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들 이야기

‘범 내려온다’ 19세기 말 한양 밤길엔 표범이 다녔다

‘범 내려온다’ 19세기 말 한양 밤길엔 표범이 다녔다

등록 :2021-11-16 15:37수정 :2021-11-16 15:55

조홍섭 기자 사진

1870∼1900년 한양 사대문 안 12건 목격 기록
유기견·돼지 등 잡아먹어…뭄바이·나이로비는 현재도 공존
한국표범(아무르표범)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멸종위기에 놓인 대형 포식자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도 대도시 한양에서 사람과 공존했다. CGWP.co.uk, 런던동물원협회(ZSL) 제공
 
현재의 자카르타 비슷한 높은 인구밀도였던 19세기 말 서울(한양) 사대문 안에 최상위 포식자인 표범이 출몰했다는 서구인의 기록이 여럿 확인됐다.조슈아 파월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박사과정생 등 국제연구진은 과학저널 ‘보전과학 최전선’ 최근호에 실린 논문에서 “조선 말인 1870∼1900년 사이 조선을 여행하거나 거주했던 서구인의 책, 현장 노트, 편지, 일기 등을 분석한 결과 도성 안에서 표범을 직·간접으로 목격했다는 기록 12건을 찾았다”고 밝혔다.1880년대 한양에 머물던 영국의 작가이자 인류학자인 아널드 새비지 랜도어는 1895년 발간한 책 ‘코리아 혹은 조선, 아침 고요의 땅’에 한양에서 어느날 밤 일어난 범 소동을 적었다. 주민들은 버려진 궁궐의 배수구에 범이 숨어있다며 영국인 사냥꾼 알프레드 버트에게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버트는 밤새 궁에서 잠복한 끝에 조선인 하인이 몰아낸 큰 표범을 쏘아 넘어뜨렸다.
19세기 말 한양 지도. 표범 목격지점(붉은색)은 사대문 성곽 안이다. 조슈아 파월 외 (2012) ‘보전과학 최전선’ 제공.
경희궁과 덕수궁 사이에 자리 잡은 러시아공사관에는 겨울이면 표범이 수시로 출몰한 것으로 나온다. 독일인 통역사 앙투아네트 손탁은 표범을 직접 목격하고 추적해 경희궁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명성황후의 주치의가 된 언더우드는 ‘견문록’에 “한양에 온 몇 달 뒤 집 옆 러시아공사관에 표범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연구자들은 12건의 기록 가운데 5건이 저자가 직접 살아있는 표범을 목격하거나 죽은 것을 보고한 것으로 신빙성이 높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2건은 왕의 명령을 기록한 ‘승정원일기’로 고종 8년(1871년 11월 27일) “창덕궁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것과 고종 30년(1893년 12월 12일)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나타나 포수 40명을 투입했다”는 내용이다.그러나 연구자들은 “당시 궁에 출현한 동물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당시 조선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구분하지 않고 뭉뚱그려 범으로 불렀던 데다 융통성이 큰 표범만이 대도시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울 중구 정동 손탁호텔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1902년의 주거지 모습. 조슈아 파월 외 (2012) ‘보전과학 최전선’ 제공.
 
연구자들은 “20세기 초 한양에는 25만∼30만 명이 16.7㎢에 몰려 살아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만큼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밝혔다. 연구에 참여한 새러 듀란트 런던동물원협회 동물연구소장은 “표범은 도시에서 생존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응력이 뛰어난 동물”이라며 “사람들이 공간을 함께 나누려는 일정한 정도의 아량만 있다면 적은 수일지라도 살아남는다”고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보도자료에서 말했다.실제로 표범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대도시에는 인도 뭄바이를 비롯해 케냐 나이로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등이 있다(▶뭄바이의 어떤 공존, 표범과 대도시 주민이 함께 사는 법). 듀란트 소장은 “도시에 표범이 살아가려면 충분한 먹이와 낮 동안 은신할 울창한 숲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그렇다면 당시 한양에는 어떻게 표범이 살 수 있었을까. 연구자들은 뭄바이처럼 유기견과 길에 풀어놓아 기른 돼지 그리고 경복궁에서 기르던 사슴 등이 먹이가 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창덕궁 후원과 함춘원 등지에 호랑이와 표범이 출입하는데 여염의 개를 물어가는 일이 많다”는 등 표범이 개를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또 당시 정치적 여건에서 쇠락한 채 방치된 궁궐과 여기에 연결된 녹지가 표범의 은신처 노릇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형순 중부대 교수는 2018년 ‘한국전통조경학회지’에 실린 논문에서 “조선 시대 궁궐과 도성 주변의 산림정책이 범과 표범의 출몰을 촉진했을 수 있다”며 “벌목을 금지한 봉산 정책과 산과 산이 이어진 지형에 숲이 우거지게 해 이것이 범의 은신처이자 이동통로 구실을 했다”고 밝혔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들어있는 경조오부도. 사대문 안 도성이 어떻게 주변 녹지와 연결돼 있는지 잘 보여준다.
대형 포식자인 표범은 활동 범위가 넓다. 서울 외곽의 녹지에 은신하다 밤에 도성 주변의 성곽을 따라 은밀하게 도심으로 접근했을 것으로 연구자들은 보았다. 특히 “겨울에 표범이 자주 나타난 것은 (유기견 등) 쉬운 먹이를 찾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연구자들은 밝혔다.이밖에 범을 두려워해 주민들이 밤거리 다니기를 꺼리는 등의 사회·문화적 요인도 표범과의 공존에 기여했다. 도심의 좁고 어두우며 구불구불한 골목길은 표범이 은밀하게 돌아다니기에 적당했다.그러나 이런 공존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연구자들은 “서울의 표범 역사는 대규모 포식동물 보존에 교훈을 주는 이야기”라고 밝혔다. 정치적 사회적 격변과 총기 도입, 일제에 의한 대대적 ‘해로운 동물 제거’로 서울 근교의 표범은 20세기 초에 절멸했다.
1963년 경남 합천 가야산에서 주민이 잡은 표범. 1960∼1970년대까지 지리산 등 산간 오지에 잔존하다 절멸했다.
이항 서울대 수의대 교수는 “이 연구는 19세기 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14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서 500년 동안 서울(한양)에서는 간헐적으로 사람과 대형 포식자 사이의 공존 기록이 있다”며 “특정한 조건이 충족된다면 포식자와 도시민은 아주 가깝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다.인용 논문: Frontiers in Conservation Science, DOI: 10.3389/fcosc.2021.765911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animalpeople/human_animal/1019516.html?_fr=mt2#csidx78b666af90655cb97212011cb7de07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