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한줄명상]법정 스님 “행복은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한다”
중앙일보
입력 2021.10.13 05:00
백성호의 현문우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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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한다.”
#풍경1
2006년 봄날이었습니다.
당시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이 종종 법문을 했습니다.
강원도 오두막에 살다가
길상사에 와서 대중을 향해 법문을 내놓곤 했습니다.
송광사 불일암에 벗어놓았던 법정 스님의 흰 고무신. 찢어진 고무신 뒤꿈치를 기운 자국이 보인다.
그날 법상에 오른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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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다음에 이루어야 하는 목표가 아닙니다.
당장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이 순간의 행복은 놓치고 있습니다.”
길상사에는 침묵이 흘렀습니다.
대중은 법정 스님의 ‘행복론’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법정 스님은 이 말을 덧붙였습니다.
“다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무심히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그 안에서 행복의 싹이 튼다.”
저는 ‘무심히’라는 말에서 울림이 왔습니다.
글자 그대로 무심(無心)히는 ‘마음 없이’라는 뜻입니다.
슬픈 마음, 기쁜 마음, 아픈 마음, 성난 마음을 내려놓아 보라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이 보일까요.
지금 이 세상에 이미 내재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겨울에 내리는 눈,
봄에 피는 꽃,
여름에 내리는 소나기,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
내 감정의 선글라스를 벗고 보면
이 모두가 ‘아름다운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법정 스님은 “그런 시간을 가져야 행복의 싹이 튼다”고 했습니다.
#풍경2
우리는 ‘먼 곳’에 익숙합니다.
늘 먼 곳을 바라보고, 먼 곳을 동경합니다.
‘님은 먼 곳에’란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꿈꾸는 행복의 순간도
늘 먼 곳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법정 스님의 다비식에서 장작이 타고 있다. 법정 스님의 상좌들이 영정 사진을 들고 있다.
우리는 ‘먼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백 걸음, 천 걸음, 만 걸음 달려간 뒤에는 어떨까요.
거기에 있는 ‘먼 곳의 행복’을 내 손에 쥐게 될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천 걸음, 만 걸음 나간 뒤에는
거기서 다시 천 걸음, 만 걸음 뒤에 있을 거라 설정한
‘더 먼 곳의 행복’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덧 우리의 삶에도 황혼이 내리겠지요.
인생에서 백 걸음, 천 걸음, 만 걸음을 걷지 말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이미 존재하는 행복을 맛보면서
간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런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결국 ‘나의 인생’이 될 테니 말입니다.
#풍경3
그날 법문을 하던 법정 스님은 아프리카 탐험대 일화를 꺼냈습니다.
유럽 탐험대였습니다.
탐험에 필요한 짐들은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짊어지고 갔습니다.
물론 길 안내까지 겸해서 말입니다.
탐험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화가 난 탐험대의 유럽인들이 그들을 다그쳤습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까지 너무 빨리 왔다.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유럽에서 온 탐험대원들이 놓치고 있던
무심의 순간을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이미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건 원주민들의 표현처럼
내 삶과 내 영혼이 보폭을 맞추어 가는 여정입니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남긴 글과 글씨. [사진 금강스님]
#풍경4
가을밤, 별들이 참 많습니다.
별은 아주 멀리 있습니다.
별들이 울어대는 고흐의 그림을 봐도,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읊조려봐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행복, 우리의 별은 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말입니다.
이 우주의 어딘가에 행복의 별이 있겠지.
내 인생에도 그런 행복의 순간이 오겠지.
언젠가는 그 별에 가닿을 수 있겠지.
우리는 늘 멀리 있는 행복을 꿈꿉니다. 그러느라 지금 내 앞에 있는 행복을 지나치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없는 별,
먼 곳에만 있는 별.
그런 별을 찾으며
우리는 밤하늘을 바라봅니다.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달에 가서 보면 어떨까,
화성에 가서,
목성에 가서,
아니면 더 먼 우주에 가서 보면 어떨까.
맞습니다.
거기서 바라보면
지구가 그런 별입니다.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별,
그토록 가고 싶던 별,
그토록 살고 싶던 별.
우리가 바로 그 별에 살고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그린 고흐의 작품. 달에서 바라보면 지구야말로 아름답고 푸른 별이다.
거기가 어디일까요.
우리가 지지고 볶으며 숨 쉬고 있는
지금 여기입니다.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백성호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중앙일보 종교 담당 기자입니다. 일상의 禪, 생활의 영성이 소중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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