠는 껍질로 마치 아픈 자신의 탄생비밀을 감추려 하는 것 같다. 1988년 문화재 복원용 목재 생산림으로 지정되었고, 2000년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22세기를 위해 보존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
4개 순환코스와 12개 개별코스
2018년, 대관령 내에 만들어졌던 여러 길을 연결한 102.96km에 달하는 대관령숲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4개 순환코스와 12개 개별코스로 이루어진 길이다. 대관령숲길 안내센터에서 시작해 다시 안내센터로 돌아오는 15~18km의 4개 순환코스는 이름도 예쁜 평화로운 목장코스, 향기로운 소나무코스, 싱그러운 옛길코스, 아름다운 구름코스이다. 각자의 체력이나 취향에 따라 코스를 선택하거나 각 코스에서 추천하는 숲길만 걸어도 대관령숲길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대관령소나무숲길은 12개 개별코스 중 하나로 전체거리는 8.6km이지만 어흘리산림관광안내센터에서 대통령쉼터까지 순환코스로 걸으면 6.3km. 넉넉히 잡아도 3시간이면 충분하다. 어흘리마을은 100년 동안 자란 울창한 금강 소나무 숲과 소나무 아래서 자라는 생강나무가 봄마다 노란 꽃을 피우는 마을이다. 어흘리산림관광안내센터 길바닥에는 대관령소나무숲 들머리로 안내하는 초록선이 그려져 있어서 길 찾기도 쉽다.
오늘 걷기 동행은 지난 3월에 시작한 걷기 수업 수강생들이다. 숨쉬기도 어려운 여름 더위를 피해서 기차를 타고 강릉까지 왔다. 누구랄 것도 없이 마음에 가득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조근조근한 이야기가 솔향기와 함께 너풀거린다. 숲으로 들어서니 삼포암폭포가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뿜어낸다. 잠시 쉬어간다. 이 물줄기는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던 강릉 남대천으로 흐르고 안목해변을 지나 동해에서 바닷물과 만난다.
언덕을 올라 솔숲교를 지나니 대통령쉼터까지 심하지 않은 오르막이 계속된다. 아름드리 커다란 금강소나무가 가득한 숲길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쭉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솔향기 가득한 바람은 내 몸의 모든 나쁜 기운을 밀어내고, 풍성한 솔가지가 드리워준 그늘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고, 철갑옷을 두르고 하늘을 향해 쭉쭉 뻗는 소나무 기둥은 요즘처럼 힘든 세상을 잘 받쳐주고 있다. 한여름 무더위는 대관령숲길에도 여지없이 찾아와 후텁지근한 바람은 마주하기 힘들다. 뜨거운 땀방울은 뒷목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한 명도 뒤처지지 않는다.
대통령쉼터 도착.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에 이곳에 방문했던 것을 기념하는 장소이다. 대통령 내외도 소나무 숲을 좋아하셨나보다. 잠시 데크에서 땀을 식히고 모두 함께 전망대에 오른다. 솔향기 가득한 시원한 바람이 우리들을 감싼다. 대관령숲뿐 아니라 강릉시내와 동해안까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내려오면 풍욕대. 대관령소나무숲길의 백미이다. 높이 20m가 넘는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으며 내뿜는 피톤치드를 두 팔 벌려 온 몸으로 맞이한다.
도둑재로 향한다. 경사도가 무척 급하지만 오르막이 아니라 내리막이어서 모두 발걸음이 가볍다. 그러나 이런 급한 내리막에서 부상위험이 커진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디디며 솔숲교에 도착. 이제부터는 익숙한 길이라 발걸음이 빨라진다. 솔숲교를 건너고 삼포암폭포 가장자리에서 배낭을 푼다. 등산화도 벗고 양말도 벗고 하루 종일 뜨겁게 달아오른 발에 휴식을 선물한다. 계곡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잠시 쉬는 시간은 천국이 따로 없다.
휴식을 끝내고 어흘리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에 모두 신바람이 난다. 산행 후 들기름막국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강릉하면 장칼국수이지만 오늘은 들기름막국수이다. 고소한 들기름막국수와 메밀전병으로 산행의 화룡점정을 찍는다.
아흔아홉 굽이를 걷다, 옛길코스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대관령숲안내센터에서 옛길코스 들머리를 문의하려 했는데 월요일이 휴관일임을 깜박 잊었다. 일단 대관령숲길안내도를 참고로 출발.
대관령숲안내센터 뒤편의 유아숲이 참으로 멋지다. 아이들이 소나무 숲에서 황토흙을 밟으며 자유롭게 뛰어노는 모습은 보는 이도 행복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평화로운 자연의 품에서 자란 아이들의 품성은 얼마나 부드러울까? 유아숲 옆 등로에는 여러 가지 꽃들이 각자의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색깔도 모습도 모두 다르다. 어떤 꽃이 더 예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다음 행선지는 물푸레군락지. 그러나 우리는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다행히 길에 계시는 분의 도움을 받아서 가던 방향은 바로 잡았지만 물푸레군락지는 만나지 못하고 제왕산 임도길로 들어선다. 잠깐 임도길을 걷고 나니 제왕산 등산로. 많은 사람들이 방문을 하지 않아서인지 길에서 사람들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거미줄도 많고 등로는 너무나 한적하다.
제왕산 1.3km. 누가 어떻게 측정해 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3km라고 하기엔 조금 너무했다. 오르막내리막을 반복하다가 대관령 설명이 있는 팻말이 나왔다. 이곳이 옛날 선조들이 아흔아홉 굽이를 걸어서 영동지역으로 가던 관문인 대관령이구나. 그래서인지 바위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설악산에서나 봄직한 바위들이다. 암반 위에 올라서니 산의 위용이 느껴진다. 제왕산 정상 가까이 오르니 조망이 시원하게 터진다. 강릉시내를 넘어서 동해안까지 펼쳐진 풍경이 너무나 시원하다. 오늘은 시야가 선명하지 못해 조금 아쉽다.
제왕산 정상은 고려 말 제32대왕 우왕이 피란 와서 산성을 쌓아 근거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주변에서 기왓장과 성곽 돌무지와 노거송 여러 그루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제왕산 높이는 841m. 성산면 어흘리와 왕산면 사이에 있다. 상제민원 계곡은 사시사철 참나무 숲과 소나무가 우거져 산림욕하기에 좋고, 겨울철에는 아름다운 눈꽃을 볼 수 있다. 제왕산은 영동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선자령과 마주보고 있고 두 개의 정상석이 있다. 첫 정상석은 너무 녹슬었지만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고, 두 번째 정상석은 새것이다. 아마 새롭게 측량을 해서 두 번째 정상석이 있는 곳이 더 높았나보다. 제왕산의 바람이 무척이나 혹독한지 나뭇가지의 방향이 모두 한쪽으로만 향한다. 이곳 겨울바람을 상상하며 잠시 더위를 잊는다.
제왕산에서 이어진 길은 치유의 숲. 옛길 이정표를 찾지 못했으니 치유의 숲을 넉넉하게 즐기기로 한다. 코스가 참으로 다양하다. 치유의 숲이란 이름에 걸맞게 금강소나무 숲 사이사이에 쉼터들이 참 많다.
옛길을 걸으려 왔지만 어떤 길이든 걸으며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않을까, 또한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이 이번 트레킹의 목적이기도 하다. 치유의 숲 안내도에는 친절하게 길에 번호를 붙여놓았다. 치유마루길로 가기 위해 29번으로 걷는다. 치유의 숲에도 금강소나무가 무척 많다. 하늘을 찌를 듯이 키 큰 소나무들을 바라보니 마음이 넉넉해진다. 숲속쉼터에 도착하니 쉬어갈 수 있도록 데크와 움막이 있다. 너무 더워서 데크에서 쉬기로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움막 안으로 들어설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움막인데도 안에는 바람 한 점 없다.
앗~ 그런데 숲속에 음악이 흐른다. 누굴까? 이러 저리 두리번거리다가 바닥에 놓인 스피커를 찾았다.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바람의 결을 느끼고 간식도 먹고 잠시 쉬는 시간. 음악이 있어서 더 여유 있고 풍요롭다. 힐링하기엔 최고의 공간이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가득한 길을 즐기며 솔향치유숲길을 지나니 치유센터 건물이 빼꼼 고개를 내민다.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발길이 바빠진다.
생각보다 무척 규모가 큰 치유의 숲 치유센터. 찜질부터 명상까지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다음엔 체험프로그램에도 참여해 봐야겠다. 치유의 숲은 번호 따라 걷는 길이 보물찾기하는 것 같다. 금강송 숲길을 지나고 이젠 계곡을 따라 걷는 물치유숲길이다. 이렇게 멋진 계곡이 곁에 있으니 갑자기 마음이 여유로워진다.
치유의 숲길이 끝났다. 날머리를 찾다가 계곡 건너편 계단에서 드디어 대관령옛길 이정표를 찾았다. 옛길코스를 따라가는 대관령 계곡길이 참 시원하다. 더운 날씨에 계곡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을 보며 눈으로 마음으로 만족하고 어흘리로 하산한다. 하산해서야 내가 걸어 온 길의 루트가 제대로 보인다. 옛길을 완보하지는 못했어도 제왕산과 치유의 숲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길이었다. 걷지 못한 옛길코스 덕분에 다시 와야 할 이유도 남긴다.
4개 대표 테마로 즐기는 대관령 국가숲길
국가숲길이란 산행인구 증가에 따라 쾌적하고 안전한 숲길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국가에서 관리하는 숲길로 내포문화숲길, 울진금강소나무숲길, 대관령숲길, 지리산둘레길, 백두대간트레일, DMZ펀치볼둘레길이 있다. 우리나라 첫 국가숲길인 대관령숲길은 강릉과 평창 2개 시·군에 걸친 12개 노선(총 102.96㎞)으로 이루어진다. 모두 순환코스인 4개 테마코스와 12개 개별코스가 있다.
행복, 평화, 희망을 선물하는 목장코스(총 17.15km)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국민의숲트레킹 길 입구→ 샘터→ 선자령 정상→ 전망대→ 국사성황당→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탁 트인 풍광이 특색인 숲길. 끝이 없는 광활한 진초록의 초지를 배경으로 야생화와 풍력발전기의 이색적인 풍광이 펼쳐진다.
정성과 노력으로 일구어낸 명작 소나무코스(총 18.23km)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선자령 정상→ 대관령자연휴양림→ 대관령소나무숲길→ 대관령옛길→ 국사성황당→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100년 이상 된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즐비한 숲길. 1922년부터 직파조림 방식으로 조성된 금강소나무 숲으로 솔향기 가득한 숲길을 만끽하며 걷는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전해져 내려오는 옛길코스(총 15.40km)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국사성황당→ 대관령옛길→ 대관령치유의숲→ 제왕산→ 물푸레군락지→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대관령의 역사가 떠오르는 값진 옛길. 신사임당과 어린 율곡, 송강 정철, 단원 김홍도 등 대관령 아흔아홉 굽이를 걸었던 옛 선인들의 자취와 그들이 남긴 역사를 되새김하는 길이다.
용기와 열정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구름코스(총 18.02km)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능경봉→ 돌탑전망대→ 연리목→ 고루포기산/안반데기→ 자작나무조림지→ 대관령숲길 안내센터
구름도 쉬었다 가는 길. 아무것도 없던 텅 빈 땅에 기적으로 일구어낸 대관령 특수 조림지, 산이 배추밭인 하늘 아래 첫 마을 안반데기, 산자락에 고인 출렁이는 구름 위를 걷는 길이다.
12개 개별코스
① 선자령등산로(8.36km) : 대관령→양떼목장→샘터→선자령
② 백두대간마루금1코스(4.94km) : 대관령→KT송신소→전망대→선자령
③ 백두대간마루금2코스(12.98km) : 대관령→능경봉→닭목재
④ 백두대간마루금3코스(13.69km) : 닭목재→삽당령
⑤ 백두대간트레일(22.38km) : 수하리→횡계3리
⑥ 국민의숲트레킹길(5.95km) : 횡계리 국민의숲
⑦ 대관령소나무숲길(8.60km) : 휴양림→대통령쉼터
⑧ 대관령치유숲길(8.50km) : 대관령치유의숲→오봉산
⑨ 금강소나무둘레길(2.20km) : 반정임도종점→제왕산임도종점
⑩ 초막골등산로(3.50km) : 선자령→초막골
⑪ 대관령옛길(6.46km) : 만나가든→반정→국사성황당
⑫ 제왕산등산로(5.40km) : 대관령→제왕산→상제민원
월간산 2022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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