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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하는 삶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아내가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아내가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다 늙어 복싱에 빠진 아내, ‘드루와 드루와’ 하며 잽을 날리기 시작했다
질 것 같은 상대 이기고, 이길 것 같은 상대에게 지는 게 복싱의 매력
불가능이란 나약한 자들의 핑계? 기초 체력이 받쳐줘야 훅도 날리는 법

입력 2022.03.15 03:00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빨간 장갑이었다. 깡마른 여자애가 빨간 권투 장갑을 끼고 저보다 덩치가 두 배나 큰 남자를 링 위에 메다꽂는 영상을 보고 중딩 딸아이 동공에 지진이 난 것이다. 아빠 봤지? 개멋있지? 그날로 집 반경 5킬로미터에 위치한 체육관을 수색하던 아이는 황금복싱인지 골든복싱인지 하는 이름의 권투 교실을 찾아냈고, 수학 학원은 빼먹을지언정 복싱 교실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아내는, 이 흉흉한 세상 호신술이라도 배워두면 좋지 않겠나 맞장구친 남편을 잡아 잡수실 기세였다. 다른 애들은 고3 수학을 선행한다고 눈이 벌건데, 중3은커녕 중1 수학도 반타작하는 애한테 복싱이 웬 말이냐며 도끼눈을 이글거렸다. 답사차 복싱 학원에 다녀와서는 기함을 했다. 우락부락한 사내 녀석들이 한쪽에선 줄넘기, 한쪽에선 샌드백을 쳐대느라 땀내가 진동하는데 거기 딱 10초만 서 있어도 코로나에 감염되고 말 거라며 왈왈댔다. “당신 닮아 납작한 코가 더 내려앉으면 어쩔 거냐고~, 턱이라도 돌아가면 어쩌냐고오~.”

/일러스트=이철원

아내의 태도가 달라진 건,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놈들’을 감시하겠다며 거의 매일 강력계 형사처럼 체육관을 드나들더니, 어느 날 콩나물을 다듬다 말고 “나도 복싱이나 배워볼까?” 하는 것이다. “그 우람한 풍채로? 차라리 레슬링이 어때?”라는 말이 혀끝에 닿았으나 꿀꺽 삼켰다. “요가라면 모를까, 복싱이라니. 이영애 닮은 얼굴에 멍이라도 들면 어쩌려구.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그러자 허공을 향해 슉슉 잽을 날리던 아내가 중얼거렸다. “남편 자식 건사하느라 내 몸 위해 돈 내고 시간 낸 적 없어. 빨래하고 청소하면 그게 운동이지 했는데 늘어지는 건 팔뚝 살이요, 올라가는 건 혈압뿐. 나이 드니 주위에 응징하고픈 인간들은 왜 이리 많은지. 이제라도 조물주가 선물한 내 몸, 원시미 넘치게 가꿔볼까 해. 혹시 알아? 식스 팩이라도 생길지.” 저도 모르게 배우자의 출렁이는 뱃살로 시선이 옮겨간 남편을 향해 아내가 엄중히 읊조렸다. “무하마드 알리가 그랬지.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라고. 나약한 자들의 핑계일 뿐이라고.”

복싱이 내 운명이라던 딸애는 어퍼컷은 안 가르쳐주고 만날 줄넘기만 시킨다며 한 달도 안 돼 체육관을 때려치웠다. 빨간 장갑을 차지한 아내는 체육관은 아직 위험하니 온라인 복싱 교실부터 섭렵하겠노라 큰소리를 쳤다.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저녁 밥상 치우기가 무섭게 그날 배운 기술을 선보인다며 TV를 가로막으니 그 또한 곤욕이었다.

 

“복싱은 두 팔이 아니라 두 발로 하는 거야. 펀치를 날리려면 두 발이 먼저 치고 빠지기를 자유자재로 하면서 기회를 노려야 하는 거거든. ‘드루와, 드루와’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구. 잘 때리는 것만큼 잘 피하는 것도 중요하지. 주고, 빠지고, 돌고~ 요렇게, 마이크 타이슨처럼! 복싱의 꽃이 왜 원투인지 알아? 번개처럼 빠르고 핵처럼 강력한 원투가 상대의 턱, 인중, 명치에 적중하면 그대로 KO 시킬 수 있기 때문이야.”

복싱은 헝그리, 헝그리 하면 자장면이지 하며 탕수육을 시켜 먹던 아내는 이런 말도 했다. “파나마 카라스키야 선수의 별명이 지옥에서 온 악마였대. 그의 강펀치에 맞아 4번이나 쓰러지고도 홍수환은 다시 일어섰지. 이번이 마지막이란 각오로 원투 스트레이트를 날렸고, 휘청대는 상대를 쫓아가 레프트 훅, 레프트 어퍼컷으로 강타해 기어이 넉아웃 시킨 거야. 홍수환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복싱이 재미있는 건, 질 것 같은 상대에게 이기고 이길 것 같은 상대에겐 처참히 무너져서라고. 인생이랑 참 비슷하지 뭐야.”

갈수록 사나워지는 어부인에 맞서 격투기라도 배워야 하나 고민하는데, 아내가 며칠째 복싱 수업을 건너뛰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에 포탄이 떨어진 날부터였다. 복면을 쓴 채 무장한 여전사들이 TV에 나왔을 땐 주먹을 또 한번 움켜쥐었다. “권투가 아니라 사격을 배워야겠어. 한 방에 응징하려면 역시 총이 필요해.”

참다 못한 남편이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아붙였다. “왜, 푸틴 쏘러 가게? 복싱을 입으로 하냐? 총을 눈으로 쏴? 3층 계단도 근근이 오르는 그 저질 체력 땜에 북방한계선이 뻥뻥 뚫리는 거 아냐. 복싱장에서 왜 한 달 내내 줄넘기만 시키겠냐. 팔굽혀펴기를 왜 하겠냐구. 혹독한 연습, 연습이 근육 밑바닥부터 쌓이고 쌓여야 위기 때 훅이든, 어퍼컷이든 날릴 수 있는 거지. 식스팩? 지금 손에 든 그 도나쓰부터 KO 시켜봐, 이 아줌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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