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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누구를 위해 마스크 쓰나" 이어령이 서울대 졸업생들에 묻다

"누구를 위해 마스크 쓰나" 이어령이 서울대 졸업생들에 묻다
중앙일보
입력 2021.08.27 10:00

업데이트 2021.08.27 10:11


김호정 기자

 

9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서울대 졸업식 축사를 녹화하고 있다. “몸은 병들고 나이는 아흔 줄이지만 떠돌아다니는 2030의 젊은이들을 위해 덕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상선 기자



“마스크 한 장이 남과 나, 공과 사의 이분법을 무너뜨리고 공생의 가치를 보여줬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27일 오전 서울대학교의 75회 후기 학위 수여식에서 전한 메시지다. 이날 졸업식은 미리 제작한 영상으로 온라인에서 열렸다.

이 전 장관은 이달 9일 서울 평창동 자택에서 두 시간 가까이 축사를 녹화했다. 서울대학교는 이를 10분 분량으로 편집해 서울대 홈페이지, 유튜브의 온라인 졸업식에서 공개했다. 팬데믹에 대학을 졸업하는 이들을 비롯해 젊은 세대에 전하는 메시지였다. “비대면으로 수업한 졸업생들은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디지로그(digilog)의 개념을 체득했다. 젊은 여러분은 생명 자본의 중요성을 생생히 경험한 세대다.”

9일 녹화 현장에서 만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수척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귀가 자꾸 울리고 목도 마른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동안 축사 한 사람들은 복장을 어떻게 했느냐” 물은 뒤 넥타이와 재킷을 갖춰 입었다. 두 시간 동안 목이 잠겨 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마다 보온병에 담긴 물을 마시며 주장을 펼쳐나갔다. 이 전 장관은 암 투병 사실을 2019년 처음 세상에 알렸고 치료 없이 집필에 몰두했다.

이 전 장관의 서울대 축사는 13년 만이다. 2008년 서울대 입학식에서는 동요 ‘떴다떴다 비행기’를 인용해 축사했다.〈본지 2008년 3월 4일 자 1ㆍ3면〉다음은 10분으로 편집된 축사의 전문과 녹화 후 이어진 본지의 일문일답이다.

축사 전문
 영광스러운 졸업식에 축사를 하려고 나왔지만 제 눈앞에서는 검은 카메라 렌즈만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 축하의 꽃다발도 축하객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100년 가까운 서울대의 역사 가운데 오늘과 같은 졸업식을 치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든 궂든 여러분들은 비대면 강의를 듣고 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그룹에 속한 졸업생이 된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디지털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10년 앞당겨서 학습하게 되었고 그리고 살결냄새 나는 오프라인의 아날로그 세상의 소중함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수업만이 대학이 아니라 잔디밭 교정을 거닐며 사사로이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던 것 역시 대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디지털 공간의 ‘접속’과 아날로그 현실의 ‘접촉’이 상반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로 ‘융합’한  디지로그 (digilog=digital x analog) 시대를 살아갈 주역이 된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 팬데믹을 퉁해서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한 사람의 기침 하나가 내 일상의 생활을 뒤집어 놓은 상황도 겪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어떤 물질적 가치보다도 생명의 내재적 가치가 우선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고 그 순간 물질 자본이 생명 자본으로 전환하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코로나 팬데믹의 학습효과로 누구나 쓰고 다니는 똑같은 마스크 한 장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찾아 낼 수 있는 시각과 생각을 얻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여러분에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이유를 물으면 “나와 남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답변할 것입니다. 간단한 대답 같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답변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서 쓴다”라는 사적/이기적 답변이 아니면 “남들을 위해서 쓴다”의 공적/이타적 답변밖에는 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같은 경쟁사회에서는 나[自]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남[他]에게는 실[失]이 되고 남에게 득이 되는 것은 나에게는 해가 되는 대립관계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배재의 논리가 지배해 왔던 까닭입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코로나 팬데믹으로 우리는 마스크의 본질과 그 기능이 그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면을 모두 통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서 쓰는 마스크”라는 공생관계는 지금까지 생명의 진화를 먹고 먹히는 포식관계에서 남을 착취하는 기생관계로 해석해 왔던 편견에서 벗어 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똑같은 마스크를 쓴 얼굴이지만 그것을 쓰고 있는 마음에 따라서 포스트 코로나의 앞날이 결정될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70억의 세계 사람을 향해서 당신은 왜 마스크를 쓰고 있는가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돌아 올까요. “나와 남을 위해서” 라고 말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에서 쓰라고 하니까 쓴다고 대답 할지 모릅니다. 오랫동안 획일주의 전제주의 밑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 많은 까닭입니다.

여러분들은 자타(自他)와 공사(公私)의 담을 넘은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만들어가는 주역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손안에 있는 학위수여증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보증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비대면으로 치루어진 졸업생 여러분들에게 보내는 저의 축하 메시지입니다.

일문일답
십여년 전 입학식에서는 ‘떴다떴다 비행기’로 축사를 하셨는데 이번 졸업식에서는 종이비행기가 아닌 마스크 한장이 떴습니다. 그 변화 과정이 궁금합니다.  
"2008년 당시 나라와 시대 상황은 뜨기만 하고 날지를 못하는 종이비행기와 같았지요. 그레서 '떴다 떴다 비행기/ 날아라 날아라/ 높이 높이 날아라/ 우리 비행기'의 동요는 유치원생이 아니라 입학식을 하는 젊은이들은 물론 우리나라 전 국민이 불러야 하는 노랫말이었습니다. '우리 비행기'라는 말을 입학생의 개인 이름이니 학교나 기업체명 무엇보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보세요.


세계 10위의 경제권으로 부상(浮上)한 한국을 ‘이머징 스테이트’ (emerging states)라고 하는데 이번에는 코로나19라는 ‘이머징 바이러스(emerging viruses)’로 마스크가 떠올랐습니다. 종이비행기처럼 자체동력과 뚜렷한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떠다니고 있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머징 스테이트에서 이머징 바이러스로 수면 위로 갑자기 떠오른다는 이머징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네요. 종이비행기와 마스크의 공통점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종이비행기도 마스크도 하찮고 흔한 것들이지만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본다는 말대로 오늘의 상황 전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지요. 70억 인류의 얼굴을 일시에 바꿔놓은 게 바로 그 마스크 한장이 아닙니까. 인터넷에는 마스크를 쓴 모나리자까지도 등장하고 있어요.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단 마르셀 뒤샹도 하지 못한 그 신비한 미소를 뭉개버린 것입니다."

그 마스크가 디지로그와 생명 자본과는 어떻게 연결되나요.   
"모나리자의 입을 가린 마스크에서 우리는 지금껏 그냥 지나쳤던 모나리자의 눈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환갑을 지난 옛날 제자들인데도 마스크를 쓴 그 얼굴에서 20대의 젊은 그대로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을 나는 코로나 패러독스의 효과라고 부릅니다."

코로나 패러독스로 젊은 학생들이 전공과 관계없이 교과목에 없었던 디지로그와 생명 자본의 이론을 학습하게 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까닭도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향해 울고 있는 것이다'와 같은 릴케의 시를 모르는 사람들도 무관한 사람끼리 운명처럼 뒤얽혀 있는 두렵고도 신비한 생명체의 비밀들을 익히게 된 것이지요."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는 곧 남을 위해 마스크”라는 말씀에서 ‘자리행 이타행(自利行 利他行)’이나 ‘자타불이(自他不二)’와 같은 말이 떠오르는데요.
"멀리 갈 것 없이 경영학에서 말하는 ‘윈윈 전략’이라는 말도 있죠. 원래 한국에는 ‘누이좋고 매부좋고’ ‘도랑치고 가재잡고’ 같은 말들이 많아요. 하지만 서구문명이 주도해온 실제 경쟁사회에서는 모두가 공염불이지요."

마스크의 기능과 본질이 공과 사, 자와 타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선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코로나 패러독스가 현실이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마스크를 컴퓨터라고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이만 시스템의 컴퓨터는 0과1의 대립과 차이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앞으로 등장하는 양자 컴퓨터는 0과 1이 포개져 있어요.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적 차이가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함께 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어려우면 이솝우화의 게임 규칙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 알면 됩니다. 뭍에서 뛰는 토끼와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북이에게 땅에서 달리기 경주를 시켜보세요. 아무리 노력해도 거북이가 지는 게임입니다. 오늘 날 2030 젊은이들이 절망하는 것이 바로 불공정한 잘못된 게임 규칙과 그 일방적인 획일화의 잣대입니다. 만약 게임 룰을 바꿔 헤엄치는 경주를 해보세요. 토끼는 패자가 아니라 익사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단일의 물질 자본(돈)을 잣대로 하는 사회를 다양한 생명을 자본으로 삼는 사회로 바꿔나가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질 것입니다."

이제야 공생의 의미를 담은 마스크의 의미가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경제학자요 미래 학자로 첫손 꼽히는 자크 아탈리가 코로나 시대를 겪고 ‘생명경제’를 주장하는 저서를 서둘러 간행한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축사는 건강 때문에 여러 번 고사하셨다고 들었는데요. 
"몸이 불편하고 나이도 아흔 줄이에요. 늙고 병들었지만 떠돌아다니는 2030의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학위 수여식에서 덕담을 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나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아닌 ‘너와 나를 위해 쓰는 마스크 한장의 가치’를 공유하고 공감한다면 출신 연령, 성별 그리고 건강 조건과 관계없이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갈 동행자가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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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