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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흔적

남대문과 동대문시장 탄생시기

1909. 8. 29.~1910. 8. 29.

"작일 오전 2시20분경 남대문 내 선혜청 내에 있는 김시현씨 소유 신축가옥과 동 시장 창고의 중간에서 발화되어 창고 4동과 김씨의 신축가옥이 모조리 타고 창고 1동이 반소한 후 동 4시30분경에 진화되었는데 인축(人畜)은 사상이 없었고 원인은 목하

조사중이며 손해액은 누만금가량이라더라"(황성신문 1910.5.5.).

합방을 몇 달 앞두고 정세가 어수선하던 때 남대문시장에 큰불이 났다. 한밤중에 난 이 불로 어물가게, 쌀가게가 전소 혹은 반소되어 백미 2500여석과 금화 2만여원이 소진되었고, 순종은 피해 상인들에게 특별구조금 400원을 하사하였다(고종시대사).

십여 년 전인 1897년 정월, 한성부의 도시개조사업에 따라 내무대신 유길준은 남대문통의 각 상인을 선혜청 창고가 있는 자리(지금의 숭례문수입상가 앞)로 몰아넣었다. 길가를 버리고 구석으로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여 상인들이 명령에 복종치 않자 순검을 동원하였다. 최초의 상설시장인 남대문시장은 이렇게 탄생했다.

남대문시장은 선혜청 창고가 있던 자리여서 창내장(倉內場)으로 불렸다. 이 시장은 남대문로 좌우에 늘어선 가가(假家)뿐 아니라 역사가 꽤나 오래된 남대문 안쪽의 조시(朝市·새벽시장)와 남대문 밖 칠패의 난장(亂場)을 포함하면서 서울의 중심 시장으로 부상하였다.

창내장이 생긴 지 8년이 지난 1905년, 일본의 압력에 의해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창내장이 이전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그러자 발 빠른 조선인들이 광교에서 장교(長橋)에 이르는 청계천 중심부를 판자로 덮어 시장을 이설할 계획으로 회사를 설립한다(황성신문 1905년 6월 28일). 7월에 설립된 자본금 12만원(600만냥)의 광장회사의 사장은 예조판서와 궁내부대신 등을 역임하고 이재에도 밝았던 김종한이고 주주는 포목상으로 거부가 된 박승직·홍충현·장두현·최인성·김한규 등이었다.

그러나 물길이 막혀 물이 넘치고 판자는 며칠 못 가 부서질 것이라는 반대가 있고 큰 비로 쌓아놓은 자재가 유실되면서 창내장 이설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자 광장회사는 동대문 근처 배오개 일대에 형성된 시장을 포함하는 광장(廣藏)시장을 설립하였다. 이리하여 또 하나의 상설시장인 동대문시장이 탄생하였다. 배오개 시장은 남대문 밖의 칠패와 함께 난장의 대표격이었으며 광장회사 설립의 주역인 박승직은 배오개에서 포목을 도산매하였다.

예로부터 서울 종로에는 허가된 상점인 시전이 즐비하였다. 시전은 왕실에 물자를 상납하는 대신 독점적 영업권을 갖고 있었지만, 개항 이후 외국상인의 침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런 종로상가는 전차가 부설되면서 변모하였다. 1907년 싸전 자리에 2층 양옥이 서고 1908년에는 종로를 대표하는 삼창상회와 한양상회가 설립되며 많은 회사와 조합이 출현하고 한일은행과 대한천일은행 등 서양식 건물이 신축되었다.

대한제국은 종말을 고하고 있었지만, 시전거리에서 근대적 상가로 변모한 종로, 난장에서 상설시장으로 발전한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은 도성의 3대 시장으로서 옛 모습을 탈피하고 시장경제의 발전을 기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