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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KGB에 추적 당했던 기자, 캐나다 2인자 돼 러 제재 선봉섰다

KGB에 추적 당했던 기자, 캐나다 2인자 돼 러 제재 선봉섰다

캐나다, 러시아 석유 금수 세계 첫 단행
제재 주도하는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부총리
스탈린의 우크라이나인 3만명 학살 첫 보도한 기자 출신

입력 2022.03.07 21:49
 
캐나다 내각의 2인자인 크리스티아 프리랜드 부총리 겸 재무장관이 3일(현지시각) 쥐스탱 트뤼도 총리가 뒤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운 러시아 제재를 발표하고 있다. 서방국 중에서도 가장 강도높고 이례적인 제재를 연일 발표하고 있는 프리랜드는 우크라이나계 이민 2세로, 과거 푸틴이 몸담은 KGB가 코드명까지 붙여 추적했던 기자 출신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해 서방국가의 제재가 이어지는 가운데 캐나다가 유독 강도 높고 독특한 제재를 이끌어 주목받고 있다. 이를 주도하는 이는 캐나다 정권 2인자인 부총리로, 우크라이나계다. 그는 구(舊)소련의 치부를 파헤쳐 비밀경찰(KGB)의 추적까지 받은 기자 출신이다.

지난 6일(현지 시각) 미국과 유럽 등 각국은 러시아에 대한 석유 수입 금지 제재를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럽의 러시아 에너지 의존과 각국의 인플레이션 우려 때문에 손대지 못했던 제재다. 지난달 28일 캐나다가 세계 최초로 이 조치를 단행하면서 동참하자는 분위기가 확산한 것이다. 캐나다는 러시아 시가총액 1·2위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과 로스네프트 고위 인사 10명도 제재 명단에 올렸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이날부터 영국과 독일, 폴란드 순방에 돌입,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동맹 협력 강화에 나섰다.

트뤼도 내각은 지난 3일 러시아를 국제형사경찰기구(ICPO·인터폴)에서 퇴출하는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서방에선 러시아가 해외로 도피한 정적(政敵)이나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는 수단으로 인터폴을 악용해왔다고 오랫동안 우려했지만, ‘인터폴 퇴출’ 카드를 가장 먼저 꺼내든 건 캐나다다. 캐나다는 또 우크라이나 피란민에겐 최대 2년의 임시 거주 자격을 부여하는 ‘긴급 여행 허가’를 무제한 허가했다. 지난 1월엔 서방국 중 가장 먼저 우크라이나에 특수부대를 파견하고 무기를 지원했다.

지난 6일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시민들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반전 집회를 벌이고 있다. 캐나다는 우크라이나계 교민이 136만여명으로 러시아 다음으로 많이 모여 사는 나라다. /AP 연합뉴스

러시아의 직접 위협을 받지 않는 캐나다가 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일까. 캐나다는 우크라이나계 주민이 136만명에 달한다. 러시아(190만명)에 이어 우크라이나 교민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국가다. 나라를 세우지 못한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19세기 말부터 각종 분쟁과 1·2차 세계대전을 피해 캐나다로 넘어와 서부 지역에 많이 정착했다고 한다.

특히 러시아산 석유 금수(禁輸) 조치 등을 내린 크리스티아 프릴랜드(54)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모계(母系)가 우크라이나다. 프릴랜드는 남편이 영국인이지만, 세 자녀와 우크라이나어로 대화한다고 캐나다 일간 글로브 앤드 메일은 전했다.

 

프릴랜드는 미국 하버드대 사학과 재학 중이던 1989년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프리랜서 기자로 일하면서 스탈린 치하의 우크라이나인 처형과 아사(餓死)의 비극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인물이다. 그는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키예프) 북동쪽 소나무숲 ‘비키브니아 공동묘지’에 암매장된 우크라이나인 3만명이 소련의 주장대로 독일 나치에 학살된 게 아니라, 스탈린에 의해 처형됐다는 사실을 취재해 뉴욕타임스에 처음 보도했다. 소련은 우크라이나의 반(反)소련 인사 등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뒤 이 숲에 매장했으며, 1970년대 이곳을 콘크리트로 덮어 대형 버스 터미널을 지으려고 했다.

우크라이나의 비키브니아 공동묘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스탈린이 우크라이나인 수십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갈 당시 3만명을 처형해 묻은 곳으로, 소련은 이 무덤을 '나치의 만행'으로 선전해왔지만 소련 패망 직후 자신들의 짓이었음을 실토했다. 이 사실을 1989년 뉴욕타임스 보도로 세계에 처음 알린 사람이 바로 현 캐나다의 크리스티아 프리랜드 부총리다. /페이스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당시 고위 간부로 있던 KGB는 비키브니아를 취재하던 프릴랜드에게 ‘프리다’라는 코드명을 붙여 추적하고 취재물을 압수하려 했다. 하지만 프릴랜드는 캐나다 외교 행낭에 사진과 기사를 넣어 보낸 뒤 피신했다. 소련은 패망 직후에야 ‘비키브니아의 진실’을 인정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1990년대에 발굴된 우크라이나 내 집단 매장지가 210곳에 달했다. 희생자 숫자는 수십만명에 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명성으로 프릴랜드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모스크바 지국장, 로이터통신 부국장이 됐다. 러시아 개혁 개방의 과정을 다룬 책, 러시아 지배층의 자산 축적 방식을 파헤친 책을 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프릴랜드는 트뤼도 총리가 2015년 집권한 뒤 국제무역 장관, 외교장관, 부총리 등으로 발탁됐다. 그는 ‘트뤼도의 오른팔’이라고 불린다.

프릴랜드는 지난 3일 대러 경제제재를 발표하면서 “우리는 일주일 전만 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단을 활용하고 있다”며 “푸틴과 올리가르히(정권과 유착된 신흥 재벌)는 우리가 (제재를) 계속할 것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