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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평론

[박제균 칼럼]한 번도 경험 못한 대선,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나라

[박제균 칼럼]한 번도 경험 못한 대선,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나라

박제균 논설주간 입력 2021-10-18 03:00수정 2021-10-18 11:14

 

이재명, 과거보다 대응방식 더 문제
‘퇴임 후 안전’ 문 정권과 共生관계
野, 이대로면 ‘文의 나라’ 시즌2
40 대 40 대결… 중도 20 잡아야

박제균 논설주간

누군가 내게 물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시대정신은 뭡니까?” 시대정신? 아, 그런 게 있었지…. 대한민국 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전이 치러지고 있지만, 시대정신은커녕 시대착오적 막장 드라마만 펼쳐지고 있다. ‘한 번도 경험 못한 나라’의 한 번도 경험 못한 대선이다.

그래도 역대 대선엔 시대정신이란 게 있었다. 노태우 당선 때는 오랜 군부독재의 사슬을 끊고 직선 대통령을 뽑는다는 민주화의 열망, 김영삼 당선 때는 비로소 문민통치의 시대가 열린다는 희망, 김대중 때는 지역감정의 뿌리였던 호남의 응어리를 푼다는 해원(解寃), 노무현 때는 정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던 권력을 시민사회로 하방(下放)한다는 기대, 이명박 때는 이념 과잉을 벗어나 실용(實用)으로 나가자는 컨센서스가 있었다.

비록 둘 다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지만, 박근혜 당선 때는 무너져 내리는 우리 사회의 원칙을 다시 세워줄 거란 바람이, 문재인 때는 궁중통치로 망가진 정치를 복원하고 나라를 정상화해 달라는 비원(悲願)이 시대정신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뭔가. ‘공정과 상식의 복원’이나 ‘비정상의 정상화’ 같은 아름다운 말들은 ‘단군 이래 최대 공익 환수’에서 ‘단군 이래 최대 뇌물 사건’으로 변질된 대장동의 문(게이트)에서 불어오는 광풍에 흩어져 버렸다. 야당은 야당대로 유력 주자의 ‘고발 사주’ 의혹에 난데없는 ‘王’자 손바닥, 미신 막말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정책·비전 경쟁을 말아먹고 있다. 도무지 어디 눈 둘 곳 없는 대선이다.

 

압권은 역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까도 까도 의혹덩어리 ‘양파남(男)’이다. ‘친일세력과 미(美)점령군의 지배’ 운운으로 대한민국 부정(否定)은 기본이요, 종북 경기동부연합 연루설, 녹음으로 확인된 패륜 발언에 ‘공짜 불륜’과 조폭 연루 의혹까지…. 이번에는 ‘대장동 그분’의 태풍까지 몰아닥쳤다. 이 후보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뒤 다소 거칠게 살아온 점이 있다 해도 이건 너무 과하다.

과거야 그렇다 쳐도 더 심각한 건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야당·기득권 세력의 음모’라는 편 가르기, ‘국민의힘 게이트’라는 적반하장, ‘가짜뉴스’(뉴스는 가짜가 아니므로 ‘가짜소식’이 맞는 말)라는 언론 탓, 패륜을 묻는데 ‘친인척 비리는 없지 않느냐’는 둘러치기, ‘한전 직원 뇌물에 대통령이 사퇴하느냐’는 궤변, 마음에 안 든다고 중간에 인터뷰를 끊어버리는 발끈함…. 그의 과거보다 이런 대응 방식이 이 후보가 권력을 잡았을 때를 걱정하게 만든다.

 

이재명 후보가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의 잘못을 진솔하게 반성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느낌 아닌가. 바로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추미애 윤미향으로 상징되는 이 정권 사람들의 대응 방식이 꼭 이랬다. 사실 문 정권이 상식과 언어, 정의와 역사 관념 등을 파괴하면서 국민의 도덕의식을 무디게 하지 않았다면 이재명 대선 후보의 탄생은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다소 기이하지만, 그런 점에서 이재명은 이 정권에 빚지고 있다. 문 대통령 등 집권세력도 지상과제인 ‘퇴임 후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이 후보의 도덕성 따위에는 눈을 감아버렸다. 일종의 공생관계다.

이런 공생의 사슬을 끊으려면 야당이라도 정신 차려야 하는데, 아직 멀어도 한참 멀었다. 경선이 진행될수록 윤석열은 거듭되는 말실수와 검사스러운 태도, 고발 사주와 가족 의혹 등이 겹쳐지면서 특유의 ‘권력과 맞짱’ 이미지가 변색하고 있다. 여기에 야당인지 여당인지 모를 홍준표의 윤석열 때리기와 막말 행진, 갑자기 독해져서 뜬금없는 유승민의 언행까지 겹쳐 보수 야당의 기득권 본색(本色)에 저질 페인트까지 덧칠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이번 대선도 두 편으로 갈라져 40 대 40의 진영 대결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나머지 20의 중도와 2030세대를 잡는 쪽이 승자일 텐데, 국민의힘 주자들은 이들을 위해 무슨 정책과 비전을 보여준 게 있나. 야당이 이런 짝이라면 문 정권 시즌2인 ‘두 번 경험해선 안 될 나라’ 오지 말란 법이 없다. 그래도 선거까지는 140여 일. 내년 3월 10일 아침, 이번 대선에도 시대정신이 있었다는 뒤늦은 자각(自覺)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것은 ‘대한민국 정상화’였다고.

박제균 논설주간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