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락 1주 전... 대통령은 잔디밭 독서, 정부군 “탈레반은 형제”
월스트리트저널 “아무도 이렇게 빨리 무너질지 몰랐다”
입력 2021.08.21 15:50
아프가니스탄과 미국 정부 아무도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이렇게 빨리 카불을 장악할지 몰랐다고 미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0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카불 함락 일주일 전인 지난 7일. 아슈라프 가니 당시 아프간 대통령은 법무장관 등 관료들과 모여서 회의 일정을 소화했다. 회의가 끝난 후 남은 시간은 대통령궁에 있는 에메랄드빛 푸른 잔디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궁 관계자는 밝혔다.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AP 연합뉴스
가니 대통령이 책을 읽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아프간은 무너지고 있었다. 매 시간 주요도시들이 함락되고 있었다. 북동쪽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쿤디즈가 그날 저녁 함락됐고, 그 후 24시간이 지나지 않아 많은 주도(州都)들이 저항 한 번 없이 탈레반의 손에 넘어갔다.
이날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집이 있는 월밍턴에 머물렀다. 인근 필드스톤 골프장에서 라운딩을 한 뒤, 도쿄올림픽에 참가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을 만났다. 백악관은 바이든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 관련 상황을 중간 중간 보고 받고 있었다고 밝혔다.
8일, 미 대사관은 미국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최대한 빨리 떠냐야 한다고 경고 했다.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도 시민들이 ‘대피하는 게 맞지 않냐’고 얘기했지만 여전히 국외로 향하는 비행기 좌석 대부분은 비어있던 상태였다.
이렇게 한가한 모습은 ‘탈레반이 미국 군대가 철수하는 8월31일 전에는 카불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판단 때문이라고 WSJ는 분석했다. 많은 워싱턴 관료들은 휴가 중이었고, 당시 미 국회의 논의는 코로나 경기 부양책인 인프라 투자 법안에 집중됐다. 카불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자라(25)씨는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모든 게 완전히 평소와 같았다. 카불이 함락되려면 적어도 3~4달은 걸릴 줄 알았다”고 했다.
지난 20일(현지 시각) 인도에 사는 아프간 난민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다./AP 연합뉴스
10일 아프간 재무장관은 “이제 자리에서 물러나 개인적으로 소중한 것들을 챙길 때다”라는 글을 올리고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아프간 밖으로 도망갔다. ‘엑소더스’가 시작될 것을 걱정한 가니 대통령은 정부 관료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떠날 수 없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이달 20일까지 여권을 갱신하거나 발급하는 업무를 중단하라고 했다. 이날 아프간 외무 장관은 WSJ와 인터뷰에서 “탈레반의 진격 속도 때문에 놀랐다”고 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같은 날 인프라 투자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된 걸 축하하고 있었다. 아프간에 대해 질문을 받자 “아프간 리더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 철군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11일 아프간 군 사령관은 정부군이 힘을 합쳐야 한다거나 군사적 전략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않았다. 대신 군인들이 핸드폰 앱을 통해 급여를 받는 방법에 대해서만 언급했다. 이 기간 주요 결정은 국가 안보 보좌관인 함둘라 모히브가 내렸다. 38세 외교관인 그는 군 경력이 없었다. 모히비는 군대 지휘체계는 무시하고, 전장에 나가있는 장군들과 소통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같은 날 탈레반은 북부 지역을 휩쓸고 난 뒤 카불 남쪽인 가즈니를 점령했다. 카불로 가는 문이 열린 것이다. 이 지역 주지사 라흐마니는 정권을 넘겨주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 받았다. 탈레반 후임자에게 꽃까지 선물했고, 본인은 탈레반의 호송대에 의해 안전하게 주 밖으로 도망쳤다. 가즈니 함락은 탈레반이 카불로 진격하는데 터닝 포인트가 됐다.
아프간 가즈니에 탈레반이 점령했다는 깃발이 걸려 있다./AP 연합뉴스
이 때부터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아프간 시민들은 탈레반이 미국이 철군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비행편이 매진됐다. 비자 가격은 급등해 암시장에서 거래됐다. 수 천명이 카불에 있는 여권 발급소로 몰렸다.
미국은 계속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였다. 미 국무부 관계자는 “아프간 정부군이 장비를 갖고 있고, 싸우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프간 주재 미 대사관에는 민감한 문서를 모두 파쇄하라고 지시했다.
12일 카불에서는 가니 대통령이 회의를 소집했다. 카타르 도하에서 탈레반과 협상하고 온 압둘라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 등이 참석했다. 이 때 아프간 대통령이 사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정국이 요동쳤다. 미국은 아프간에 펼쳐진 혼돈상황에 망연자실 했고, 통역 등 미국인을 도운 아프간 사람들에 대해 걱정했다.
13일 카불은 패닉 상태였다. ATM기에는 현금이 떨어졌다. 도시는 이미 인근 지역에서 탈레반을 피해 도망쳐온 사람들로 가득 찼다. 정부군은 거리에 앉아 망고 주스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탈레반은 우리 형제”라는 대화를 나눴다. 카불에 있는 각국 대사관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14일 카불 동쪽 도시 잘랄라바드가 함락됐다. 모히브 보좌관은 미국 관리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고 익명의 관계자가 WSJ에 밝혔다. 모히브는 미 시민권자인 자신의 아내에게 본인 대신 요청해달라 했고, 그녀의 요청이 더 빨리 승인됐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카불 함락 하루 전까지도 가니 대통령은 공식적으로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방어 전략 회의도 열었다. 뒤에서는 함락된 각 주 리더들과 만나 자신이 사임할 것이고 탈레반에게 권력을 넘겨주려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카불에선 탈레반 복장의 남성들이 목격됐다고 한다. 그들은 핸드폰으로 영상을 찍었다. 그러나 정부 경찰은 신경쓰지 않았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탈레반이 카불에 와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각 식료품 가게에 사람이 몰렸는데 신선한 식품들은 이미 다 팔린지 오래였다. 카불대학은 이날 별도 공지가 있을 때까지 휴교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15일 아프간 시민들이 돈을 인출하기 위해 은행 앞에 길게 늘어서있다./AP 연합뉴스
카불이 함락된 15일. 이날 아침 날씨는 맑았다. 사람들은 아침부터 아직 현금이 남아있다고 소문난 중앙은행 밖에 긴 줄을 섰다. “정부가 시민을 배신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산발적인 총성이 들렸으나 탈레반이 진격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었다.
가니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회의를 열었다. 모히브 보좌관이 위험 상황이라고 전했고, 경호팀은 대통령이 피신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대통령과 모히브 등 관료들이 두 그룹으로 나눠 대피했다.
그리고 이날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고 대통령궁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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