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청와대 옛 관저 뒷산 ‘천하제일복지’ 암각의 비밀
* 유튜브 https://youtu.be/q-9sdYC5Ujs 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위에 새겨진 ‘천하제일복지’ 여섯 자
개방된 지 두 달 지난 청와대 옛 대통령 관저 뒷산 절벽에는 큼직한 글자 여섯 개가 새겨져 있다.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끝에는 ‘延陵吳据(연릉오거)’라고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인다. 과연 무엇인가. 1990년 청와대 신축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이 글자는 세간에서 떠돌던 소문 하나를 입증해줬다. ‘청와대 자리는 예로부터 명당이다.’
청와대 개방 후 이 글자가 만천하에 공개되자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여러 이야기가 쏟아졌다. ‘청와대 터가 예로부터 명당이라는 것은 이곳에서 발견된 ‘천하제일복지’라는 문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와서 보니 청와대 일대는 길지라고 보는 것이 맞는다.’(2022년 5월 31일 ‘매일경제’) ‘병자호란 이후 청국 체류의 경험이 있는 소현세자나 봉림대군이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2022년 5월 6일 ‘한국일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최고 명당이란 의미다. 고려 때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표석은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90년 청와대 관저 신축공사 중 발견됐다.’(2022년 4월 13일 ‘중앙일보’)
결론부터. 이 여섯 글자를 새긴 시기는 구한말 19세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궁궐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던 즈음에 누군가가 새긴 글자다. 이미 1990년 글자가 발견될 당시 결론이 난 사안이다. 그런데 호사가들은 “한양이 풍수에 따라 수도로 결정됐고 경복궁이 그 중심”이라는 풍수설 근거로 다시 이를 들먹인다. 사실과, 사실에 근거한 합리적인 추정을 통해 알아본다.
홀연히 발견된 ‘풍수’의 증거
1990년 2월 대한민국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청와대에서 표석 발견’ 기사를 쏟아냈다. 화강암 암벽을 깎아 가로 2m50㎝, 세로 1m20㎝ 규모로 해서체로 ‘천하제일복지’라고 새겨진 표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사는 대개 ‘청와대 본관 동북쪽 가파른 암벽에 있는 탓에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라고 끝났다. 특히 글씨 주인인 듯한 ‘延陵吳据(연릉오거)’라는 인물은 ‘풍수지리에 밝은 역학가일 가능성도 있다’는 보도도 나왔다.(1990년 2월 23일 ‘경향신문’)
표석이 발견된 암벽 아래쪽은 식민시대 총독 관사가 있던 자리다. 1939년 당시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가 남산에 있던 관사를 이곳으로 옮기고 6년 뒤 해방이 됐고 이후 이 관사는 대한민국 대통령 집무실로 쓰였다. 원래 관사 자리는 조선시대 경무대(景武臺) 자리였다. 과거 시험과 무술 경연이 벌어지던 너른 터였다. 그래서 해방 후 대통령 집무실은 경무대로 불렸다. 뿌리가 총독 관사에다 ‘4·19로 퇴각한 자유당 정권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민주당 정권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개칭했다. 그리고 1990년 6공화국 노태우 정부 때 일제 잔재 청산 명분으로 청와대를 신축하고 3년 뒤 옛 청와대를 훼철했다. 철거한 자리에는 1983년 신축한 청와대 남쪽 현관 지붕 꼭대기 절병통을 남겨 위치를 표시해뒀다.
그런데 그 뒷산에서 이 자리가 명당임을 알리는 글자가 튀어나온 것이다. 청와대 사람들은 “새 청와대를 밝히는 길조(吉兆)”라고 했고(위 같은 신문) 훗날 사람들은 “원래 표석 자리가 명당인데 총독 관사를 지을 때 차출된 지관들이 일부러 비켜난 곳을 잡아 총독들을 망하게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1997년 12월 11일 ‘동아일보’)
150년밖에 안 된 새 글자
명당과 길지에 대한 호기심과 흥분이 가라앉은 1990년 10월, 처음 이 글자를 감정했던 금석학 대가 임창순(1914~1999)이 8개월 동안 연구 결과를 내놨다. 내용은 이러했다.
첫째, 이 여섯 글자는 12세기 남송 시대 명필 연릉 오거의 필체다.
둘째, 글자를 새긴 연대는 빨라야 구한말인 1850년대 전후다.
임창순에 따르면 연릉 오거는 남송시대 서예가다. 중국 강소성 진강(鎭江)변 북고산(北固山) 관광지에 있는 감로사(甘露寺)라는 절에 오거가 쓴 ‘天下第一江山’ 여섯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다. 6세기 북고산에 놀러온 양무제가 ‘천하제일이로다’라고 새겨넣은 친필이 파손되고 이후 오거가 이를 다시 새겼다는 전설이 붙은 글씨다. 임창순은 “오거의 글씨를 탁본으로 구해와 ‘福地’라는 글자를 집자(集字)해 새겼다”고 했다(1990년 10월 29일 ‘서울신문’).
그리고 임창순이 추정한 각자 연대는 1850년대다. 그가 이리 말했다. “화강암에 음각한 획의 풍화 정도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매우 낮다. 화강암의 석질이 본래 비바람에 약한 점을 고려할 때 각자 연대는 빨라야 1850년 전후다.”
“경복궁은 풍수로 계획된 도시 한양의 중심”이라는 주장에 결정적인 물증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한양 천도 당시인 14세기는커녕 전쟁 때 홀딱 타버린 경복궁이 근 300년째 폐허로 남아 있던 19세기 작품이었으니까.
2022년 청와대 안내문
1993년 당시 청와대가 세워놓은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삼각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을 거쳐 경복궁 쪽으로 길게 뻗어내린 이곳은 일찍이 명당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 1104년 왕실의 이궁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이 가운데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는 1939년 7월 총독관사를 건립하여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 내 조선총독부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이 안내판은 바로 옛 청와대 현관 지붕 위 절병통이 놓여 있는 잔디밭 옆에 서 있다. 신축공사 당시 우연히 발견된 ‘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가 만든 결과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로 알려졌던’이라는 표현은 수정돼야 마땅하다. 누가 봐도 확연한 근대 암각을 내세워 엉뚱한 방향으로 대한민국 시민을 오도하는 설명이다. 그런데 -.
또 다른 ‘신의 선물’
천하제일복지 여섯 글자가 북악산 절벽에 새겨지던 무렵, 조선 왕실에 또 다른 경사가 났다. 1865년 음력 5월 4일이었다. 이날 어전회의에서 열세 살 먹은 왕 고종이 내시를 시켜 구리 그릇 하나를 가져와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창의문 근처에 있는 정자 석경루(石瓊樓) 땅속에서 발굴한 그릇이라고 했다. 발굴한 사람은 박경회라는 사내였다.
그릇에는 덮개가 있었고 덮개 속에는 소라처럼 생긴 술잔, 나작(螺酌)이 들어 있었다. 뚜껑 안쪽에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 ‘壽進寶酌 華山道士袖中寶 獻壽東方國太公 靑牛十廻白巳節 開封人是玉泉翁(수진보작 화산도사수중보 헌수동방국태공 청우십회백사절 개봉인시옥천옹: 화산도사 소매 속에 있던 보물로 동방의 국태공에게 바치니 을축년 4월 이를 열 사람은 옥천옹이니라)
신하들은 “을축년 4월에 이 귀한 그릇을 누군가가 열어보게 된다는 뜻”이라고 했다. 바로 ‘동방국태공’이 을축년 4월에 국가의 큰일을 하게 되리라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동방 국태공이 누구인가. 흥선대원군이다. 그러니까 하필 ‘을축년’ 1865년 4월 대원군이 조대비를 통해 경복궁을 중건하겠다고 선언하고 딱 한 달 이틀이 지난 뒤 이 어마어마한 예언이 담긴 구리 그릇이 발견된 것이다.(1865년 4월 2일, 5월 4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 회의에 불참했던 문신 송근수는 훗날 ‘이를 보고도 신고하지 않은 자는 동방의 역적(看此不告 東國逆賊·간차불고 동국역적)’이라고까지 했다.(송근수, ‘용호한록’3, 853. 수진보작도, 국사편찬위)
고종이 말했다. “이 그릇을 보기만 해도 기쁜 마음이 그지없다. 효성을 바쳐야 하는 도리로 볼 때 이 기쁨을 기록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으니 모두 글을 지어 바치도록 하라.”(1865년 5월 4일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투입될 토목공사에 대한 반대 여론은 이것으로 봄날 눈처럼 사라졌다.
고종은 이 그릇을 발견한 박경회라는 사내를 수소문해 그날로 중앙군 지휘관인 오위장(五衛將)으로 특채했다. 그리고 그릇 발굴 과정을 적은 글을 이날 회의 참석자들에게 낱낱이 기록해 책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제작된 ‘수진보작기’는 고위 관료와 종친에게 배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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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기반이 없는 상황에서 권력을 차지한 대원군과 고종이었다. 권력을 확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는 정당성 확보였고, 이를 위해 풍수와 도참과 조작을 동원한 것이다. 식민시대 언론인 차상찬(1887~1946·필명 청오생)은 이렇게 썼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천하를 압도하던 영웅도 인심을 수습하는 데 얼마나 고심했을까 가히 추측할 수 있다.’(1927년 1월 1일 ‘별건곤’ 3호) 권력의 맛이 더욱 달콤한 지금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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