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마지막 인터뷰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죽는 것은 돌아가는 것… 내가 받은 모든 게 선물이었다"
"죽음 알기 위해 거꾸로… 유언같은 '탄생' 써내려가"
"촛불 꺼지기 전 한번 환하게 타올라, 그것은 신의 은총"
"나중 된 자 먼저 돼, 죽음 앞에서 당당했던 딸 좇아"
"괴테처럼… 인간과 학문 전체를 보는 제너럴리스트로"
이어령 전 장관(87세). 생의 마지막 시간을 치열하게 쓰고 있다.
"이번 만남이 아마 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예요."
이어령 선생이 비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지난주에 보기로 했던 약속이 컨디션이 안 좋아 일주일 연기된 터.
안색이 좋아 보이신다고 하자 "피에로는 겉으로는 웃고 속으로는 운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품위 있게 빗어넘긴 백발, 여전히
호기심의 우물이 찰랑대는 검은 눈동자, 터틀넥과 모직 슈트가 잘 어울리는 기개 넘치는 한 어른을 보며 나는 벅참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살아생전, 이어령의 회갑연에서 두 장의 그림을 그려주었다.
TV 상자 안의 말(馬) 그림과 TV 상자 안의 입술(말言이 터지는 통로) 그림이었다. 말(言)이라는 무기를 들고, 말(馬)달리는
자가 이어령이었다.
그가 쏟아낸 말은 과거를 달릴 때나 미래를 달릴 때나 주저가 없었다.
스킵(skip)과 시프트(shift), 축지법과 공중부양을 자유자재로 구사해서, 선생과 앉아 인터뷰하던 서재는 늘 ‘매트릭스’나
‘인터스텔라’ 같은 SF 영화의 세트처럼 느껴지곤 했다.
오늘 마주 앉은 방엔 책 한 권, 서가 한 칸 없이 고적했다.
기품이 넘치는 이태리산 적갈색 책상과 의자 한 벌. 한 면을 가득 채운 녹색 벽엔 선생과 교류했으나 먼저 세상을 뜬 세계의
지성들이 보내온 편지와 사진, 기사로 채워져 있었다. 루이제 린저, 이오네스코, 누보리얼리즘의 창시자 알랭 로브그리예,
노벨문학상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 등등. 선생은 한 명 한 명 짚어가며 그들과의 인연을 즐겁게 회상했다.
한국의 지성의 큰 산맥이었던 이어령. 22살에 문단 원로들의 권위의식에 비수를 꽂는 선전포고문 ‘우상의 파괴’로 유명 인사가
이후, 65년간 때로는 번뜩이는 광야의 언어로 때로는 천둥 같은 인식의 스파크로 시야의 조망을 터주었던 언어의 거인.
벼랑 끝에서도 늘 우물 찾는 기쁨을 목격하게 해준 우리 시대의 어른.
십수 년 전 이미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라는 아름다운 미래문명을 선창한 분임에도, 당신이 제일 잘한 일은 문화부 장관 시절
‘노견(路肩)’을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했다.
오늘 선생 앞에 앉아 있으니, 갑자기 아득하여 88올림픽 개막식에서 그가 연출했던 잠실벌의 굴렁쇠 소년이 생각났다.
햇빛 내리쬐는 광장에 쓰였던 한 줄 정적의 시. 가을비가 대지를 적시는 오늘, 나는 그에게서, ‘죽음'이라는 한 편의 시를
듣게 될 터였다.
그는 항암치료를 마다한 채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책을 쓰고, 강연하고, 죽음까지 기록할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었다.
머지 않아 ‘탄생'이라는 책이 나오는데, 이 인터뷰로 가까운 이들에게 "그동안 함께 해줘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고.
사진 촬영을 할 땐 "씽킹맨(Thinking Man)은 웃지 않는다"고 겁을 주더니, 인터뷰 내내 "쫄지 마!"라고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죽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 줄 오늘 처음 알았다.
그의 말 속에서 과거의 탄생과 미래의 죽음이 만났고,그렇게 그의 주례로 ‘아름다워진’ 현재가 탄생했다.
-건강해 보이십니다.
"나같은 환자들은 하루에도 듣는 코멘트가 여러 가지야. "수척해 보여요." "건강해지셨네." 시시각각 변하거든.
알고 보면 가까운 사람도 사실 남에겐 관심이 없어요. 허허. 왜 머리 깎고 수염 기르면 사람들이 놀랄 것 같지? 웬걸.
몰라요. 남은 내 생각만큼 나를 생각하지 않아. 그런데도 ‘남이 어떻게 볼까?' 그 기준으로 자기 가치를 연기하고 사니 ]
허망한 거지. 허허." 남겨진 생의 시간이 유한하여, 나는 선생께서 하는 말은 무엇이든 듣고 싶었다.
토씨 하나, 한숨 한 자락이라도 놓치기 싫어 "예전처럼 자유롭게 대화하자"고 부탁드렸다.
-혼자 기다리며 녹색 벽에서 선생께서 젊은 시절에 신문에 쓰신 ‘모리악의 기침 소리'를 보았습니다.
"(미소지으며)내가 프랑스에서 모리악 선생을 만나고 쓴 거지. 여기엔 없지만 실존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과의 추억도 있어요.
그때 그분이 여든이 좀 넘었을 때야. 생각해보면 지금 나보다 젊었는데 아파트 계단을 못 올라가셨어요. 내가 등에 업히라고
했더니 화를 내요. 나는 시체가 아니라고(웃음). 서양 문화는 부축은 받아도, 업히는 건 수치로 여겨요. 한국은 다르지.
상호성이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봐도 처음 만난 아들과 아버지가 업고 업혀서 냇물을 건너잖아. 사위가 장모를 업고
사장이 사원을 업어줘요. 다들 어릴 적 엄마 등에 업힌 기억이 있거든."
-업어준다는 건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준다는 건데… 서양인에겐 익숙지 않은 경험이군요.
"그들은 아이를 요람에서 키우니까. 태어나자마자 존재를 분리하지요. 땅에 놓으면 쥐들이 공격해서 아이를 천장에 매달아
두기도 했어요. 우리나라는 무조건 포대기로 싸서 둘러업잖아. 어미 등에 붙어 커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천성이 착해요(웃음).
서양은 분리가 트라우마가 돼서 독립적인 만큼 공격적이거든. 한국의 전통 육아는 얼마나 슬기로워요.
오줌똥도 쉬쉬~, 끙아끙아~ 하면서 어린애 말로 다 유도를 했거든."
-요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쓰신다고 들었습니다. 지난번 뵐 때 ‘마지막 파는 우물은 죽음’이라고 하셨는데요.
"죽음을 앞두면 죽는 얘기를 써야잖아? 나는 반대를 써요. 왜냐? 죽음은 체험할 수가 없으니까. 사형수도 예외가 없어요.
죽음 근처까지만 가지. 죽음을 모르니 말한 사람이 없어요. 임사체험도 살아 돌아온 얘기죠. 살아 있으면 죽음이 아니거든.
가령 이런 거예요.
어느 날 물고기가 물었어. "엄마, 바다라고 하는 건 뭐야?" "글쎄, 바다가 있기는 한 모양인데 그걸 본 물고기들은 모두
사라졌다는구나." 물고기가 바다를 나오면 죽어요. 그 순간 자기가 살던 바다를 보지요. 내가 사는 바다를 볼 수 있는 상태,
그게 죽음이에요. 하지만 죽음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수는 없는 거라. 그래서 나는 다른 데서 힌트를 찾았어요."
1982년, 이어령은 일본인을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고 명명하며, 섬나라 사람들에게 정체성의 경종을 울렸다.그 책은 일본에서 출간 5개월 만에 12만 부가 판매되었다.
-어디서 힌트를 찾으셨나요?
"죽을 때 뭐라고 해요? 돌아가신다고 하죠. 그 말이 기가 막혀요.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면 결국 죽음의 장소는
탄생의 그곳이라는 거죠. 생명의 출발점. 다행인 건 어떻게 태어나는가는 죽음과 달리 관찰이 가능해요.
2~3억 마리의 정자의 레이스를 통해서 내가 왔어요. 수능 시험보다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거지(웃음).
그런데 그 전에 엄마와 아빠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또 그 전의 조부모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계속 거슬러 가면
36억 년 전 진핵 세포가 생겼던 순간까지 가요. 나는 그렇게 탄생을 파고들어요."
-죽음을 느끼면서 태어남 이전을 복기한다? 엄청난 속도의 플래시백인데요. 뇌에서 빅뱅이 일어났겠습니다.
"허허. 그렇지요. 모험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과거에 있어요. 진화론자의 의견에 비추어보면 내 존재는 36억 년
원시의 바닷가에서 시작됐어요. 어찌 보면 과학은 환상적인 시야. 내가 과거 물고기였을까, 양수가 바닷물의 성분과 비슷하니
그럴지도 모르겠다...
태아 형성 과정을 보면 아가미도 물갈퀴 자국도 선명하게 보이거든. 그렇게 계산하면 내 나이는 사실 36억 플러스 여든일곱 살이야.
엄청난 시간을 산 거죠. 죽음에 가까이 가고서 나는 깨달았어요. 죽음을 알려고 하지 말고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과거로 가서 미래를 본다는 설명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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