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여행

굽힐 줄 몰랐던 조광조, 그의 개혁은 왜 실패했나

중앙일보

입력 2022.08.05 00:30

‘군립공원 1호’ 순창 강천산

김정탁 노장사상가

전북 순창에 가면 강천산이 있다. 굳셀 강(剛)과 샘 천(泉)이란 이름의 산인데 가서 보면 이름에 걸맞다는 생각을 한다. 굳센 바위 사이로 흘러내리는 물이 장관을 이루어서다. 1981년 국내 첫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인데, 군립공원이라도 사계절 자연을 모두 즐기려는 사람에게는 숨어 있는 보배와 같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면서 단풍나무로 아치를 이룬 숲길을 왕복해서 6㎞를 걷다 보면 아무리 어수선한 마음이라도 이내 편안해진다.

게다가 가을철 붉은 단풍은 전국 최고라 할 만하며, 겨울철 설경도 이에 못지않다. 여름철에는 밤에도 개방해 한여름 밤의 야경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또 단풍나무 숲길 초입에서 마주하는 병풍폭포와 숲길 마지막을 장식하는 구장군폭포도 대단하다. 여기서 떨어지는 물의 양도 적지 않아 폭포를 즐기려는 사람의 마음을 압도한다. 그래서 폭포와 마주하면 더위가 절로 사라진다. 강천산은 규모가 작아서 그렇지 웬만한 도립공원의 아름다움에 빠지지 않는다.

수려한 산속서 결의 맺은 선비 셋
중종반정 실세에 맞서다 유배신세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에 큰 영향
공신들 비판하며 도학정치 추구

4년 만에 물거품이 된 개혁사상
‘나와 다른 생각’ 품지 못한 한계

박상·김정·유옥이 맹세한 삼인대

전북 순창 강천산 초입에 있는 병풍 폭포. 한여름 더위를 시원하게 씻어준다. [사진 순창군청]

필자가 처음 강천산을 찾은 건 산의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그곳 삼인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삼인대는 ‘세(三) 개 직인(印)이 있는 언덕(臺)’이란 뜻인데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1515년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무안현감 유옥(柳沃) 셋이 강천산에 모여서 중종의 전 부인이었던 신씨 복위를 위한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고, 이 결의를 다지기 위해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맹세했다. 그 후 사람들은 이곳을 삼인대로 명명했다.

1515년 박상, 김정, 유옥 셋이 모여 중종의 전 부인 신씨 복위를 위한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한 강천산 삼인대. [사진 순창군청]

신씨는 연산군 처남 신수근의 딸이라 중종반정 직후 반정 주역들에 의해서 강제로 이혼을 당했다. 반정 주역들이 후환이 두려워서 저지른 일인데 유교 국가에선 상상할 수 없는 불충의 행동이다. 중종은 어쩔 수 없이 윤씨와 새로 결혼을 했는데 반정 10년쯤 지나자 장경왕후 윤씨가 후에 인종이 되는 아들을 낳고서 죽었다. 이때 왕이 신하들에게 구언(求言), 즉 바른말을 하도록 요청하자 박상, 김정, 유옥 셋이서 신씨를 복위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의 상소는 반정공신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문제여서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그러니 관직추방은 물론이고, 죽음까지 각오해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의 상소로 조정이 발칵 뒤집혀 졌다. 반정공신들은 이들을 잡아다 처형하려고 했고,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臺諫)조차 왕에게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다행히 좌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호소로 이들은 목숨을 간신히 건졌으나 유배는 피할 수 없었다.

조광조의 손을 들어준 중종

강천산 숲길 끝에서 만나는 구장군폭포. [사진 순창군청]

이들이 유배 간 직후 문과 급제자가 발표되었는데 그중에 조광조가 있었다. 3개월 후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자 조광조는 대간이 언로를 넓혀야 하는 데도 신씨 복위 상소 건에서 오히려 언로를 막았으므로 함께 일할 수 없다면서 대간 전원의 교체를 요구했다. 수면 아래 있었던 사안을 공론의 장으로 다시 끄집어낸 건데 중종은 조광조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에 대사헌과 대사간은 물론이고, 대간 전원이 교체되었다. 이는 신임 검사가 임명되자마자 검찰총장을 비롯해 선배 검사들을 모두 몰아낸 일이다.

조광조의 이런 날 선 주장이 중종에 의해 받아들여진 건 변화된 정국 탓이다. 중종이 재위한 지 8년쯤 되었을 때 반정 삼인방이었던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차례로 죽었다. 또 반정 때 핵심무장으로 활약했던 신윤무와 박영문도 반역으로 몰려 사사되었다.

중종은 이들에 의해 주눅이 들어서 그동안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다. 그런데 반정 핵심들이 조정에서 사라지자 자신의 정치를 펼친 기회를 비로소 지녔다. 이를 위해 자기 사람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는데 도학정치를 표방하며 조정에 막 진출한 조광조가 중종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조광조는 젊은 신진사류들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힘은 조정을 압도했다. 비록 젊은 하급관료였어도 언관직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한 결과이다. 이럼으로써 공론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대간의 발언권은 한층 강화되어 삼정승은 물론이고, 육조의 판서들까지 이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왕의 든든한 후원에 더해 이들이 표방한 도학정치의 명분이 이런 분위기를 자연스레 형성했다. 그러니 강천산에서 이루어진 박상, 김정, 유옥 세 사람의 결의가 뜻하지 않았어도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의 등장을 가능토록 한 셈이다.

소격서 폐지 문제로 왕과 충돌

삼청파출소(옛 소격 파출소) 인근. 이 뒤편에 소격서가 있었다. [사진 김정탁]

그러나 조광조의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몰락은 소격서 폐지라는 그리 중요치 않은 사안으로 찾아왔다. 소격서는 도교 양식의 제사를 담당하는 관청으로 서울 종로구 삼청파출소 뒤 편에 있었다.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은 도교는 세상을 속이고 더럽히는 이단의 도이므로 소격서 폐지를 강력히 요구했다. 나아가 하늘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할 수 있는데 제후격인 조선 왕이 행하는 건 예에 어긋나므로 소격서는 없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중종은 건국 이래 계속해 이어져 내려온 제도이므로 함부로 없앨 수 없다면서 조광조의 청을 거부했다.

조선시대 소격서터 표석. [사진 서울역사편찬원]

그런데도 소격서 혁파를 끈질기게 요구하자 중종은 뜻을 굽혀서 조광조 집단의 의견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이때 중종의 신임을 크게 잃었다. 또 조정에도 적을 많이 만들었다. 반정공신이 많고 공신호가 남발됐다면서 공신 책봉의 부조리를 낱낱이 지적해서다. 중종이 이들의 주장에 밀려 공신록에서 공신 명단 일부를 삭제하자 공신들도 이들에게 반감을 갖게 되었다. 이들의 처신에도 문제가 있었다. 자신들이 비루하다고 여기는 재상을 만나면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지나쳤다. 그러니 조광조 집단은 자신들의 생각만 옳다고 여겨 일을 과감하게 추진했으나 과격했다.

조광조

조광조는 결국 낙마해 사약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38세로 정치개혁의 길에 들어선 지 불과 4년 만의 일이다. 조광조를 충실히 따랐던 김정, 김식(金湜), 기준(奇遵)도 삶을 불행하게 마쳤다. 김정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교형(絞刑·교수형)에 처해 졌다. 그때 나이 36세였다. 김식은 선산으로 유배되었는데 영광의 의적부대에 합류해서 군사를 일으켜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도망치다 거창에서 목을 매 숨졌다. 그때 나이 40세였다. 가장 젊었던 기준은 학문적 명성에선 조광조에 버금간다는 평을 얻었지만, 유배지에서 교형으로 죽었다. 그때 나이 30세였다.

화리(和理)와 합리(合理), 뭐가 다른가

강천산이라는 수려한 경관에서 이루어진 선비들의 참된 결의가 어째서 이런 비극으로 끝났을까. 필자가 『장자』에서 소중히 여기는 말이 있다. 화리(和理)이다. 화리는 적당함과 알맞음이란 의미인데 중용의 도와 통한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 합리(合理)를 들 수 있다. 합리는 이치에 합당하면 옳지만, 이치에 합당하지 않으면 그르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합리를 좇으면 시비, 즉 옳고 그름을 가리는 길로 저절로 나아가게 된다. 반면 화리를 좇으면 옳고 그름의 문제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적당함과 알맞음은 옳고 그름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어서다.

박상, 김정, 유옥의 상소는 합리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옳다. 그래서 이들의 행동은 이것만으로 찬양받기 충분하다. 이에 반해 조광조와 신진사류들이 추구했던 생각은 합리의 관점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생각이 아무리 옳아도 옳은 바를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할 때 비로소 찬양받을 수 있어서다. 그러니 자신들 생각과 달라도 다른 생각을 수용하거나 포용했어야 했다. 이것이 화리가 추구하는 정신인데 전체와의 조화를 늘 염두에 두어서다. 따라서 소통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런 자세는 원숙한 경지에 이를 때 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신진사류들이 원숙하게 되기에는 너무 젊었던 걸까. 그래서 근본주의적 사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까. 여기에 이들의 비극은 물론이고, 그 후 명분 싸움으로 얼룩진 당쟁이라는 조선 선비사회의 비극도 함께 싹텄다고 본다.

김정탁 노장사상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