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했으나 모두가 잊은 이름
오마이뉴스|2시간 전
- 이전 기사 가장 '혁명적인' 도서관 사상은 1930년대에 나왔다에서 이어집니다. "헌법에도 농지를 농민에게 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농지국으로 해야 합니다. 만일 토지개혁국으로 하면 한민당과 지주 등쌀에 간판이 사흘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강진국은 조봉암 장관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법안 명칭을 '농지개혁법'으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강진국이 이끄는 농지개혁팀은,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이 땅의 '소작제도'를 철폐하기 위해 조심스럽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대한민국 초대 농지국장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O-100번지다. 강진국이 초대 농지국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살던 집터다. 지금은 다세대 빌라로 바뀌었다. 강진국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아, 이 주소지 이후 그가 어디서 살았는지 분명치 않다.
"이 일에 국가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나는 강 국장만 믿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만 놀려선 안 됩니다. 농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조봉암 장관의 요청대로, 농지국장 강진국은 밤낮으로 농민을 만났다. 농촌 실태를 파악하고, 농민이 원하는 바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두 달 동안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 농촌을 '암행 시찰'하고 돌아온 강진국은, 조봉암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신변에 위험이 있어서 신분을 속였습니다. 시골에도 공산분자가 숨어 있어서 정부 농지국장이라고 하면 그냥 놔두지 않을 것 같고,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지주 쪽도 방해할 것 같아 신문기자라고 속였습니다. 농민들에게 당신들의 말을 신문에 싣겠다고 했는데 대꾸조차 안 합니다. 땅을 나눠달라 하면 자칫 빨갱이로 몰리고, 지주에게 미움을 사서 소작을 뺏길지 몰라서입니다. 게다가 악질 지주들이 소작인들에게 '토지개혁은 어렵다. 당신에게는 싸게 팔 테니 어서 사라' 하며 강제로 사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농민들 불쌍합니다. 온종일 죽어라 일하는데 일본 군인들이 입다가 버리고 간 군복을 누더기처럼 기워서 입고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며 삽니다. 바로 소작으로 착취당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강진국은 농민이 원하는 개혁안을 만들었다. 그의 표현처럼 토지개혁을 통해 "농지는 농민에게"라는 이상을 실현하려 했다. 7장 25조로 이뤄진 '농지개혁법' 시안은, 1948년 12월 중순 강진국 국장 집에서 탄생했다. '농지개혁법'이 탄생한 강진국의 집은 어디일까? 당시 강진국은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3가 O-100번지에 살았다. 이 지번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강진국의 유일한 주소지다. '농지개혁법'의 최종 조문 작성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역사적인 이 법안의 최종 조문은, 강진국 국장과 4명의 과장이 여러 날 동안 철야 작업을 한 끝에 탄생했다. <농지개혁법>이 농민에게만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용이었을까? 강진국 국장이 시안을 마련해서 장관을 찾아갔을 때 조봉암은 이렇게 말했다. "지주도 살아야 할 것 아니오." 농민의 바람을 담되, 지주의 입장도 고려하는 절충을 통해, '농지개혁법' 시안은 탄생했다. 강진국 국장이 마련한 '농지개혁법' 시안이 '유상매상 유상분배'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장점을 절묘하게 담았다고 평가받는 건 이 때문이다. 좌도 우도 아닌, '제3의 길'로 농지개혁을 추진한 것이다. 1949년 4월 27일 '농지개혁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중앙청 의사당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고, 농림부장관을 비롯한 관계자와 국회의원은 서로 얼싸안았다. 농지국장 강진국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대한민국이 강력한 성장 엔진을 얻은 까닭
1949년 4월 중앙청에서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 <농지개혁법>이 통과됐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 청사로 쓰던 이곳을 캐피탈 홀(Capital Hall)이라고 불렀다. 위당 정인보가 캐피탈 홀을 ‘중앙청’(中央廳)으로 번역하면서 널리 쓰였다. 중앙청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 무대였다. 1967년 6대 대통령 취임식 무렵 중앙청 사진이다.
'농지개혁법'이 강진국의 원안대로 통과된 건 아니다. 정부의 최종안(기획처안)과 국회 본회의를 거치면서, 농지국이 마련한 원안은 상당 부분 수정됐다. 그럼에도 강진국은 '농지개혁법'의 정신과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애썼다. '농지개혁법'의 '원안을 수립한 사람'으로서, 그는 자부심과 함께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농지개혁 실무를 추진하던 시절, 강진국은 딸을 잃었다. 1949년 11월 17일 그의 딸이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는 1949년 11월 18일 자 기사로, 농지국장 강진국의 딸이 병으로 죽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참척'(慘慽)이라고 한다. 참혹할 참(慘), 근심할 척(慽), 말 그대로 '참혹한 일'을 겪었음을 의미한다. 개인적으로 큰 슬픔을 겪었음에도, 농지국장 강진국은 농지개혁 실무를 진두지휘했다.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주대환은, 조봉암이 주도하고 강진국이 실무를 지휘한 토지 개혁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토지혁명"으로 규정했다. '유상매상 유상분배' 방식으로 추진된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국민은 평등한 출발점에 섰다. 농민은 소출의 30%를 5년 동안만 내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었다. 소작료가 50%에 육박하던 농민 입장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주에게는 정부가 채권을 지급했다. 이 채권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인플레이션이 크게 일어나면서 휴지 조각이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농지개혁과 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급속히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농지개혁의 이름은 '개혁'이었지만, 그 파장은 '혁명'에 가까웠다. 수천 년 이어온 '소작농'(小作農)이 '자작농'(自作農)으로 전환했기 때문이다. '소작제'는 이렇게 철폐되었다. 대한민국 출범 과정에서 농지개혁이 '예방혁명'(preventative revolution)의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계급 철폐와 함께 평등해진 신분, 농지개혁으로 균등해진 경제력은 대한민국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자유 대한'은 '평등 대한'으로 출발했기에, 제3세계 신생국가보다 강력한 성장엔진을 얻었다. <조봉암 평전>에서 이원규는 농지개혁의 성과와 의미를 이렇게 평했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이룩해냈다. 농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줘 혁명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1950년 나라 전체가 공산화되는 것을 막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대부분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이 자녀 교육으로 집중됐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2003년 세계은행 정책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분배가 평등할수록 장기적인 경제성장률이 높았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 타이완, 한국, 중국, 일본의 경제성장률이 유난히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강진국의 삶
죽산 조봉암은 1959년 8월 2일 망우리공원 묘지에 묻혔다. 이곳에는 한용운, 오세창을 비롯한 독립운동가와 방정환, 이중섭 같은 문화예술인의 묘소가 있다. 묘소 앞 어록비에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라는 죽산의 말이 새겨져 있다.
대한민국 출범 과정에서 강력한 개혁을 성공시킨 '농지개혁팀'은 어떻게 되었을까? 1950년 3월 9일 3대 농림부장관 윤영선이 취임하면서, 강진국은 농지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도쿄제국대학 농업경제학과 출신으로 당시 농업문제 일인자로 꼽힌 농림부차관 강정택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납북되었다(울산 출신 강정택은 국립도서관 초대 관장 이재욱의 대구고보 후배다). 강진국과 함께 농지국에서 농지개혁 실무를 맡았던 윤택중, 배기철, 안창수 3명의 과장은 월북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농지개혁팀이 와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농지개혁팀 중에 조봉암 장관과 농지국장 강진국만 남한에 남았다. 강진국도 고초를 겪다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한국전쟁 때 자신이 겪은 일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강 차관은 6.25 때 빨갱이에게 잡혀갔고, 나 자신은 정치보위부에 끌려가 갖은 곤욕 끝에 구사일생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정치보위부로 쓰인 곳은, 공교롭게도 소공동 국립도서관 건물이다. 많은 이가 국립도서관에 끌려갔다가 납북되었다. 강진국은 운 좋게 납북을 피했다.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강진국은, 정치인으로 활동을 모색했다. 그는 1950년 5월 30일 치른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다. 대구시 병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850표(2.38%)를 득표해서 낙선했다. 1951년 6월 국회부의장이었던 조봉암은 새로운 정당 창당을 추진했다. 이승만 정권은 가칭 '자유사회당'이라 불린 조봉암의 신당을 '대남간첩단 사건'으로 엮어 탄압했다. 서울시 경찰국 사찰과에서 발간한 <사찰요람>을 보면, 자유사회당 준비위원으로 강진국의 이름이 올라 있다. 이 무렵 강진국이 조봉암 신당에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강진국은 1954년 5월 20일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다시 '출마'했다. 서울시 15선거구(영등포갑구)에 출마한 그는 당시 49세였다. 12명이 출마한 선거구에 그는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420표(1.26%)로 낙선했다. 출마 당시 그는 직업을 '저술가', 경력을 '한국산업경제소장'으로 기록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경향신문>과 <조선일보>에 농업과 중소기업 문제에 관한 칼럼을 활발히 기고했다. <조선일보>에 쓴 칼럼에 그는 '경제평론가'로 소개되어 있다. 1957년 3월 29일에는 기독교방송 라디오 좌담회에 패널로 참석했다. 1956년 1월 22일 강진국은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기념사업회인 '성재학계'에 이름을 올렸다. 회장 격인 도유사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맡았고, 강진국은 재무 담당으로 참여했다. 대한민국의 성공에 기여한 도서관인
강진국은 사진조차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과 그의 사진이다. 초대 농지국장이었던 그는 ‘농지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0년대에는 도서관에 근무하며 농촌문고 사상을 펼쳤다. 강진국은 한국 도서관인 중 가장 ‘혁명적인 도서관 사상가이자 사서’였다.
한편, 농지개혁의 주역인 조봉암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 이승만의 강력한 정적(政敵)이 된 조봉암은, 1959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당했다. 재심 청구를 기각한 지 17시간 만에 조봉암의 사형은 집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박철환'(朴鐵丸)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일제의 심장부에 '강철탄환'으로 날아가 박히기를 원했던 '혁명가' 조봉암은 그렇게 스러졌다. 1960년 7월 29일 치른 제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강진국은 부산 동래구(경남 10선거구)에 출마했다.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이 총선에서 혁신계는 후보 난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강진국이 출마한 부산 동래구는 사회대중당 후보만 4명이 경합을 벌였다. 결국 1960년 5대 총선에서 강진국은 2,195표(5.33%)로 낙선했다. 1950년부터 그는 세 차례에 걸쳐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정치인이 되려 했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남아 있는 강진국의 '생년월일'이다. 2대 총선 때는 1903년 5월 30일, 3대 총선 때는 1905년 5월 20일, 5대 총선 때는 1904년 7월 29일로 기록되어 있다. 1905년생으로 알려진 그의 생년월일은, 선거 때마다 다르게 기재되었다. 강진국은 1961년 2월 28일 농협중앙회 부회장 선거에 입후보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농협 고문이었다. 1974년 4월 <동아일보>가 <비화 제1공화국>을 연재할 때 강진국을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연재 기사는 그를 '농업경제신보사 고문'으로 소개했다. 1982년 <중앙일보>는 농지개혁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면서, 강진국의 회고를 실었다. 이 회고가 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강진국의 마지막 행적이다. '진보당 마지막 생존자' 정태영은 1991년 <조봉암과 진보당>을 펴냈다. 집필 과정에서 정태영은 강진국의 증언과 면담을 활용했다. 정태영은 1989년 12월 26일 강진국으로부터 증언을 들었고, 1991년 1월 20일에는 강진국과 면담했다. 1991년까지 강진국이 생존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강진국은 86세였다. 그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강진국의 이후 소식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한국 근현대 도서관사에서 '가장 뛰어난 도서관인이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는 강진국이다. 도서관 분야에 업적을 남긴 사람은 여럿 있지만, 대한민국 출범에 강진국만큼 영향을 끼친 도서관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도서관(농촌문고)을 통해 거대한 도약을 꿈꾼 그는, 농지개혁으로 신생 대한민국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동시에 강진국은 '비운의 도서관인'이다. 박봉석과 엄대섭, 이봉순은 책이 출간되고 문화훈장까지 받았지만, 강진국은 '그런 사람이 있었느냐'라는 질문조차 남지 않았다. 강진국이 태어난 지 116년. 우리는 그가 어떻게 말년을 보냈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알지 못한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했으나, 대한민국도 도서관도 잊은 이름, 강진국. *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은 1부 세상이 잊은 사람들, 2부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3부 북녘으로 향한 사람들, 4부 우리 도서관의 이방인들로 구성했습니다. 각 부마다 4명씩, 모두 16명의 인물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강진국' 편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연재를 읽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①편과 ②편 2개의 기사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 글은 ②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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