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대통령 닮지 않은 분을 찾습니다’
16년 정권 내주고도 꿈자리 뒤숭숭하지 않을 독일 메르켈
나라 돌아가는 꼴에 화나고 아파야 희망 생겨
입력 2021.10.02 03:20
전임자(前任者)를 닮은 후임자를 찾는 선거도 있다. 지난 26일 치른 독일 총선이 그랬다. ‘어디 메르켈만 한 사람 없나’ 하는 게 독일 국민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웃한 프랑스와 영국 그리고 대서양 건너 미국도 ‘메르켈 없는 유럽연합(EU)’ ‘메르켈 없는 미국-유럽 관계’를 걱정하는 눈길로 독일 총선을 지켜봤다. 총선에서 안정 의석(議席)을 확보한 다수당이 나오지 않았다. 여러 정당을 묶는 연립정부 구성으로 가닥이 잡혔는데, 현재로선 그래도 메르켈과 닮은 구석이 있는 사회민주당(SPD) 대표가 차기 총리로 유력하다고 한다. 이만하면 메르켈에게 훌륭한 마무리다.
지난 2015년 4월30일 앙켈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베를린 모렌스타라세역 근처 단골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한경진 기자
내년 3월 9일 새 대통령을 뽑는다. 문재인 대통령과 닮은 사람을 찾는 선거가 될까. 아니면 문재인 닮은 사람은 ‘다시는 안 된다(never again)’는 선거가 될까. 어느 여당 후보자도 ‘문 대통령을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가 당선돼도 정권 연장(延長)이 아니라 ‘정권 내 정권 교체’라고 은근슬쩍 내세운다. 후계자 운운(云云) 해선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야당 후보들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다. 후임자(後任者)의 자격 요건이 ‘절대로 전임자와 닮아서는 안 된다’는 나라의 국민들은 어떤 세월을 살았을까. 이러고도 퇴임 후 꿈자리가 뒤숭숭하지 않기를 바라기는 어렵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메르켈 리더십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경우라도 문제가 폭발하거나 악화되지 않게 하는 관리의 묘(妙)를 터득했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는 ‘멋진 말을 남기지 않았지만 멋진 행동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다른 무엇보다 메르켈의 노후(老後)가 편안하도록 보장한 것은 ‘메르켈 시대에 정치는 사납지 않았고 생활은 편안하고 넉넉해졌다’는 독일 국민의 공통(共通)된 기억이다. 권력자의 퇴임 후 신변 보장책으로 이만큼 든든한 것은 없다. 내 손안에 든 경찰로 담을 두르고 공수처로 대문 빗장을 지르고 법원과 검찰로 안방 자물쇠를 채웠다고 퇴임 대통령이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메르켈이 총리에 취임한 2005년 독일 경제는 동맥경화증을 심하게 앓는 유럽의 환자(患者)였다. 메르켈은 집권 16년 동안 독일 경제를 되살려 유럽의 기관차로 다시 달리게 하고 베를린을 유럽 정치의 심장으로 뛰도록 바꿔놓았다. 메르켈은 기회 있을 때마다 그 공(功)을 경쟁 정당 소속 전임자 슈뢰더 전(前) 총리에게 돌렸다. 슈뢰더는 노조(勞組)의 기득권을 줄여 독일 경제 혈관에 쌓여가던 노폐물을 제거해 노동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곳곳에서 줄줄 새던 사회보장제도 파이프의 구멍도 틀어막았다. 슈뢰더 개혁의 꽃이 메르켈 시대에 핀 것이 사실이다. 전임자에게 공을 돌린다고 자신의 공적이 줄어들지 않는 게 고급(高級) 정치 수학이다. 전임자들을 감옥에 쟁여 놓아야 자기 시대가 환해지는 것이 아니다.
구(舊) 동독 목사님 딸인 자그마한 체구의 메르켈은 겁이 없었다고 한다. 1995년 개에게 한번 물린 다음 개는 무서워했다. 메르켈의 퇴임 소식을 전한 미국과 유럽 신문들은 다 같이 사진 한 장을 실었다. G7 정상회담 사진이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트럼프가 팔짱을 낀 채 앉아 거드름을 피우고 건너편에 메르켈이 서서 트럼프 눈을 빤히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다른 국가 정상들은 메르켈 옆과 등 뒤에서 겁에 질린 듯 이 대좌(對坐)를 지켜보고 있다. 독일 국민들은 이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메르켈은 생각이 다른 여러 유럽 국가들의 뜻을 한데 모아 자주 미국을 뒷받침했지만 ‘높은 산’이라며 미국에 굽신거리지 않았다.
강원랜드는 코로나로 관광업이 얼어붙기 전인 2019년 매출 1조5200억원 순익 5110억원을 기록한 공기업이다. 정부는 며칠 전 이 회사 사장으로 민주당 지역위원장, 부사장에 민주당 의원 보좌관, 상임 감사는 총리 공보실장, 비상임 이사에 민주당 강원도당 부위원장 출신을 임명했다. 권력을 잡으면 이래도 된다는 것이다.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가 자신이 설계했다고 자랑한 판돈 1조원 규모 ‘화천대유 도박장’에 수많은 얼굴이 올라왔다. 대법관, 검찰총장, 검사장, 특검(特檢), 야당 의원(여당 의원도 곧 나올 듯하다)…. 당첨자가 누가 될지 미리 알고 하는 도박이니 일종의 사기 도박이다. 진짜 주연(主演)은 내년 대선 결과에 따라 영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지도 모른다.
‘국민 여러분, 분노(忿怒)와 통증(痛症)을 느끼십니까, 뭐라고요, 크게 말씀해 주세요.’ 화나고 아파야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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